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317) 깨달은 사람의 탄식
"여태까지 공부한다고 지랄법석 했네"
픽사베이
[관념연속성]을 말했더니 그 말에 의지해 자기가 갇혀있던 기억(생각+감정)들의 실체를 정견하고 깨났다며 감사해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비단 이말 뿐만이 아니라 [생명의식]이라든가 [앎], [봄]같은 것도 체험하니 너무 좋다고들 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단지 지금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채 갇혀있던 무지에서 벗어나오게 하는 지팡이(방편)역할을 하니까 좋은 것일 뿐 이 수준에서 한 번 더 나아가려면 이런 말들의 본질은 다만 임시방편으로서 스스로 그 말이 진리 자체인 건 아니란 진실까지를 똑똑히 봐야합니다. 즉 법상(法相)이란 거지요.
우리가 그토록 대단히 여기고 받들어 모시는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도 본질은 중생심에서 벗어나 본성이 회복되게 하려고 하신 방편들인 만큼 자기에게 지금 도움 된다면 응당 따라야하겠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효용을 다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붙들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는 내용물(생각이 만든 환영)입니다.
공부인이 마지막에 견성하고 나서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여태까지 다 내 생각에 속아서 공부한다고 지랄법석했네? 본래 아무 일도 없고 이미 완전한 것을! “이란 깨어남의 탄식입니다.
물론 그런 깨달음을 성취하기위해선 또 중간의 능선고지마다 법상들의 도움은 필요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가족과 주변인들이 주는 상처나 역경계 역시 그 본질은 내 생각, 감정, 느낌으로 된 환영(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마치 진실로 실재하는 진짜인 양 착각 속에 고통받으며 살아온 게 아닙니까?
하지만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면 알다시피 과거 수많은 그 고통과 역경계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것들의 본질은 허깨비 같은 환상이기에 내가 있다고 여겨 붙들면 내게 남아있고 내가 오온개공을 정견하면 즉각 사라지는 안개 같은 허상들이 아닌가요? 삶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객관적 진실이라 여겼던 과거 세상사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바보는 그런 분별망상들을 붙들고 스스로 계속 고통받고 살아가지만 깨어난 사람은 그것들의 허상성을 분명하게 보기에 나날이 점점 더 깨어나서 역경계로부터 카르마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안식과 지혜를 얻는 거지요.
그래서 삶은 통째로 점점 더 밝고 분명해지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오온활동은 내 생명활동(의식분별)이 만든 환영이며 총체적인 망상들이었단 거지요. 따라서 [관념연속성]도 매순간 깨어있는 수준이 되면 더 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는 공부에 관한 허망한 생각(法相)이 되고 맙니다.
모든 경전과 부처님의 말씀조차 다 이렇게 되어버릴 때 가장 마지막에 가서 드러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걸 일체무일물, 필경공, 무여열반, 견성 등 다양한 표현들이 있지만 그 어떤 말도 실제로 깨달아보지 않는 한 법상을 통해 그 진실을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법상)은 결국 생각일 뿐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