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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민수기 11장 4-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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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서 손해 보는 싸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내하고 싸워서 이기면 아내가 가정을 생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에 손해입니다. 둘째, 자식하고 싸워 이기면 자식이 곁길로 가던지, 기가 죽기 때문에 손해입니다. 셋째, 언론하고 싸워서 이기면 마력이 있는 활자의 위력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됩니다. 넷째, 국가 권력과 싸우면 국민이 위임해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손해입니다. 물론 언론과 권력의 경우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과 부패, 탄압과 착취, 인권 유린, 종교의 자유를 침해 하는 등의 경우에는 맞서 대항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다섯째, 하늘의 뜻과 싸우면 손해 정도가 아니라 패가망신 합니다. 孟子 글에도 “順天者는 興하고, 逆天者는 亡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늘의 뜻,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절대적 순종이 답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 안에서 나의 존재를 보호하고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 인생을 승리하는 길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기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반면에 꼭 이겨야 하는 싸움 다섯 가지도 있습니다. 질병, 무지, 시련, 가난,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려는데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홀로 고립무원인 상태에 있으면 유혹과 시험을 감당해 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한 의지를 알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승리요소를 우리에게 심어 주셨습니다. 믿음은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사탄이라도 믿음으로 무장한 지체들이 똘똘 뭉쳐서 기도하고 예배 하고 찬송하는 소리가 가득 찬 곳은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치도록 조직 편성을 하는 책입니다.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신앙으로도 하나 되고, 조직으로서도 정비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광야생활 40년 기간 중 38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책 이름은 ‘베미드마르’로 ‘광야에서’ 라는 뜻입니다. 본격적인 광야 생활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수를 조사해서 한 명의 이탈자도 없도록 합니다.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의 수를 조사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침입하는 적들에 대비합니다. 지파별로 인구를 조사해서 장막을 치고 기거할 때 동서남북에 방향을 정하여 주어서 혼선이 없게 합니다. 이동할 때 행군순서를 정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합니다. 구름기둥이 솟아오르면 이동하고, 구름기둥이 장막에 머물면 쉬는 것이 광야생활의 기본 수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구조사와 조직정비를 마친 후, 애굽에서 떠나 온지 둘째 해 2월 20일에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자 시내산을 떠나 광야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동할 때 그리고 쉴 때에 모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10장 35, 36절입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과 동행 하신다는 다짐을 각자의 마음속에 심어주기 위한 심리적 안정책입니다. 둘째는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이 직접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감히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여호와’ 대신에 “주(Lord)"로 호칭 했습니다. 백성들이 행진하는 것은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기 어려운 만군의 주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고 일체 순종하여 죽음을 면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할 때 언제나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선두에 섰습니다. 법궤는 뒤에 따라오는 본진하고 약 900m정도 거리를 두고 앞서 갔습니다. 비 무장 상태인 제사장들은 앞서 가다가 적군의 척후병이나 경무장한 기병들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 되어 있습니다. 호위 병사도 없이 왜 그런 이동방법을 취하게 했을까요? 제사장들은 성물을 다루는 일을 하기에 언제나 큰 책임감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죽음과 관련이 있어도 기필코 감당해 내야 합니다. 법궤 운반이 얼마나 중차대한 직책임을 제사장들 스스로 깨닫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직접 목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법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많은 인원을 인솔하고 통제하는 권위가 됩니다.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줄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이동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법궤가 앞에 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진영의 앞에서 먼저 나아가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앞장서 나아가니 그 말씀만 바라보고 믿고 순종함으로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조직도 정비되었습니다. 말씀도 법궤에 담겨 앞장서 나아갑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길은 순탄하지 못합니다. 계속 되는 불평과 불만으로 힘든 상황들의 연속입니다. 오늘 말씀은 행군을 막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하나님께서도 마냥 들어주시고, 베풀어 주시지만은 않습니다. 직접 매를 드시고 엄한 훈계를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내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보시고, 또 모세가 되어 보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을 헤아리고 주신 은혜를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기간 동안 모세와, 또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이루며 지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1-3절입니다. 