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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왕봉 주변, 만천만지한 안개로 불과 수 미터 앞의 물상만 보였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안음 황석과 함양 취암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함음 덕유,
공주 계룡, 금산 주우, 지례 수도, 성주 가야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산음 황산과 삼가
감악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대구 팔공, 안동 청량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의령 도굴과 진주
집현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현풍 비슬, 청도 운문, 양산 원적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사천
와룡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하동 병요와 광양 백운,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흥양 팔전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운봉 황산, 멀리 있는 것들은 광주 무등, 부안 변산, 나주
금성, 고산 위봉, 전주 모악, 영암 월출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장수 성수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 이북으로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
었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 「遊頭流錄」에서
주) 점필재는 1471년(성종 2) 중추(仲秋)에 천왕봉을 올랐다.
▶ 산행일시 : 2022년 11월 12일(토), 무박산행, 흐림, 안개
▶ 산행코스 : 거림,세석대피소,촛대봉,연화봉,장터목대피소,제석봉,천왕봉,법계사,로타리대피소,중산리, 중산
두류생태 탐방로
▶ 산행시간 : 11시간 30분
▶ 산행거리 : 이정표 거리 19.4km(중산 두류생태 탐방로 왕복 3.2km 포함)
▶ 교 통 편 : 다음매일산악회 버스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23 : 40 - 양재역 1번 출구 전방 200m 스타벅스 앞, 버스 출발
03 : 30 - 거림, 주차장, 산행준비, 산행시작(03 : 45)
04 : 47 - 천팔교
04 : 53 - 북해도교
05 : 54 - 세석교
05 : 57 - ┫자 의신마을 갈림길, 의신마을 8.6km, 청학동 9.5km, 세석대피소 0.5km
06 : 08 - 세석대피소( ~ 06 : 30 아침식사)
06 : 50 - 촛대봉(1,703.1m)
07 : 34 - 1,693.6m봉(화장봉)
07 : 44 - 연하봉(煙霞峰, 1,723.4m)
08 : 00 - 장터목대피소( ~ 08 : 15 휴식)
08 : 32 - 제석봉(帝釋峰, 1,808.0m)
08 : 55 - 통천문
09 : 10 - 천왕봉(天王峰, 1,915.4m), 휴식( ~ 09 : 25)
09 : 37 - 천왕샘
10 : 45 - 법계사(法界寺), 로타리대피소( ~ 11 : 30 점심)
12 : 22 - ┣자 칼바위삼거리, 장터목대피소 4.0km, 중산리 1.3km
13 : 00 - 중산리 탐방안내소, 주차장
13 : 50 - 중산 두류생태 탐방로, 중산마을
15 : 15 - 용소계곡, 중산리 탐방안내소, 주차장, 산행종료(16 : 00 버스출발)
19 : 00 - 천안삼거리휴게소
20 : 10 - 양재역
2. 지리산 지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 세석대피소
오늘 연하선경 산행의 들머리인 거림(巨林)에 도착한 시간이 예상보다 1시간이나 빠른 03시 30분이다.
미사 대장님의 차내 산행 안내방송은 계속된다. “세석대피소까지 6km로 세 시간이면 도착하실 수 있을 것이고,
촛대봉 일출시간은 07시 정도 될 것이나 일기예보에 날이 흐리다고 하니 일출을 보기는 어려우실 테고, 연하선경
을 즐기신 다음 장터목대피소에는 늦어도 11시까지 도착하셔야 천왕봉을 넘어 중산리로 하산하실 수 있습니다.”
차문 열고 나서자 너른 주차장에는 우리 버스뿐이다. 주차장은 열아흐레 달빛이 가득하여 대낮처럼 환하다. 등산
화 끈 조이는 등 산행을 준비하는 데 다른 불빛이 필요 없다. 오늘 산행인원은 18명이다. 어느 누구도 선뜻 선두로
앞장서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내가 나선다. 내 거림을 오간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모든 게 낯설다. 대로
따라 오르다가 적막한 먹자동네 지나 소로의 산속에 든다. 거림골 계류 물소리가 낭랑하다.
