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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충재박물관과 보양식 장어........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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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충재박물관과 보양식 장어........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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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 입구에 있는 충재 박물관 이곳을 또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요?. 유랑자는 청암정에서 마음껏 자연과
정자의 수려(秀麗)함을 느끼고 돌아서 나와 충재 박물관으로 향한다, 먼저 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다. 어지간하
면 입장료를 좀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고맙게도 무료라고 하니 유랑자는 코로나 절차를 밟아서 안으로 입
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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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박물관은 말 그대로 충재 권벌의 선생의 생애를 담아놓은 그런 박물관이다. 이곳엔 충재일기(보물261호),
근사록(보물 제262호), 권벌 종가 고문서(보물901호) 외 충재 권벌 종가에 그가 생전에 남긴 많은 문서들을 보
관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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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상다리가 미안할 정도로 풍성하게 차려진 권벌 제사상의 위엄 :~충재박물관 정문에는 권벌 제사상의 모형도가 있다. 차려지
는 음식만 과일을 합쳐서 무려 40종이 넘는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호화로운 제사상이라 '아직도 이렇게 제사를 지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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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충재일기(보물 216호)는 그가 승정원 등 중앙관직에 재직할 때 쓴 일기로 임진왜란 이전 역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한, 전적(보물 896호)에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문서들로 중종 2년인 1507년 과거 때 제출한 과거시험지 답안, 과거합격자 명단, 합격증, 각종 사
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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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는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보물 482점을 포함해서 총 1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렇듯 종가에
는 전국 여러 종가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에 이를 잘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어,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에게 그의 삶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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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권벌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 호는 추쟁.환정, 시호는 충정이다. 연산군2년(1476) 진사시에 합
격하고 중종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과 각 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충재선생
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 번의 큰 사화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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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사화시기 중에도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
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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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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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68세에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
윤 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삼 대신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와 ‘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도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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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일로 인해 그는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암튼 그는 조선중기 사림의 등장시기를 대표하는 문신 중의 한명이다. 당시 을사사화
로 인해 당시 권벌뿐 아니라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의 큰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결국 그도 유배지에
서 7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평가와
함께 복권 및 증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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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901호 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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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권(試券) - 보물 901호:1507년 권벌이 문과 별시에 붙었을 때 그가 제출했던 시험 답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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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닭실마을 충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중 권벌이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한 흔적을 보여 주는 유물들
이다. 또한 권벌 종가 유묵(보물 902호)는 권벌이 살았을 때 써 둔 필적을 모아둔 것으로 명필 김구의 초서체
족자, 퇴계 이황의 서첩, 미수 허목의 글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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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당대 문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로 퇴계 이황이 쓴 청암정 현판에 걸린 시, 명나라에서 가서 당대
의 명필로부터 받은 글씨 등 다양한 교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볼수 있으며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
적으로 약 3,000책이 소장되어 있다. 충재 박물관은 충절로 이름난 충재 권벌 선생과 여러 선현들의 유지를 기
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전시 및 보존할 충재박물관이 2007년 9월 15일 (토)오전 11시 30분에 닭실마을에서
개관식을 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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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은 송나라 때 주자<朱子, 주희(朱熹)>와 그의 제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만든 책으로 일상 수양에 필요한 장구(章句) 622조
록을 추려내어 14부로 분류한 14권의 책이다.
