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에서 온 서울의 첫눈/ welcome winter
첫눈으로
눈사람 될까/ 눈싸움 할까
좋겠네
하면서
나도 눈이 된다.
첫눈이라네. 겨울공화국에서 온 서울의 첫눈이 복권 한 장 사볼까 싶을 정도로 왠지 기대가 된다. 첫눈 오는 날은 임금님께 거짓을 고하여도 용서가 된다는데, 또 얼마나 나에게 설렘을 주려는지, 수줍은 듯이/ 겸손한 듯이 흔들리면서 내려와 번지 없는 광화문 네거리에 모든 죄를 지운다.
아우성도 사라졌다. 나 또한 평화의 시민이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들이 평화협정으로 동등해졌다고나 할까. 대통령님도 임기가 끝나면 평범한 시민이다. 눈이 내리는 세상은 보드랍고 순수하며 청순한 열린 세상이다. 들꽃에서도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첫눈에도 천국은 있을 것이다.
겨울은 얘기하기 꼭 안성맞춤의 계절이다. 연인끼리 혹은 동료나 가족 간에도 가을에 못다 풀어낸 이야기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엄동이 두렵지 않다. 문화가 융성하면 전설도 많다. 따라서 일을 열심히 하였거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살아온 것에 대한 이야깃거리도 풍부하다.
겨울에는 친구가 참 고맙다. 안부를 묻고 소식도 듣는다. 요즘엔 쭈그리고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게임하기/ 동영상보기/ 문자보내기/ 음성 메시지 듣고 말하기 딱 좋은 나 홀로의 비옥한 공간이다. 겨울의 멋이 그뿐이랴. 추우면 추운대로 풀리면 풀린 대로 가을낭만 못지않다. 여름도 부럽지 않다.
하지만, 하늘이 굳어지면 세상도 닫힌다. 대신 하늘이 풀이면 가슴을 저격하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 겨울의 햇살은 부시고 정말 행운이다. 살다보면 우리네 인생에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 안에 봄/ 여름/ 가을 같은 풍경을 그려놓을 수 있는 여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동백꽃처럼 당당하게 잘 살아간다.
오늘 식구들이 다 모여서 김장을 한다. 김장도 하나의 행사다. 시집간 딸들이 와서 거들고 며느리도 분주하다. 사위들이랑 손자/손녀들이 도와준다고는 하나 오히려 방해꾼 노릇만 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은 북새통이 또 있을까. 다듬고 씻고 절이는 바쁜 틈바구니에도 깔깔 웃는 여유가 참 좋다.
김장은 가정마다 담그는 지혜로운 생활방식이다. 저장음식문화의 진실한 역사고 포기마다 정성이 담긴 김치/ 깍두기야말로 반찬의 압권이다. 흰밥에 갓김치 돌돌 얹어서 먹는 맛도 맛이요 한 겨울 동치미 또한 천하일품이다. 우린 이번 김장하기를 통해서 더 단단한 화목의 기회가 됐다면 과장일까.
아이들은 눈발의 풍경이 좋은가 보다. 신기한 듯 영하의 날씨에도 복슬강아지처럼 마당에서 이리저리 발자국을 낸다. 김장이 끝나고 시루떡을 먹으며, 내친김에 아이들과 ‘감 따기’ 과실축제가 시작됐다. 낮은 곳은 손으로 따고 높은 데는 미리 준비한 과실그물망으로 대봉/ 단감/ 월하감 등을 흔들어 수북이 딴다.
감나무마다 외갓집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박재우/희망나무, 박지우/천사나무, 김지원/공주나무, 김보찬/대찬나무, 태중이/미래나무, 등 행복나무, 미소나무 식으로 이름을 써 붙인 터라서 각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따기에 아이들이 신이 나 어쩔 줄 몰라 한다. 정말 보기 드문 풍경이다.
오늘 중1 손자와 효도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주말마다 와 주는 조건이 첫째 항목이다. 고놈이 와주는 것만도 기쁨이라서 3만원 걸었으며, 안 오면 1만원의 불효금을 물도록 했다. 제2항목은 학업성적이다. 반에서 10위권이면 10만원, 5위권이면 50만원 주기로 했다. 대신 제3항은 엄격한 학습태도다. 까불고(1만원), 지각하고(2만원), 욕하거나(3만원) 싸우면 5만원 문다.
물론 불공정한 계약이다. 심봉사의 공양미약속처럼 겁 없이 맺은 공약이라고나 할까. 나는 쾌히 약속했으며, 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를 하게 됐다. 유효기간은 2021년 고놈이 대학입학년도다. 그쯤 내 나이 80 턱밑인데 대학입학등록금과 해외연수까지 장담하고 서명을 했으니 사실 은근히 걱정도 된다.
그러나 계약은 꼭 지켜야 하는 협정이다. 고놈이 단 한 번만이라도 전교학년 3% 안에 들 경우 나는 대학입학등록금을 책임져야한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합격할 때는 해외단기연수 약속도 지켜야 한다. 때문에 올 겨울에도 나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돈을 모아야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립던 터에 친구의 소식이 왔다. 아주 멀리 떠난 줄만 알았던 친구가 고놈의 종량 하나에 고생 좀 했다고 한다. 절망감이 얼마나 컸으면 소식을 끊은 채 병마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을까 싶다. 그것도 모르고 변심의 오해를 했으니 내 잘못을 용서하기 바란다. 순식간 눈이 녹 듯 오해가 사라졌다. 시몬형! 용감하게 삽시다. 씩씩하게 삽시다.
올 겨울은 추울 듯싶다. 털장갑, 털모자를 준비해야겠다. 나이가 들수록 추위가 호랑이만큼이나 무섭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해야지. 유익한 하루였다고... 김장도 하고/ 감도 따고/ 효도계약도 맺었으니 오늘은 참 멋있게 살았다.
아휴
아내가 춥겠다.
오늘이 입동이라네. 해마다 이맘 때 턱부터 떠는 아내
여름에 오지 않던 비가 이제야 뿌린다. 이 늦은 비 그치고 나면 아내는 방에 갇힌다.
택배아저씨 우주만한 노란 호박덩어리 들고 올 겨울은 춥다면서 부리나케 우리 집 왔다 간다. 눈도 많이 올 거라면서 보일러공이 연통을 세워준다. 아들 내외가 감기예방 백신을 꼭 맞으라고 당부한다.
아내는 김장을 서둘 모양이다. 나더러 청승맞게 앉아서 마늘을 까라고 한다. 하지만 죽어도 하기 싫은 게 마늘 까는 일이다. 대신하여 양파/ 생강 껍질 벗기기도 만만치 않다. (졸시:입동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