하늘 가린 숲속 길이라 달빛 덕을 보기는 글렀다. 외길이다. 등로가 헷갈릴 수 있는 너덜지대나 풀숲 성긴 넙데데
한 사면에는 금줄을 쳐서 막았다. 촛대봉 남릉을 내 혼자라도 더듬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고 보니
아쉽다. 거림골이 캄캄한 밤에 가기는 좋다. 날이 훤한들 볼만한 별다른 경치가 없을 것이라 아무쪼록 돌길에
엎어지지나 않도록 살펴 걷는다. 신선바위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천팔교로 지계곡을 건넌다. 여기 고도가
1,008m이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지계곡을 북해도교로 건넌다. 이곳을 지나면 북해도처럼 춥다고 한다. 왜 하필 일본 북해도(홋
카이도)를 따서 이름 붙였는지 조금은 불쾌하다. 물소리 끊기고 본격적인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비로소 산
을 가는 것 같다. 겉옷 벗고 팔 걷어붙인다. 그래도 덥다. 옅은 능선 오르다 사면을 길게 돈다. 내 거친 숨소리가 온
산을 울린다. 세석교.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내내 날선 광선검(光線劍)으로 길을 뚫던 헤드램프도 무뎌졌다.
┫자 의신마을 갈림길을 지나면 세석대피소는 0.5km다. 늪지를 데크로드로 건너고 계류인 임시 식수터 갈림길
지나 잠깐 오르면 세석대피소다. 06시 08분이다. 촛대봉 일출은 07시 05분께이다. 아직 어둡다. 산정에 부는
바람이 제법 차다. 불 밝힌 취사장으로 들어간다. 이른 아침 취사하는 등산객들이 여럿이다. 그들이 끓이는 라면
냄새가 구수하여 식욕을 돋운다. 나는 간편식인 샌드위치로 아침을 대용한다. 혹시 촛대봉 일출을 볼 수 있을까
거기에 시간 맞추느라 미적댄다.
▶ 연하선경(煙霞仙境)
촛대봉 가는 길.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여 어둑하다. 돌길 0.7km 느긋이 오르고 그래도 오른쪽 암봉인 촛대봉에
올라가 본다. 조망은 고사하고 지척도 분간하기 어렵다. 이럴진대 굳이 밤을 도와 지리산을 올 것이 아니라 동네
뒷산을 가는 편이 나았다. 연하선경(煙霞仙境)은 세석대피소와 장터목대피소 사이의 능선 길 3.4Km로 지리산 주
능선 25.5km에서 가장의 아름답다고 한다. 지리십경 중 제8경이다. 촛대봉, 화장봉, 촛대봉으로 이어지며 가까이
는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사이 고사목, 멀리 전후좌우로 펼쳐지는 산 첩첩 조망은 선경이 아닐 수 없다.
화장봉(지형도의 1,693.6m봉이다)과 연하봉 또한 지리주릉의 빼어난 경점이지만 오늘은 무망(無望)이다. 도무지
사방 둘러 보이는 게 없으니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자욱한 안개는 물기를 뿜어내 풀숲은 축축하고 돌길은 젖
어 미끄럽다. 총총걸음 하여 장터목대피소다. 너무 일찍 도착하였다. 3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시간을 보낼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고, ‘대피소’라는 명칭에 시비한다. 왜 대피소라고 할까? 예전에는 ‘산장’이라고 했는데, 왜
산장이라는 명칭을 버렸을까?
‘대피소’는 등산객을 간섭하고 보호해야 하겠다는 강압적이고 행정적인 용어 냄새가 나고, 산장은 등산객이 자연
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도 한때는 모험에 도전하는 정열과 낭만의 산실이라는 분위기를 느끼게 한
다. 오시마 료키치(大島亮吉, 1899~1928)가 『山-硏究와 隨想』(1930)에서 말하는 ‘산장(山莊)’이 그립다.