백성들은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불평을 터뜨립니다. “악한 말로 여호와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악하다의 히브리어 ‘라아’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 라고 번역된 ‘심히’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요나서의 이 말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것이 요나에게는 악한 것 이었다’입니다. 민수기의 백성들은 단순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을 끄집어내는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제는 불평을 들어주거나 원망을 묵인하지 않습니다. 진노하셔서 진영의 끝을 불사르는 징계를 하십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게 되고 다행히 인명 피해는 나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이름을 불사르다는 뜻의 ‘다베라’라고 명명했습니다. 1-3절의 구조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징계-모세의 중보기도와 진노를 거두심-백성들의 회개와 돌이킴의 순서입니다. 민수기는 이렇게 원망-진노-중보-회개 하는 순서가 반복됩니다. 광야생활이 이러한 순환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신학적으로 ‘신명기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범죄-심판-회개-구원의 반복되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여호수아를 시작으로 가나안 정복시대에 나타나는 신명기사관이 민수기에서도 조금씩 보이며 싹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3절은 민수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될지를 단적인 예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베라’ 사건에서는 인명에 피해를 주지는 않으셨지만, 앞으로 악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대적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불사를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 답게 되돌아서면 원망하고, 잊을 만 하면 불평하고, 틈을 보이면 대적하는 악한 습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진영 끝을 불살라 경고했는데도 백성들은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들 중간에 선 모세, 이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대처법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첫째, 불평과 원망을 그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대처법입니다.
‘다베라’ 사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발단의 근원이 되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있던 ‘다른 인종’들 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백성들의 숫자는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이 그들과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잡족’은 영어 성경에 Many other people로 기록된 다른 민족입니다. ‘수많은’ 이라는 표현을 보듯 소규모 집단의 족속들이 무시할 수 없는 인원으로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잡혀온 애굽의 노예들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해방 되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인종들은 전에는 어떠한 사건에서도 등장했던 적이 없습니다. 특히 민수기 전반부에 나오는 각 지파별 인구조사와 임무 부여 그리고 행군 순서를 정하는 장면에서 이들은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인구조사를 하는데 이들을 고려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쉴 때는 아마도 진영의 중심에서 멀찍이 벗어난 바깥쪽에서 머물렀을 것입니다. 행군할 때도 끄트머리쯤에 위치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들이 현실이라면 이들의 마음에는 무시당하는 소외감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하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른 인종들은 참다못해 급기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라고 번역된 구절을 직역하면 “그들과 함께한 어중이떠중이 들이 다른 음식을 원하기 시작했다”라는 말입니다. 원망했다는 것이 다른 음식을 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라는 말 속에 고질적인 원망병이 재발 했다는 것이고, ‘울기 시작했다’는 실제로 운 행동을 말하기도 하지만 불평의 고조를 높이기 위해 울부짖는 큰 소리를 낸 것을 말합니다. 어떤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연출된 대성통곡을 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해 줄 수 있을까?”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종들이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음식, 즉 고기 먹기를 원하도록 단초를 제공하고 하나님을 원만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인종’들이 고기를 먹게 해달라는 말은 아주 작은 인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문이 퍼뜨려 짐으로서 백성들이 다 들고 일어나 모세에게 찾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급기야는 광야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인 만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불평합니다. 5, 6절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노예로 있을 때 먹던 음식이 지금 하나님이 주신 만나보다 더 좋다고 말합니다. 만나가 없으면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인종들이 아주 작은 원망의 불씨를 던지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급속도로 불평과 불만의 불길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일으킨 ‘다른 인종’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다른 인종’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입니다.
‘다른 인종’ 들은 속성상 이스라엘 백성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입니다. 태생적으로 하나님이 계신지 알지도 못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구원하여 달라고 목매는 현장을 보고도, 저들이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출애굽 이후에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그 기적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애굽을 떠나 온 것에 만족하고, 당장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족했습니다. 과거에 이것저것 먹던 음식과 비교해서 ‘맛나’는 맛이 없기 짝이 없는 음식에 불과했습니다. 언제까지나 감사하면서 만나를 계속 먹겠다는 생각을 가진 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할 수 있으나 동화되기는 어려운 족속들입니다.
