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총총
서하
사랑요양원 복도 양쪽으로 관 같은 방들이 가파르게 늙어가는 중이다
구름 타고 멀리 간 어머니 같은 누런 얼굴들, 묘수 없이 완전무결한 것은 늙음뿐, 이따금 문 쪽으로 아프게 돌아가는 눈빛에 바람만 왔다 간다 공벌레처럼 몸 말아 죽음을 치대는 중인가 저 부드러운 모서리들 진지함에는 후진이 없다
삶의 비루함은 요약되지 않는 것이라지만 그녀는 요양원에서 요약하기로 한다
요약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어서, 요약할 것에게도 무슨 위로가 필요할까 할 말은 해야겠다고 시작한 편지도 할 말 다 못하고 이만 총총이라고 하듯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일도, 제 이름조차도, 냇물 소리에 모서리를 깎는 오후 두 시
저승꽃이 오래 들여다본다
시집『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2020. 시인동네
당신 참 시다, 詩다
서하
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봐 아무 말 못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기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시집『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2020. 시인동네
서하 시인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99년 《시안》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 등이 있다. 제33회 〈대구문학상〉, 제1회 〈이윤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