“거기는 산허리의 경사가 부드러운 곳, 맑고 깨끗한 개울가, 뒤로 날카로운 산마루가 솟고 앞으로 멀리 넓은 들이
내다보인다. 그리고 저녁에는 나뭇가지를 낙조가 장밋빛으로 물 들린다. 이 산장은 단순한 등산용 산장이 아니
다. 우리가 여름이건 겨울이건 찾아가서 마음을 풀어놓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이것저것 마련된 소박한 휘테(Hutte)
여야 한다. 그래서 작은 샬레(Chalet)처럼 만들어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라고 저 바이에른 지방의 농
가 정도로 모든 것이 풍성해야 한다. 따라서 외벽은 완고한 각목재를 쌓아올리고 돌지붕이며 창틀에는 흰색 칠,
창의 유리는 아침 일찍 햇빛을 받아 반짝 거리는 곳.
그 산장에서 난로에 장작을 지피고 둘러앉아 담배 연기로 몸을 감싸며 이야기꽃을 피울 즐거운 겨울날이 언제
오는가.”
안개비에 젖고 후줄근하여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리 비싸도 사리라 하고 매점에
들렀으나, 커피와 라면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물론 커피자동판매기도 없다. 하릴없어 천왕
봉을 향한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내가 산행을 역방향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게 많은 등산객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중산리에서 시작하여 지리십경 중 제1경인 천왕일출(天王日出)을 볼 겸 천왕봉을 올랐다고 한다.
3. 촛대봉 넘어 연하선경 가는 길
4. 연하선경
7. 제석봉 주변, 한때 볼거리였던 그 많던 고사목도 스러지고 몇 그루 남지 않았다
8. 제석봉 주변
11. 천왕봉 가는 길, 이 고사목도 살아 백년 죽어 백년이라는 구상나무가 아닌가 한다
12. 바위틈에 자라는 진달래, 꽃 필 봄을 생각한다
▶ 천왕봉(天王峰, 1,915.4m)
제석봉 너른 평원을 간다. 한때 제석봉의 상징으로 볼거리였던 고사목이 대부분 스러지고 몇 그루 남지 않았다.
고사목은 구상나무였다. ‘제석봉 고사목’ 안내문이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라고 무상한 세월을 말하는 이 고사목 군락지에 얽힌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대에 숲이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
애려 불을 질러 그 불이 제석봉을 태워 지금처럼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습니다. 탐욕에 눈 먼 인간이 충동적
으로 저지른 어리석은 행위가 이처럼 현재까지 부끄러운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하다. 도벌꾼들이 이 높은 제석봉까지 올라와서 도벌했단 말인가. 도벌한 나무는 어떻게 지고 내려갔
을까? 구태여 이 제석봉 아니라도 밀림이 우거졌다는 거대한 숲인 거림(巨林)이나 그 근방에서 도벌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산불이 난 당시의 신문 기사 한 줄 찾을 수 없다. 그렇다 하니 그런 줄 알 수밖에.
제석봉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제석봉에 있던 신당이던 제석당(帝釋堂)과 관련이 깊다. 제석봉은 제석을 산봉우리
에 동일시해 숭배하여 일컬은 지명이다. 제석은 삼신제석(三神帝釋), 천주제석(天主帝釋), 제석천(帝釋天)이라고
도 하는 하늘신이며, 도리천(忉利天)에 살면서 불법을 보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다.(한국지명유래집 경상남도
지명)
제석봉도 걸음걸음 지리주릉(특히 반야봉)을 조망할 수 있는 빼어난 경점인데 오늘은 여전히 지척도 무중이다.
그래서 등로 살짝 비킨 데크전망대를 들르지 않는다. 통천문까지는 완만한 돌길이다. 통천문. 천왕봉 정상이
0.5km 남았다. 예전에는 이 0.5km가 ‘마의 구간’이었는데 지금은 가파른 바윗길 슬랩을 데크계단으로 덮어버려
영 재미없는 길이 되고 말았다. 목책 두른 칠선계곡에서 오는 길(비지정탐방구간이다)을 지나면 곧 천왕봉이다.