권벌이 소장한 근사록은 1370년 이인민(李仁敏, 1330~1393)이 작성한 것으로 14권과 15권 끝에 '성산이씨간우진양(星山李氏刊于
晋陽)'이란 전문을 새겼고, 그 다음 종형인(鐘形印) 안에 '홍무(洪武) 3년(홍무는 명태조의 연호)', 정형인(鼎形印) 안에 이노숙(李魯淑,
이인민의 호가 '노숙')을 새겨서 작성 시기와 간행자, 간행처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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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글씨라고 전하는 '충(忠)' 족자
권벌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가져온 것이다. 주원장의 친필인지 아니면 그것을 모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족자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광(權斗光) 집안에서 보관해오다가 후손 권주섭이 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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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有旨) - 보물 901호
1539년 중종이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린 교서로 명나라에서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잘못 기록한 것을 지적하며 이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고자 권벌에게 개종개주청사(改宗系奏請使)의 임무를 부여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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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물들이 평가한 충재선생의 인물평과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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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재 박물관은 2004년 착공하여 2007년 마침내 준공된 충재박물관은 사업비 17억5천6백만원, 연면적 464
㎡규모로 유물 도난방지를 위한 방범장치를 비롯하여 소장품이 서적류임을 감안하여 항온항습기도 설치하는
등 첨단시설을 설치하여 유물보존에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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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충재박물관이 선현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그와 더불어 닭실마을도 봉화
를 대표하는 전통마을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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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선생문집 - 권벌의 시문집으로 10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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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단자(戶口單子) - 보물 901호 :호주(戶主)가 호적작성을 위해 관청에 제출한 문서 (1690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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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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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를 살짝 야사(野史)가 있는 다른 곳으로 빠져보자. 점심으로 그동안 땀흘리며
걸어다니느라 지친 몸의 체력 보강을 위해 보양식으로 장어나 먹으면서 닭실마을 안동권씨 집안에 재미있는
일화를 함 이야기 해보자. 당시 권씨 가문의 총명함은 그 여종까지 미쳤는데, 바로 시인 설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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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한 여인이 있었다. 영특했고 미모도 뛰어났다. 그러나 신분이 여종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종으로 태어
난 여인에게 미모며 영특함은 오히려 짐일 수 있었다. 그 영특한 머리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설죽(雪竹)이 그런 여인이다. 설죽의 원래 이름은 알현(閼玄)인데 생몰연대
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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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용 복숭아 모양 은술잔 :은으로 만든 술잔으로 2개가 1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전 닭실마을에서 혼례 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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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선(翠仙), 또는 월연(月蓮)이란 호를 갖고 있었는데 조선 중기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
~1548) 가문의 여종이었다. 권벌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1562~1617)의 시청비(侍廳婢)라고 전하고 있으
니 대략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초엽의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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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 여인들도 언문이라 불렸던 한글 이외에 진서(眞書)라고 불렸던 한자를 배우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다.
비슷한 시기 명문 반가(班家) 출신인 허난설헌이 오빠들에게 학문을 배운 것도 이례적이라고 전해지는 판국에
여종 출신의 설죽이 어떻게 한시를 지을 정도의 학문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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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李滉)이 청암정을 찾아와 남긴 시현판(왼쪽)과 청암 권동보가 쓴 제석천정사 시현판(오른쪽) 이들 현판은 각각 청암정과
석천정사에 있었으나 도난이 염려되어 박물관으로 옮겼다. 상세 내용은 청암정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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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청암정에서 소개했던 靑巖水石(청암수석)....청암정 처마 밑의 이 "전서체의 현판"은 당대 명필로 전서체의 대가인 "眉?(미수) 許穆
(허목)"이 쓴 글씨 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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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巖亭(청암정)현판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쓴 원판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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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청암정에서 소개한 시문과 충재(沖齋) 라는 별채에 걸려있는 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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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딸에게도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데 여종 출신에게 배우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만큼 그녀는 영특했던
것이다.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1571~)의 시문집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말미에 필사된 설죽의 시는 166
수에 달한다. 설죽이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을만큼 뛰어난 학문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시들은 한결
같이 빼어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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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른 봄(早春조춘)’이란 시를 읊어 본다.
