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0. 큐티
시편 11:1 ~ 7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의 뵈오리이다
관찰 :
1) 표제어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본 시편의 저작 배경이나 동원되는 악기 등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본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것과 본 시편이 지휘자의 인도를 받아 연주되는 제의 음악이란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네 산으로 도망가라
-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 다윗은 위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주변 사람들이 여호와께 피할 것이 아니라 새 같이 산으로 도망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산”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피할 곳, 도망칠 곳을 의미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피하라는 권면에 대해서 “어찌함인가”라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여호와 하나님께 피난처를 두고 있는데, 다른 피난처를 찾아 떠나라는 것에 대해서 어이없어 하는 다윗의 반응입니다.
-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일 시위에 먹여서 이제 손을 놓기만 하연 화살이 날아와 자신에게 박히게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앞 절의 사냥꾼에게 노출된 새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악인들이 다른 사람을 사냥꾼과 같이 어두운데서 활을 당겨 공격하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 악인이 어두운데서 화살을 당겨 쏘게 되면 의인이 그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죽거나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와 같이 악인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의인이 살 소망이 없어진다는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터”(הַשָּׁתֹות, 하솨토트)는 ‘놓다’, ‘두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토대’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번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인생사의 근간을 이루는 법과 정의와 도덕을 가리킵니다. 사회적 근간이 올바로 서 있으면 의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다윗이 직면하고 있던 상황은 악인들이 사회적 규범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주변 사람들은 법과 정의가 올바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의인은 피하여 숨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다윗에게 “산”으로 도망치라고 권면한 것이었습니다.
3) 감찰하시는 하나님
-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 다윗의 주변 사람들의 주장에 대하여 다윗이 자신의 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성전에 계셔서 모든 인생을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의인과 악인 모두를 감찰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인이 악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의인을 감찰하시는 분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그 심중에 품은 뜻과 말과 행위를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사랑하시고 그를 보호하시고 살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하여 악인을 폭력을 좋아하는 자와 동격으로 다우고 계십니다. 악인이 아무리 은밀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고자 하더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모든 의도는 폭력을 좋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인, 그런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을 마음에 미워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악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하나님은 파멸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던지시는 그물은 바로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그물이 악인에게, 또한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떨어지게 되자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일상이 되어 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잔의 소득”이라는 의미는 ‘잔의 할당’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이나 악인 모두 심판자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심판의 잔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할당해 주신 바에 따라서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의인에게는 이것이 구원과 상급의 잔이 될 것이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인에게는 이것이 멸망과 영원한 고난의 잔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악인에게 임할 재앙이 이미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정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 다윗은 악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산으로 달아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면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 밝히고 있습니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정직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 이것이 악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보호를 받는 가장 큰 능력이 될 것임을 다윗은 담대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팔복으로 가르쳐주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과 겹쳐서 보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축복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고, 보호받지 못할 일이 없고, 피하지 못할 위급한 상황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직함으로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는 의인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믿음으로 사냥꾼의 화살 표적이 된 새와 같은 위경에 처한 자신이 문제를 극복하는 자리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르침 :
1) 다윗의 주변 사람들, 특별히 그가 신뢰하는 친구들은 다윗이 처한 위급한 상황에 대해서 산으로 도망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말하는 권면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권면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옳은 듯 보이지만 이미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다윗에게 세상적 관점으로의 행위를 따를 이유가 없다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위태위태한 상황에 있었지만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전을 확보했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모두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찰한다는 것은 깊은 것까지 모두 샅샅이 살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인의 마음 깊숙한 악한 의지까지 다 살피신다는 것이고, 의인의 마음 깊숙한 여호와를 경외함을 다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기에 악인의 궤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다윗은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했습니다. 그가 블레셋 아기스 왕 앞에서 침 흘리며 미친 척 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사울을 결정적으로 두 번 죽일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는 분이심을 잘 알았기에 사울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3) 다윗은 하나님이 악인을 다스리실 것을 믿음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좋아하는 자와 악인을 동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때, 다윗을 괴롭히는 악인이 다윗을 죽이고자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산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로, 블레셋 땅으로 도망다녔지만 그것이 다윗이 산으로 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자신의 대적들에게 세상적인 방법에 의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루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 다루시는 것이 자신이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그들을 벌하는 것이 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4)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붙잡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로운 행위를 하실 것이고, 공의로 심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직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을 볼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영성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리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적용 :
1)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으로 피할 길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 모든 사정을 아뢰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고, 최고의 솔루션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마음도, 의인의 마음도 다 살피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판사와 완전 다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제 중심을 아시고, 다 살피신다는 것이 제겐 안심이 됩니다. 제가 미얀마에 오게 된 것, 국제학교를 하고자 했던 것, 그것이 어그러지게 된 것, 그리고 지금까지 오게 된 모든 과정을 주님께서 잘 아시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엘 로이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