안개가 자욱해도 천왕봉 정상 표지석과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등산객들이 줄섰다. 바람이 서늘하여 나는 바위벽
에 기대어 휴식하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 언제 다시 올라 점필재가 조망한 첩첩 산들
을 나도 짚어보아야겠다. 중산리로 내린다. 가파른 데크계단을 이슥 내리면 절벽 아래 바위틈이 천왕샘이다.
바싹 말랐다. 금줄을 두른 것으로 보아 이제는 샘의 기능을 다하였다. 돌길이라기보다는 너덜을 내린다. 무릎이
화끈거리는 내리막이다.
개선문 지나고 법계사가 가까운 너럭바위다. 조망이 썩 좋을 듯한데 금줄을 둘러 출입을 막았다. 배낭 벗어놓고
금줄 넘는다. 아마 이 너럭바위를 혹자는 문창대(文昌台)라고 한다. 경점이다. 안개가 걷혔으나 맑은 날씨는 아니
다. 너럭바위 내리면 법계사다. 내 몇 번 이곳을 오갔으나 법계사를 들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여 들른다. 법계사 본전은 적멸보궁이다. 부처님 진산사리를 모신 절이다. 절집을 들러 주련을
살피지 않으면 그 절을 보나마나라고 한다. 적멸보궁의 주련이다.
萬代輪王三界主 영원한 진리의 왕이요, 온 세계의 주인
雙林示滅幾千秋 쌍림에서 열반을 보이신지 몇 천 년이 되었던가
眞身舍利今猶在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여기에 모셨으니
普使群生禮不休 중생들로 하여금 쉼 없이 예배케 하라
쌍림은 석가가 열반할 때 사방에 한 쌍씩 서 있었던 사라수(沙羅樹)를 말한다. 동쪽의 한 쌍은 상주(常住)와 무상
(無常)을, 서쪽의 한 쌍은 진아(眞我)와 무아(無我)를, 남쪽의 한 쌍은 안락(安樂)과 무락(無樂)을, 북쪽의 한 쌍은
청정(淸淨)과 부정(不淨)을 상징한다.
이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지(1,450m)에 위치한 절이다. 설악산 봉정암은 해발고도 1,244m라고 한
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왕봉을 오르고 내릴 때 이 법계사를 들렀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 ?)은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하면서 문창대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설치
해두고 활을 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문창대는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불렀다
고 한다. 문창대는 법계사 남쪽 능선에 0.5km 정도 떨어진 1,373.9m봉(세존봉이라고 한다) 오른쪽 바로 아래
바위를 말한다.
13. 천왕봉 가는 길
20. 천왕봉, 정상 표지석 인증 사진 찍으려고 줄 섰다
21. 법계사 쪽으로 가는 천왕봉 주변
22. 천왕샘 근처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도 중산리에서 이 법계사를 경유하여 천왕봉을 올랐다. 그의 「續頭流錄」
에서 말하는 석문은 지금의 개선문이리라. 탁영의 「續頭流錄」 일부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길의 돌투성이와
고사목은 여전하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
니 눈 밑에 펀펀히 깔렸을 따름이다. 펀펀히 깔린 그 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졌을 것이다. 오후가 되니 안개가
사방으로 합하기로, 드디어 내려와 석문(石門)을 경유하여 향적사(香積寺)에 도착하니 (……) 절 앞에 높은 바위
가 동떨어져 있는데 이름은 금강대이다.
