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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령항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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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은 항구를 찾을 일이다.
그냥 바다는 한없이 넓고 멀리 바라보여서 오히려 막막하다.
사람은 몸 부려 앉고 누울 곳이 있어야 안정감이 드는 것처럼
시야도 막연하게 너무 넓은 것보다 어딘가 편안하게 눈길 머물 곳이 있어야 편안하다.
항구, 그것도 너무 큰 항구보다 자그마한 항구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항구 앞바다에 둥둥 떠 있는 작은 섬 몇 개가 바라보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눈길을 뻗어 멀고 가까운 바다를 바라보다가 가까이 바라보이는 작은 섬에서
가물가물 잊혀져가던 추억 한 점을 집어 올린다.
그리고 그 눈길 거두어 다시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먼 바다에서 갈매기 몇 마리 거느리고 그리움 찾아 돌아오는 고깃배 한 척,
급히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서서히 눈길을 들려 깃발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오는 작은 어선에
그 추억을 실으면 마음도 어느새 포근한 항구로 다시 돌아온다.
어항의 선착장은 항상 시끌벅적하다.
통통통 고깃배 기관소리와 부웅부웅 뱃고동소리,
고깃배에서 생선 내리는 소리. 흥정하고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 덩달아 끼룩거리는 갈매들의 소리.
그래서 항구의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다. 그 소란함 속에 팍팍한 삶을 녹여내는 활기가 있고 생명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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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판장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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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오징어잡이 배 아녀?"
갑판에 집어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보면 오징어잡이배가 맞는 것 같다.
오징어들이라고 어느 바다인들 못가겠는가,
동해에서 서해로 생활터전을 옮긴 오징어들 덕분에 서해의 항구에도
오징어잡이 배들이 뜨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이야기다.
"이 키조개 만원에 열 개면 아주 싸게 드리는 거구만유, 옛날에야 어디 키조개 쉽게 볼 수나 있었남유?"
충남 보령항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천이라고 불렀었는데 그 사이 이름이 바뀌었다.
오후여서 그런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어판장은 썰렁했지만
횟집들과 소매상들이 몰려 있는 뒤쪽은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여기가 인천보다 더 좋은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횟감을 고르고 있었다.
인천에서 왔다고 한다.
인천항은 이곳 보령항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큰 항구다.
그래도 이곳에 한 번 와보고 싶어서 왔단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느냐고 슬쩍 떠보자
오래전 이곳 대천해수욕장에 추억을 남겨두고 갔었다고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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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싱한 생선과 조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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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조개와 키조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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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추억은 있게 마련인가보다.
어획량이 줄었다고 해도 시장의 가게 앞은 생선들이 지천이다.
꼬물꼬물 거리다가 다리를 쭈욱 뻗쳐 그릇 밖으로 탈출하려는 낙지도 보이고 쭈꾸미도 한철이다.
"에이! 그렇게 그냥 가시면 나는 오늘 장사 헛장사구만유, 그러면 안 되지유."
나이 들어 보이는 상인아주머니의 간청에 천원 지폐 몇 장을 더 쥐어주고 가는
중년부부의 비닐주머니에 담긴 쭈꾸미와 키조개가 무거워 보인다.
상인 아주머니에게 정말 헛장사가 맞느냐고 물으니 그래서 몇 천원 더 받지 않았느냐고 씨익 웃는다.
우리들도 키조개와 횟감을 샀다. 3만원어치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주머니를 대신 받아들고 앞장을 선다.
2만원에 야채와 양념, 매운탕 끓여주는 것까지 모두 책임진다며 따라 오란다.
우리 일행이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니 역시 바닷가의 횟집이다.
먼저 들어온 듯한 두 팀은 모두 3~4명씩의 여성들이다.
그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잠시 기다리자 간단한 양념들과 함께 먼저 다듬고 갈무리한 키조개가 횟감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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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선을 널어 말리는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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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행 중 한 사람은 조개를 날로 먹는 것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끓는 물에 살짝 익혀먹기로 했다.
그런데 살짝 익힌 키조개 맛이 쫄깃한 것이 한결 맛이 좋아 모두 그렇게 먹는다.
조개를 먹고 있는 사이 횟감도 나왔다.
"나도 한 잔 하면 안 될까?"
