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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항상 길 떠나시던 예수님!
형제들의 소임 이동으로 항상 마음이 무겁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도회법적 기한이 정해져 있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동시켜야 할 상황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발령을 내기 위한 물밑작업을 시작하면, 어느새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우리 신부님 절대로 떠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수사님 1년만 더 있게 해주세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발 빨리 교체해주시라고 졸라대는 게 아니라 떠나서는 안된다고 졸라대니, 참 잘 사셨구나, 하는 마음에 부럽기도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복음 선포 사업의 전초기지라고 볼수 있는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신선한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지상천국을 맛보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그분 옆에서 그분과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자 불안해진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 나섰습니다. 외딴곳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을 찾아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느끼셨던 안쓰러움, 안타까움, 미안한 마음...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시며 하시는 말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시고 항상 길을 떠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크신 분이십니다. 작은 고을, 작은 인연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한 지방, 한 민족, 한 국가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셨습니다.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지만, 우리 역시 스승 예수님을 따라 수시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예! 하고 일어나 정든 곳, 익숙했던 곳을 떠나 낯선 곳,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가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1코린토 3,1-9 루카 4,38-44
하느님께 순종 하지 못하며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한다면?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 사실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
그 부족한 사랑을 내가 만나는 사람, 특히 새로 이룬 가정의 가족들을 통해 채우려 합니다.
특히 부모가 되어 자녀들을 통해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자녀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모기처럼 자기 피를 빨아먹고 있는데
그 모기가 엄마라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이용당한 자녀는 커서도 또 다른 모기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 안의 악한 본성을 명확히 지적해주고
그것과 싸우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녀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본성을 지적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행위가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심리 상담가 박우란씨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이대로 가면 도무지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찾아왔습니다.
항상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충분히 잘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답답하고 불안하고 하루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느 선을 넘어갈 수 없는데 그 선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학생이 그토록 힘들어하는 데는 엄마의 태도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놓는 분위기로 말하지만, 딸은 숨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 안에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엄마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딸은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넌 그걸 하고 싶니? 꼭 하고 싶다면 해. 근데 그걸 진짜 원하기는 하는 거야?”
어느 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정확히 좀 말해줘.”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난 그저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 돼.”
남들이 하는 만큼은 어느 만큼일까요?
명확한 선을 지어주지 않으니 아이는 답답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싶습니다.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그것이 고마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여기까지 큰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에게 명확한 선을 그어주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도 자신 안의 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이 명확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에 시달릴 때, 예수님께서는 ‘열’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을 꾸짖지 않고 열을 꾸짖었습니다.
사람 안에다 선을 긋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명확히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아를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또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사람 안에 있는 악을 명확히 구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구분하셔도 양심의 가책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자신 안에서 그렇게 선을 긋고 사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신과 자아의 명확한 구분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자녀도 그렇게 됩니다.
‘고바라 스즈꼬’라는 사람의 『숨은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즈꼬는 부모로부터 ‘예!’라며 순종하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요즘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순종하는 자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주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주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녀로 키울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선을 긋지 못하면 자녀에게도 그어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기에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자신 안에서 먼저 구분하지 못하면 자녀에게서도 선을 그어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먼저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루카 4,38-44: “은총은 봉사를 위하여”
오늘 복음은 시몬(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 있다가 예수님의 가까이 오심으로 치유되는 장면을 전해 준다. “예수님께서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며, 치유는 단순히 개인의 안녕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사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며, 은총을 받는 이유는 더 큰 봉사를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말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를 이렇게 해석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고쳐지고 나서, 즉시 봉사의 자리로 들어간다. 이는 치유가 곧 사명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 준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V, 57 참조) 교회와 신자는 단순히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 베다 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열병은 우리의 탐욕과 정욕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치유된 영혼은 곧바로 봉사에 나아가야 한다.”(Homiliae Evangelii, I, 17 요약) 우리도 죄의 열병에서 치유되면, 즉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치유의 즉각성을 강조하면서, “그녀가 곧 일어나 시중들었다는 것은 치유가 완전하고 즉각적임을 보여 주며, 또한 은총은 게으름이 아니라 활동으로 이끈다.”(Hom. in Matthaeum, 27 요약)라고 말했다.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병자를 돌보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동시에 자신의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치유 활동에 참여한다.”(1506항)라고 가르친다. 즉, 치유와 봉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도 ‘열병’은 있다. 죄의 열정, 집착, 자기중심적인 삶의 병…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신다. 중요한 것은, 치유의 목적이 나의 편안함이 아니라, 봉사와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건강을 되찾았을 때, 그것은 주님께 봉사하라는 부르심이다. 더 나은 직위나 학식을 얻었을 때,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도구이다. 죄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것은 이웃에게 자비를 나누라는 사명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은총을 입은 즉시 봉사의 삶으로 나아갔듯이, 우리 또한 받은 은혜를 봉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치유는 곧 사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열병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여야겠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즉시, 이웃을 향해 봉사와 사랑으로 응답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하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떤 남자의 평생 꿈이 있었는데, 모터사이클의 명품인 ‘할리 데이비슨’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독특한 배기음 소리, 낮게 깔린 시트고, 넓은 핸들 바 등등 그 어떤 것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너무 비싸서 자기 경제 형편으로는 사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끼고 저축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할리 데이비슨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여자 친구 앞에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이 모습에 여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 오빠 스쿠터 새로 샀구나.”