이 바위에 올라보면 눈앞에 기묘한 봉이 수 없이 나열했는데, 흰 구름이 항상 둘려 있다. 법계사(法界寺)로부터
상봉에 가고 또 향적사에까지 가는 데는, 모두 층층의 비탈을 돌고 돌았었는데, 비탈의 전면은 전부 돌이 깔리고
산도 모두 첩첩의 돌뿐이라, 낙엽이 돌구멍을 메워 초목의 뿌리가 거기에 의탁하여 살기 때문에, 가지가 짧게 꺾
이니 모두 동남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구부러지고 앙상하여 가지와 잎사귀가 제대로 발육되지 못했는데 상봉은
더욱 심하다.”
법계사 연만한 스님이 너덜 골짜기에 쌓인 낙엽을 비로 쓸어 마대에 담고 있다. 바위틈에 박힌 낙엽은 일일이
손으로 빼낸다. 참견하고 싶은 말이 입 밖에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송풍기로 확 불어 사면 풀숲으로 쓸어
버리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왜 그렇게 답답하게 하시냐고 말하려다 참았다. 어쩌면 이도 수행 중이리라.
법계사에 절집을 나와 100m 내리면 로타리대피소다. 대피소 테라스에 따스한 양광에 비춘다. 식탁 한 개 차지하
여 점심밥 먹는다. 시간 보내느라 갖은 애쓴다. ┫자 갈림길 왼쪽은 순두류(2.7km)로 가고(거기는 중산리를 오가
는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직진은 중산리(3.3km)로 간다. 직진한다. 이 앞의 1,373.9m봉이 예전에 세존봉이었고,
그 오른쪽 바위가 문창대이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당연히 들렀을 텐데 몰랐다. 오른쪽 사면 도는 잘난 길을
따라 내린다.
등로는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렸고 주변은 빽빽한 산죽 숲이라 아무 볼 것이 없다. 도무지 해찰할 일이 없다.
쭉쭉 내린다. 칼바위 삼거리. 오른쪽은 장터목대피소(4.0km)로 간다. 그쪽 가는 도중의 유암폭포가 수량이 많다
면 들르겠는데, 그러한지 물어 볼 거기서 내려오는 사람도 없다. 출렁다리 건넌다. 중산리 탐방안내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다. 버스는 16시에 출발한다. 때마침 미산대장님의 차내 안내방송이 생각난다. 시간이 남으면 중산
마을 가는 골짜기 데크로드 1.6km를 걸어보라고 했다. 중산마을에 가서 기다리면 우리 버스가 가는 길에 태운다
고 했다.
▶ 용소계곡, 중산 두류생태 탐방로
간다. 차도 따라 내려가다 ┫자 갈림길에서 이정표 안내대로 골짜기로 간다. 용소계곡이다. 안내판에는 ‘중산
두류생태 탐방로’라고 한다. 데크로드로 간다. 계곡이 상당히 깊다. 계곡의 여러 명소를 먼발치로 본다. 활량소
폭포, 실소, 자라바위, 구시소 폭포, 너른바위, 모래소 지나 중산마을이 금방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계곡 너덜을
거슬러 가보자. 계곡을 간다. 너덜이다. 큼직한 바위를 오르내린다. 암릉이다. 짜릿한 손맛 본다.
오늘 지리산 연하선경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다. 특히 구지소 폭포와 활량소 폭포에 다가가기란 단순히
계곡 너덜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암벽 암봉을 올라야 한다. 그 다음에는 옥계반석에 배낭 벗어놓고 세면탁족한
다. 그러고도 45분이 남았다. 주차장 옆에 있는 거북산장식당(음식점이 이 한 곳밖에 없다)에 들러 소우거지국밥에 소주 한 병 주문한다. 문득 중산리, 중산마을의 중산은 도대체 어느 산에 연유할까 궁금증이 인다.