신본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본주의에 젖어있는 ‘다른 인종’들은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는 부류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이 공통점일 뿐 모든 생각과 사고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런 인종들과 함께 한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원망하고 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을 것이 분명히 예견된 일입니다.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무력적인 집단행동을 하지 않을 뿐, 혼란과 분열을 일삼는 언동들은 수시로 했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 극히 소수였지만 입만 가지고도 공동체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대합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신의 조각들을 의미합니다. 꺼진 것 같은 잿더미 속에서 다시 발화 할 수 있는 죄의 뿌리들입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치유 하지 못한 채 남겨둔 불행의 기억입니다. 자꾸만 반복되는 나쁜 습관, 욕망에 사로잡힌 습성입니다. 내 마음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열려지지 않은 나만의 어둡고 은밀한 비밀의 공간입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허풍 된 자기과시와 자랑입니다. 결국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려는 헛된 것들의 총집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교 용어 중에 ‘Unreached People’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미전도 종족’ 이라는 뜻입니다. 타문화권의 도움 없이 스스로 복음화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없는 종족 집단을 말하며, 아직 복음의 손길이 닿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인종’들은 현상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미전도 종족’ 과 같은 상태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다른 인종’과 같이 복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 전도 영역이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완전히 개방하고 마음 구석구석을 빛으로 밝혀야 하는데, 믿음을 소유했다고 하면서도 잠그고, 숨기고, 닫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 구석에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그러한 공간을 지니고 있다면, 그곳이 아무리 작은 영역 일지라고 반드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마치 극소수의 ‘다른 인종’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혼란에 빠지게 한 것과 같습니다. 마음속의 그 작은 영역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곳이 바로 틈입니다. 사탄이 공격하기 좋은 어둠의 영역입니다. 내 자신이 방어하지 못하는 약점입니다. 그 영역은 인본주의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복음의 미 전도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자신 만이 알고 있는 미 개방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끄러움도 버리고 다 하나님 앞에 개방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인종’의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탄의 공격에 대응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마시고, 나의 현재에 안주하지도 마시고, 내 마음을 풀 오픈 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승리의 행군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인종’들이 문제를 일으키도록 방치 수준에서 그냥 둔 것이 옳았는가? 입니다.
‘다른 인종’들은 불평의 말들을 입에 담고 살아온 사람들이며 일상적으로 툭툭 던지듯 살아왔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인종’들이 원망 하는 마음, 즉 다른 음식을 먹고 싶다고 선동하는 언동을 자제시킬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응 방법에 있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 부화뇌동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약한 마음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누군가 말하는 것에 솔깃하여 경솔하게 움직이는 심리가 있습니다. 좋아 보입니다.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가만있으면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나약한 인간의 심성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현실을 쫓아갑니다. 군중심리에 쉽게 휩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일부가 아닌 전체의 백성들이 다른 음식 때문에 모세 앞에 나아가 울면서 시위 할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좋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불신앙적인 행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인종’들이 원망의 말들을 하고 다닐 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당연하게, ‘다른 인종’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위험한 일임을 경고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에 적절하게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미 주신 만나에 감사하고 고기나 다른 음식은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께 건의하여 말씀드리면 후히 주실 것이니 기다려 보자라고 달래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말에 이끌리어 나쁜 행동으로 준동합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과 비 신앙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신앙인이요! 크리스천이요!’ 한다고 해서 인정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의 경우처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보고 “저 사람들은 뭔가 특별해, 저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야!” 라는 칭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뜻과 흔들리지 않는다는 특별함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말에도 부화뇌동 하거나, 경거망동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 왔지만, 애굽에서의 노예의 근성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유로이 먹고 마시는 해방감을 망각하고, 주는 대로 먹고 살았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보장 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 보장은 안 되지만 당장 먹고 사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현실을 택하려 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진 달콤함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죄의 사슬에 묶여 종노릇 하는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신앙은 죄의 발목에 잡혀 옛 사람의 구습으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인종’ 들이 던진 작은 말 한마디에 미성숙한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귀를 간지르는 수많은 말들이 오갑니다. 내 자신은 ‘다른 인종’이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을 듣고 무감각 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으로 그 많은 말들을 걸러내고 차단 할 수 있습니까? 성숙한 신앙으로 단련되어서야 분별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하여 ‘다른 인종’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의 부족함을 인정하시고, 날마다 날마다 신앙의 성숙함을 구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인종’의 말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대처법입니다.