명품 ‘할리 데이비슨을 스쿠터라고 말할 때, 남자 친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크게 실망하고 서운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았을까요? 가장 귀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지고 이 땅에 직접 오셨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서운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아마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어?’ 싶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선물은 과거에만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얼마나 잘 알고 있나요? 모르기에 감사해하지 않고, 주님의 뜻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때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합니다. 사실 병든 사람, 상처받은 사람은 기도할 힘조차 없습니다. 그때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기도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열이 가신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듭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병을 없애 주시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 공동체와 봉사의 자리도 돌려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편안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고 다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우리가 깊이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멀리서 명령만 해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장모에게는 가까이 가셨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바라보시고, 다가가시고, 만지시며 우리 가까이에 오시는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기 받을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몬의 장모가 보여준 것처럼 다시 사랑하고, 남을 섬길 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인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더 이상 주님께 실망과 서운함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늙어가는 것은 신의 은총이다. 젊게 사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배철현)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9.02.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43)
사랑은 머물지
않고 더 깊이
나누어질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나누어질 때 더욱 살아납니다.
복음은 결코 세상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살리는 온전한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다가가는 것이며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가
기쁜 소식입니다.
간직하는 신앙이 아니라
나누는 신앙입니다.
나눌 때 복음은
더욱 살아납니다.
우리는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서로의 삶에 기쁜 소식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머무름과 떠남이 있기에
우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지 않으십니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자리에도, 이미 이루어
놓은 것에도 머물지 않으십니다.
붙잡는 마음을 놓으면
길이 열립니다.
이렇듯 기쁜 소식은
머무름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떠남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기도하는 그 실천이
바로 복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전주교구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1) 39절에 있는,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처럼 ‘병마’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셨고,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남으로써 병이 고쳐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뒤의 7장에 있는 ‘백인대장의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ㄷ-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ㄴㄷ).”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말씀만 하셔도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셔도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실 때에 거의 항상 ‘말씀’만으로 일으키셨습니다. 그 일들은, 예수님의 권능은 곧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2) 40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고쳐 주실 수 있는데도, 또 모여든 사람들을 한 번에 다 고쳐 주실 수 있는데도, 굳이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개인은 없고 전체만 있는 ‘전체주의’는 예수님 사랑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잘 알고 계시고, 내 사정을 잘 알고 계시고, 나를 걱정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나만’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나의 사랑은, 예수님과 나의 ‘일대일의 사랑’입니다.
3) 43절에 있는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의 ‘몸의 병’을 고쳐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까?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치유도 복음 선포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도 이루어지고 ‘사랑’으로도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함께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던 시기에, 바오로 사도는 ‘말’로 복음 선포와 설교를 하고, 바르나바 사도는 자비를 베풀어주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도 14,12).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설교를 동시에 하셨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미리 체험했습니다. ‘말씀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배우게 되고, 그 나라를 향해서 걸어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하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순전히 그런 목적으로만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병의 치유와 몸의 건강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누구신지 압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 합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기적을 보고 느낄 수 있으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을 아는 사람은 겸손된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모난 원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1코린3,1-9 루카4,38-44
참 좋으신 하느님
“이대로 참 행복한 데”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시편33,12)
9월 순교자 성월 첫날의 선물처럼, 어제의 감동을, 참 행복을 잊지 못합니다.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조광조 평전>을 다시 읽으며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막 즉위한 선조임금이 퇴계 이황 스승에게 정암 조광조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입니다.