점필재 김종직의 「遊頭流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
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
은 증봉(甑峯)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증봉(甑峯)은 왕시루봉을 말한다. 시루를 닮아서 ‘시루(시리) 증(甑)’을 사용해 증봉이 되었다고 한다. 중산은 한국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중봉을 말한다. “중봉 中峰 Jungbong [異] 중산(中山), 군의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봉우리이
다. 지리산 천왕봉이 동북쪽으로 맥을 뻗어 솟은 첫 봉우리가 중봉이며, 중봉에서 하봉과 두류봉으로 맥이 이어
진다. 조선 후기에『두류전지』라는 지리산의 산지(山誌)에는 지리산 명승지 중의 하나로 중봉이 포함되었다. 예전
에는 중봉과 함께 중산(中山)이라고도 불렀음을 김종직의『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점필재 김종직이 「遊頭流錄」에서 말한 “속히 석문을 꿰어 내려와 중산을 올라가 보니(亟穿 石門而下。登
中山。)”의 석문은 지금의 개선문일까 의문이다. 탁영 김일손이 「續頭流錄」에서 말하는 석문은 개선문이 분명한
데 말이다.
23. 천왕봉 남쪽 지능선 향적대
24. 아래 계곡은 법천계곡
25. 세존봉(1,373.9m)과 문창대, 그 뒤 멀리는 구곡산
문창대는 세존봉 오른쪽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이다.
26-1. 법계사 일주문 현판
26-2. 법계사 삼층석탑
27. 써리봉 남릉
28. 법천계곡, 날이 맑다면 저 끝으로 천왕봉이 보인다
29-1. 용소계곡 활량소 폭포, 폭포보다 앞에 드리운 감나무가 더 보기 좋다
29-2. 활량소 폭포, 계곡을 내려가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한량(閑良)이라는 뜻은 원래 돈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한량은 직업은 없으나
가진 돈은 많았으므로 차림새도 항상 깔끔했고, 소란스럽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리 깔린 하얀 반석 위로 미끄러
지듯이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한량의 자태를 보는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2011년 홍수 이전에는
이상하리만치 여기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히 흘렀다고 한다. 지금도 물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긴
스커트가 바람에 날리듯 물줄기가 작은 폭포를 만들고, 기암괴석이 그 옆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안내문에서, 이하 같음)
30. 용소계곡, 중산마을 쪽이다, 중간에 띠 두른 바위는 너른바위, 내리반석이다
너른바위는 이름 그대로 바위가 아주 넓어 붙여진 것이다.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는
땅속으로 중산 입구 계곡 호텔까지 약 700m 정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또 달리 이 바위를 ‘내리
반석’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이곳은 중산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성시 되는 장소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내거나 동네 회취(會聚)나 중요한
행사 등을 하는 곳이었다. 모내기를 끝내고 여름 농한기로 접어든다는 것을 알리는 행사인 ‘써래씻기’를 하여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농촌의 두레정신이 담긴 곳이다.
31. 구시소 폭포
구시소 폭포는 한마디로 소 구시(‘구유’의 방언)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인지 이곳
은 중산마을 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인 ‘보’의 구실을 했었고, 마을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곳이
었다. 지금도 주변에는 물을 가져가는 데 사용하는 검은색 송수관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예전 변
변한 목욕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여름철이면 중산마을 아낙네들이 여기서 몸을 씻었던 곳으로 천혜의 천연대중탕
역할도 겸했다고 한다.
32. 구지소 폭포 주변
33. 용소계곡, 중산마을 쪽이다
34-1. 용소계곡 무명폭
첫댓글 담멜 산아캐로 가신듯
날씨가 안도와 주네요
동네 뒷산보다 나을 게 없었습니다.
보이는 게 없으니 ㅠㅠ
안개로 너무 날이 안 좋았네요. 그래도 용소계곡이 좀 위안이 되었을 듯 합니다.
비는 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용소계곡은 데크로드로 가는 것보다 계곡너덜이 훨씬 재미납니다.^^
종일 지리안개속을 다녀오셨군요...여럿이 갔으면 그래도 괜찮았을터인데...시간이 남아 평소에는 보지못했을 주변 경치구경도 솔솔합니다^^
새벽에는 맑았는데 달이 지자마자 흐려지더군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안갯속 고사목이 예술입니다.
멋진 풍경 구경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