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누가복음을 읽으며 전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바나바에 대하여 도전을 받게 된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눅 23:18, 개역개정)
무리가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친 것은 전적으로 예수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결정권자인 빌라도의 판단에는 예수를 처형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어떻든 그를 석방하려 했었다. 살다가 경험하는 억울한 일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짜여진 틀에 갇힐 때가 있다. 예수님처럼. 그럴 때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억울함을 당할 때 누군가는 행운의 혜택을 누릴수도 있다는 교훈이다. 바라바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지만 이스라엘의 구전에 의하면 그는 폭동을 주도한 범죄자라고 알려져있다. 사형에 처해야할 만큼의 사회불안을 야기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군중은 엉뚱하게 예수가 아닌 범죄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알수없는 세상 일이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이해하자면 대속이다. 바라바를 살리기 위해 예수가 희생을 당한 것이다. 대속이다. 지금까지 바라바의 이야기를 읽으며 단 한전도 느껴보지 못한 도전이다. 구전에 의하면 예수 덕분에 살아난 바라바는 회심하고 전도자로 일생을 헌신했다고 한다. 어떻든 바라바로서는 예수님 때문에 구사일생의 행운아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대속의 은총이 주어진다. 바라바는 대속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준 시청각 교재가 된셈이다.
오늘 밤부터 장마비가 시작된다고 한다. 물이 필요한 나로서는 장마가 반갑다. 물이 폭우처럼 내려야 비로서 물탱크를 가득 채울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