“조광조는 훌륭하고 어진 선비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그 독실한 학문과 힘써 실천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를 실천하고 인심을 맑게하며 세상을 요순의 시대로,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자 했는데 불행하게도 소인들의 참소와 이간질로 인해 참혹한 죄를 받았습니다.”<선조실록1576.11.4>
이와 더불어 사약을 받고 38세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임종 유언, 한시도 감동입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愛君如愛父)
나라 근심하기를 내 집처럼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 이땅을 굽어보고 있으니(白日臨下土)
환하게 이 충심 비추어 주리라(昭昭照丹衷)”<중종실록;1519.12.16.>
우리 교회 용어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하는 만고의 애국, 애민의 충신 조광조입니다. 어제 불암산 배경의 배꽃 만발한 그림을 선물했던, 구도자적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친구 화가가 전시회를 한다는 메시지와 더불어 <눈덮인 산맥과 얼어붙은 강>이 너무 깊고 힘이 있어 그림 욕심이 난 순간 떠오른 시가 말끔히 정리해줬습니다. 순교자 성월 찾아온, 고마운 선물 같은 <이대로 참 행복한데>란 시입니다.
“늘 눈앞에 하늘과 산, 나무들 멋진
살아 있는 그림인데
이대로 참 행복한데 새삼 무슨 그림 욕심인가
늘 하늘되어 산되어 나무되어 살고 있는데
산을 보며 배우는 초록빛 믿음, 초록빛 희망, 초록빛 사랑,
초록빛 생명, 초록빛 기쁨인데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초록빛 가득한 주님인데
새삼 무슨 그림 욕심인가
부끄럽지 않은가
짐 만 될 터인데, 이대로 참 행복한데 무엇을 바라나
구름처럼 일어났던 그림 욕심 말끔히 사라지니
푸른 하늘과 산, 나무들만 남았네
푸른빛 가득한 주님만 남았네”<2026.9.1.>
더불어 생각난 똑같은 친구 화가가 선물한 집무실 안 <불암산 배경의 배꽃 만발한 그림>에 감동되어 쓴, 참 많이도 나눴던, 지금도 매일 기상하자 마자 고백하는, <이 행복에 삽니다>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평생
꽃같은 아내 없어도
언제나 나를 반가이 맞이하는
주님의 집, 집무실안 불암산 배경의 배꽃 만발한 그림에
꽃같은 주님 늘 함께 계시니
이 행복에 삽니다”<2026.2.6.>
한마디로 주님 사랑에 매료되어 산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을 만난 분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매료되어 사셨기에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사랑에 열정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매료된, 하느님의 영에 가득 찬 예수님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 주시자 그녀는 즉시 공동체 봉사에 전념합니다. 이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 들린 이들에게서 마귀를 축출하시니 마귀들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을 고백하며 도주합니다. 날이 새자 외딴곳에서 일편단심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의 친교 후 집착하는 제자들을 단호히 뿌리치고 복음 선포의 여정에 오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매료된 예수님의 생애는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는 착한 목자>의 삶으로 요약됩니다.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매료된, 하느님의 지혜로 충만한 바오로는 코린토교회의 신도들중 일부 시기와 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육적인 사람, 속된 사람이라 질타하십니다. 이어 이들의 어리석음을 바로 잡아 회개와 참된 겸손, 사랑과 지혜의 영적 삶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며, 저마다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날마다 강론을 써서 나누는 저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매료되어 살아가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명이 참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에 충만한 삶의 사도인지 배웁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으신 주님을 한결같이 일편단심 섬기는 참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시편33,20).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4,43ㄴ)
'땀의 찬가!'
오늘 복음(루카4,38-44)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병든 장모와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을 떠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찾아가서는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이 땅에 있는 많은 성직자들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예수님처럼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직자들은 그 일을 위해서 어느 한 곳에만 정주해 있지 않고, 때가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계속 그렇게 이동합니다. 그래서 성직자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은 있지만, 기쁘게 보내드립니다.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목자를 예수님의 직무 대리자로 파견된 사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따라 본당 사목자를 바라보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벗어나려 하거나 내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 본당 사목자들은 예수님을 사목의 기준으로 놓고, 예수님처럼 사목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오늘 독서(1코린3,1-9)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분열된 공동체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1코린3,3)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3,6.7ㄴ.9)
내 것을 앞세우고, 내 것을 드러내려고 할 때,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 놓고 삽시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인간이 하느님 피조물의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 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본디 모습(integrity)에 손상을 입히고, 자연 삼림과 습지를 파괴하며, 지구의 물, 흙, 공기,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은 모두 죄가 됩니다."('찬미 받으소서', 8항)
(~ 에제10,22)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