春雨梨花白(춘우이화백)봄비 내리자 배꽃이 하얗게 피고
東風柳色黃(동풍류색황)봄바람 불자 버들개지 노랗게 피었네
誰家吹玉笛(수가취옥적)누가 피리를 부는지
搖揚落梅香(요양낙매향)매화향기 흩날리누나
몸종 치고는 고아한 시문이다. ‘이른 봄(早春)’이란 시구다. 피리 소리 따라 매화향기가 흩날린다는 표현은 자연
물과 자신의 심경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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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도 나이를 먹으니 한 남성에게 의탁해야 했다. 여종 출신의 여류 시인은 누구에게 의탁해야 하는가? 설죽
은 양반가의 첩이 되는 길을 택했다. 수촌(水村) 임방(任埅:1640~1724)이 지은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설죽
이 석전(石田) 성로(成輅:1550~1615)에게 몸을 의탁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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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로가 봉화 유곡의 정자에 도착하자 사대부들이 모였다. 이때 설죽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사대부들은 석전 성로
가 죽었을 때 부를 만시(輓詩)를 지어 좌중을 울리면 성로의 시침을 들게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설죽은 즉석에
서 만시를 지었고 좌중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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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은 성로의 호 서호정(西湖亭)을 따서 만시를 지었다.
寂寞西湖鎖草堂 [적막서호쇄초당] 서호정 초당 문은 닫혀서 적막한데
春臺無主碧桃香 [춘대무주벽도향] 주인 잃은 봄 누각에 벽도향만 흐르네
靑山何處埋豪骨 [청산하처매호골] 청산 어느 곳에 호걸의 뼈 묻으셨는지
唯有江流不語長 [유유강류불어장] 오직 강물만 말없이 흘러가네요.
성로는 죽었어도 강물은 무심히 흘러간다는 내용에 인생무상을 느낀 사대부들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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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은 성로를 따라 한양으로 왔다. 설죽은 자신 때문에 성로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고 광해군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은 동학 권필이 귀양가다가 폭음사(暴飮死)한 후 세
상을 등지고 시와 술로 생애를 보냈다. 성석전과 나눈 시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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蠶嶺煙霞主 [잠령연하주] 잠두봉 경치도 으뜸이고
石田詩主人 [석전시주인] 석전의 시도 으뜸이라오
相逢不覺醉 [상봉불각취] 그대를 만나 취하기 전인데
月墮楊花津 [월타양하진] 양하진에 벌써 달이 기우네요.~이란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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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설죽에게 고향과 부모는 어떤 의미였을까?
幾年流落幾沾裳 [기년유락기첨상] 여러 해 떠돌며 치마에 눈물 흘러
鶴髮雙親在故鄕 [학발쌍친재고향] 고향에는 백발된 부모님 계시네
一夜霜風驚雁陳 [일야상풍경안진] 긴 밤 무서리에 기러기떼 놀라 날다가
天涯聲斷不成行 [천애성당불성행] 하늘가에 울음 그치니 가지를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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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인(貧女)이란 시는 일부만 전해지는데 그녀의 사회의식이 드러나 있다.
- 貧 女 [빈 녀] 가난한 여인 / 雪 竹 [설 죽] -
貧女上織機 [빈녀상직기] 가난한 여인이 베틀에 앉아
終日織不多 [종일직불다] 종일 베를 짜지만 많지 않네
飢來手無力 [기래수무력] 배는 고파오고 손에 힘 없는데
何以能擲梭 [하이능척사] 어떻게 북을 놀릴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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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로가 광해군 때의 정치에 분개했다면 설죽은 그를 뛰어넘는 신분제와 가난에 분개한 셈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몸종이자 여류시인 설죽. 이제는 어둠의 세계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
우리는 평소 허난설현. 이매창 , 황진히 등의 이름은 익히 들어 보았으나 설죽(雪竹)이름은 생소 할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녀에 대한 이름도 한번 기억해 두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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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그녀는 주인과 함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양반 사대부들과 시를 교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몸종으
로서 총 168수의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던 가련한 여인이다. 암튼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긴 했지만 그동
안 잘 알려지지 조선의 몸종 시인이자 당당한 여류 시인을 이 충재 박물관을 통해서 한번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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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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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60
(지번)봉화읍 유곡리 934
*청암정 바로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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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