평소 술을 즐기는 친구가 술 한 잔이 그리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오늘 승용차를 몰고 왔기 때문에 돌아갈 때도 운전대를 잡아야할 사람이었다.
"술은 당연히 안 되지. 자! 여기 음료수나 대신 들면서 생선회나 많이 먹으라고."
아쉬운 듯 음료수 잔을 드는 친구가 몹시 아쉬운 표정이다.
"거참! 한 잔 하면서 옛날 추억이나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안 되는구먼."
술과 추억이라. 남자들은 대개가 그랬다.
추억 속에 술이 있고, 술 속에 추억이 묻어 있고.
"저희들 이 옆자리에 좀 앉아도 괜찮을까요?"
또 여성들 네 명이 들어왔다.
대부분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들이다.
그런데 굳이 우리들의 상과 우리들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40대 여성들 사이의 빈상에 앉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조금 비좁기는 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아! 그럼은요. 이곳이 우리 집도 아닌데, 같이 앉으셔야죠."
그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자 방안이 한결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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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생선은 얼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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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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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횟집에 자리 잡은 사람들 가운데 남성은 우리 팀뿐이다.
"어르신 이것 좀 같이 드시죠?"
옆자리의 여성이 역시 살짝 익힌 쭈꾸미를 내게 권한다.
그런데 어르신이라, 어쩐지 듣는 느낌이 묘하다.
그쪽에서는 우리들을 대접해주는 말이겠지만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성들로부터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그만큼 우리들이 늙어 보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어이 친구, 인제 염색 좀 하고 다녀라. 머리가 온통 백발이니 어르신이라는 말을 듣게 되잖아?"
그런가? 한 번도 염색을 해보지 않았다는 거의 완전백발의 친구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희들은 청주에서 왔구만요. 나이는 몇 살 차이 나지만 벌써 몇 십 년을 사귄 친구들이지요."
"자! 오늘 보령의 즐거운 시간을 위하여!!!"
그녀들은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말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남성들 이상으로 호방한 모습이다.
오랜만에 보령항을 찾았다고 한다.
옛날 젊었던 시절에 몇 번인가 대천해수욕장에 다녀간 기억이 있는데 다시 와보니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변한 것이 어디 이곳 항구뿐이겠는가,
어쩌면 이곳을 다시 찾은 사람들이 더 많이 변했을 것이다.
"정말 많이 변했는데요. 저희들도 오랜만에 왔는데."
우리들보다 먼저 와 있던 40대여성들도 우리들의 이야기에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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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글보글 맛있는 생선매운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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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선가게들 사이에 있는 건어물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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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군산에서 왔다고 한다.
군산항이 더 좋지 않으냐고 물으니 역시 옛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어서 오랜만에 다시 들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보다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와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가까이 지내는 또래의 여성들끼리 함께 보령항을 찾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잊고 살아온 옛 추억을 더듬어 봄날의 작은 항구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횟집에서 점심까지 해결하고 밖으로 나오니
군산에서 왔다던 여성들이 먼저 나와 바닷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카메라를 꺼내 갈매기들이 물가에 앉아 있는 풍경을 몇 컷 찍었다.
"아저씨! 아니, 오라버니 저희들도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호호호"
여성 중 한명이 자신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게 내밀며 사진 좀 찌어달라고 내민다.
호칭이 금방 바뀐 것은 조금 전 술자리에서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를 들었던 때문이리라.
"그럽시다. 젊은 언니들 허허허"
40대 여성 네 명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포즈를 잡는다.
모두 점심과 곁들인 한잔 술에 발그레한 모습들이다.
다시 항구로 나서자 시끌벅적한 풍경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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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잡이배와 생선을 뭍으로 옮기는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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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게만 꼭 고아처럼 외로운 모습이지요?"
생선가게들만 즐비한 거리에 홀로 외롭게 자리 잡은 건어물가게 아주머니가 수줍게 웃는다.
어느 곳에나 외로움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외로움은 그리움을 낳는 법, 보령항은 추억 속의 그리움을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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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삶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정겨운 모습 잘 보았습니다.
겨울 바닷가를 걷고 싶은 충동...생선찌게 정말로 먹고 싶어요. 정겨운 풍경들이 향수에 젖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