다베라에서의 경우처럼 지체하지 않고 진노를 하시며 징계를 하십니다. 33-34절입니다.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엄청나게 많은 메추라기 고기를 주셨지만, 먹어 보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원망자들을 치셨습니다. 10절에,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컸다”고 합니다. 이를 반영 하듯, 인명을 손실 시키면서까지 원망에 대한 강력한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하나님은 훈계를 접으시고 채찍을 드셨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가혹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 그 곳의 지명을 ‘기브롯 핫다아와’, 우리말로 ‘탐욕의 무덤’ 이라고 했습니다. 원망의 마음을 품었던 탐심을 그 곳에 묻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탐욕은 완전히 죽여서 땅에 묻은 것 같이 다시는 꺼내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일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중한 진노의 매를 맞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백성들이라면 더욱 강도가 높습니다.
있는 것, 주신 것, 받은 것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없는 것, 모자란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을 거두어야 합니다. 불평, 불만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남들이 말하고 다니는 원망하는 말에 동조하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여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없는 것에 낙심하는 것이 원망의 시작입니다. 돈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고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불평, 불만의 시작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웰빙 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탐욕입니다.
원망, 불평, 불만, 탐욕은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하게 뽑아내고, 다시는 자라나지 못하도록 묻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탐욕을 부리면 반드시 매를 드실 것입니다. 매를 드시고 혼내 실 때, 그 매가 사랑하신다는 증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탐욕을 죽여서 묻어 버리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단호함을 기억하시고 감사와 자족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행동과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법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징계를 내리셨는데, 혼란의 와중에 모세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과 동조 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의 소리에 크게 상심하였습니다. 자신이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이끌어갈 능력이 있는지 회의에 빠지고, 낙담과 상실감에 주체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만 열심히 하는 일 중독자(work-holic)에게 흔히 찾아오는 번 아웃 증후군(burn out syndrome)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증상은 일에 집중을 하면서 성실히 일해오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신체적, 정서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무기력증과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으로 빠져드는 증상을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지를 낱낱이 고합니다. 11-15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11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읽고 어떤 감정이 드십니까? 모세의 이 고하는 말들은 우리가 많이 접해 본 토설(吐說)이라는 것입니다. 토설이라는 것은 ‘사람이 숨겼던 사실을 비로서 말하여 드러낸다’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있는 그대로, 형식을 갖추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드릴 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격한 감정에 하소연 하듯 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내 뱉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오랫동안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들어온 모세가 격한 감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구할 때 구색을 갖추는 형식이란 없습니다. 아버지와 자녀로서 그냥 대화 하는 것입니다. 감정도 나오는 그대로, 언어도 되는 그대로, 소리도 나는 그대로 하면 됩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입니다. 남을 의식하거나 내 부끄러움 때문이라면 속마음이 감추어집니다. 모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 그리고 지금 까지 겪은 마음고생을 다 쏟아 냅니다. “내가 저들을 낳지 않았는데 내가 왜 짐을 져야 합니까? 내가 책임을 지기 힘드니 차라리 날 죽여주세요”
이렇게 말씀 드렸을 때 하나님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데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약해빠진 소리를 하느냐? 얼른 가서 백성들을 타이르고 네 말을 전하여 따르도록 하라” 평소 같으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고생과 고초를 잘 이해했습니다. 모세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지칠 때도 됐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다 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자신을 드러내면 응답받기가 쉽습니다. 나약하고 부끄럽고 죄송스런 모습 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처지 그대로 토설해야 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고할 때 하나님은 우리 편에 서셔서 위로하시고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는 혼자 지도자의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70명의 장로들을 세워 동역자로 세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하나는 고기를 원하는 백성에게는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 하십니다. 고기를 주시는 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장로들을 세워 일을 분담하게 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고기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모세답지 못한 질문을 합니다. 21-22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모세가 백성들에게 시달려서 자신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내느라 감정이 흐트러져서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던진 질문이라 생각하여도 뜻밖이며 당황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에는 어떠한 변명을 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순종의 대명사인 모세가 했다는 말로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라도 불신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까칠하며 쏘는 듯합니다. 이 말씀을 할 때는 앞서 분위기 좋았던 상황이 급반전 되어 갑자기 경직된 상황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여 최고의 칭찬을 받았다가, 죽음과 부활을 피하시라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대목과 비슷합니다.
