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忍冬) 잎
김춘수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시집 『타령조·기타』, 1969)
[작품해설]
이 시는 김춘수의 특질로 지적되는 ‘인식의 시’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이다. 끝의 2행을 제외하면, 이 시의 대상이 무엇인지, 시인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이 시는 비유적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한 풍경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인동 잎」으로 제시된 한 폭의 그림에서 우리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나지 않는 짜릿한 감정 이입의 순간을 느끼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인 설명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사슴에 떠오른 어떤 관념을 압축된 풍경 묘살를 통해서 이렇게 ‘보여 줄’뿐이다. 그 관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은 무상(無想)의 관념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쓰인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언어 자체를 절대화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게 본다면, 후반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이 반영된 것으로 일체의 관념과 설명을 배제하겠다는 시인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눈 덮인 초겨울 들판에서 붉은 열매를 쪼아먹는 ‘작은 새’는 인동초의 겨울나기를 가로막는 방해물의 상징이다. 인동초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슬픈 것은, 겨울과 작은 새로 표상된 시련의 외적 상황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인동초의 인고(忍苦)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까닭이다.
[작가소개]
김춘수(金春洙)
1922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중퇴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시화전』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대한민국문학상 및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경북대학교 교수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旗)』(1951), 『인인(隣人)』(1953), 『제1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打令調)·기타』(1969), 『처용(處容)』(1974), 『김춘수시선』(1976), 『남천(南天)』(1948),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 『라틴 점묘』(1988), 『처용단장』(1991), 『돌의 볼에 볼을 대고』(1992),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1993), 『서서 잠자는 숲』(1993), 『김춘수시선집』(1993),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가을 속의 천사』(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