모세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 까요? 불신의 죄악은 비록 한 방울이 물에 떨어져도 온 호수를 다 검게 물들입니다. 모세가 누적된 피로 탓도 있었겠지만, 백성들이 울며 부르짖으며 고기를 달라 하는 원망과 불신의 마음이 이스라엘 전 진영을 덮어 버리고, 지도자인 모세에게도 그 끝을 겨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비록 한 끝 차이라고 하여도 순간적으로 불신의 마음이 틈타 있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 앞에 무의식중에 그대로 노출 시킨 것입니다. 모세도 결국 인간이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신이라는 죄악을 끝까지 견뎌낼 여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는 모세에게 곧바로 말씀 하십니다. “내 손이 짧으냐” 어떤 말보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나를 의심하느냐? 내가 한 일들을 잊었느냐? 너의 믿음은 어디갔느냐? 내가 하나님 이라는 것을 알라!”고 매섭게 질문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불신의 경계선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 무릎 꿇었을 것입니다. “내 손이 짧으냐” 이 말씀이 무서운 말씀이지만, 모세에게는 특별히 배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짧지만 강도는 높게, 그러나 더 이상 부가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십니다. 징계 항목 중에 가장 약한 징계가 구두 경고입니다. “네 손이 짧으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는 구두 경고입니다.
모세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대처법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한 말에 대해서도 결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토설한 내용에 대해서는 위로와 대책을 세워 주십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맡고 있는 일의 부담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덜어주시고 가볍게 해주십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토설하든지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모세의 노고를 아시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대면한자 모세는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낸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내 보이는 자를 더욱 더 사랑해 주십니다. 쏟아 놓는 상처들을 위로하시고, 요구하는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좋은 관계를 이루고 동행하는 표본이 바로 모세이며, 모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만나야 될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서라도 어떠한 불신의 마음을 담은 말은 삼가야 합니다. 모세는 지도자이기에, 지금까지의 수고와 충성을 보아서 구두 경고만 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최후의 보루로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가 무너지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세를 끝임 없이 양육하시고 세워 주심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임을 모두가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제, 2, 제3의 모세가 계속 배출되기 원하셨습니다. “네 손이 짧으냐” 이 말씀이 불신의 마음을 품은 우리, 바로 나 자신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거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몸과 마음이 늘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일컬어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 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기 까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광야 생활 중에 그들 중에 섞여있던 ‘다른 인종’들은 말 한마디를 던짐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내 마음 속에 극히 일부분이라도 ‘다른 인종’의 영역이 있다면, 찾아내고, 끊어내야 합니다. 빛 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마음 구석구석을 비추어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 마음 안에 편만하도록 성령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생활 패턴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의 말들은 욕구를 해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이루는데 힘써서 들려오는 원망의 말들을 차단하고 걸러내는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니, 내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는 참되고 진실 됨으로 나가야 합니다. 토설하면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 자주 주님께 토설하면 응답의 기쁨이 함께 합니다. 혹여라고 내 입에서 불신의 말이 나간다면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들리신다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탐욕을 다 죽이고 묻어버려서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시면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지냈던 모세의 복이 우리에게도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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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불만 하는 마음이 있었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직도 주님 앞에 마음을 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다 열게 하시고 그 안에 우리 주님의 사랑을 가득 담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탐욕이 자라는 것을 막아주시고, 주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주님!,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 드립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마음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평안과 화평의 마음으로 채워 주옵소서.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주님의 음성을 가슴에 새깁니다. 불신의 마음이 사라지게 도와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부활의 기쁨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늘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신 모든 것에 감사 드리오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