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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 빛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불이 되어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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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04 05:37
- 빛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불이 되어라!
오늘 공현 대축일에 동방박사들이 빛이신 주님을 찾아와 뵙기까지
그 배경이랄까 상황은 어두움이고 그러나 하늘에 별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성탄은 하늘에 계시던 주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신 것입니다.
이 성탄 축제 안에 공현 축일은 마리아와 요셉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
어둠 속에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공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로서
이방인들의 성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방인들이란 꼭 지역 곧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나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신자일지라도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빛이신 주님이 안 계셔서 어둠 속에 있는 것이요,
우리가 주님의 빛 안에 있지 않고 주님 밖에 있기에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처음부터 주님 빛 가운데 있지 않고 한때 어둠 속에 있었을 겁니다.
한때는 누구나 다 어둠 속에 있었지만 거기서 갈렸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사람도 있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던 사람도 있고,
자포자기적으로 어둠 속에 안주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동방박사들처럼 빛을 찾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둡기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고 찾았으며
그래서 오늘 복음이 얘기하듯 별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이 온통 어둡다고 불평하지 않고,
나라도 촛불 하나를 들겠다는 마음으로 빛을 찾았고
그래서 그들에게 별이 은총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빛이신 주님을 마침내 뵐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빛을 발견한 사람이 별이 되고 등불이나 촛불이 될 차례입니다.
옛날 제가 야학할 때 많이 부르던 노래 가운데 등불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비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구름 사이로 푸른 빛을 보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등불을
외로운 나의 벗을 삼으니 축복받게 하소서
희망의 빛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게 행운을 내리소서
넓고 외로운 세상에서 길고 어두운 여행길 너와 나누리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 긴긴 밤들을 보람되도록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
내가 처한 상황이 지금은 비록 너무 힘들고 세상은 너무도 악하고 가혹하더라도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여 등불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공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 축일을 제대로 지내는 우리라면
어둠을 그저 불평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 말씀대로 그리고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세상의 별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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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순례 여정
“주님의 별따라 가는 희망의 순례자들”
“정의가 꽃피는 그의 성대에
저 달이 다하도록 평화 넘치리이다.”(시편72,7)
오늘 화답송 위 간절한 시편 성구를 보니, 지난밤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주님의 별>대신 <주님의 달>이 대치된 느낌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둥근달>이란 옛 자작 애송시입니다.
“푸르른 밤 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는 고독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푸르른 고독이!”<2001.2.11.>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 온누리를 환히 밝히는 밤하늘의 <둥근 달>처럼, 낮하늘의 <둥근 해>처럼,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입니다. 옛 중국 마조도일(709-788) 큰 스님이 문병 받았을 때 제자에게 준 말도 생각납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대단한 법력의 말씀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웬지 모르게 새해 첫날같이 설레는 마음입니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오늘 대축일 화답송이 처음 부르는 듯 참 반갑고 흥겹습니다. 오늘 종일 노래로 되뇌이며 끊임없는 기도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 만 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시편72,11)
작년 사용했던 <다산 어른의 하루> 어록이 새롭습니다. 반복의 새로움을 체험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마음이 새로우면 늘 새로운 반복일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다산 어른의 오늘 말씀입니다.
“새벽은 어제의 나와 헤어지게 해주고, 새해는 작년의 나를 허물게 해준다.”
“군자는 새해를 맞으면 반드시 그의 마음과 행실을 새롭게 해야만 한다. 나는 젊었을 때 새해를 맞으면 반드시 일년의 공부 목표를 정했다.”
이런 어른이라면 날마다 새해를 맞이하듯 하루하루의 공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주간지 몇 기사 주요 대목이 마음에 담깁니다.
“쓰레기가 밀려 온다.”
“미국, 12.3 계엄 정말 몰랐을까”
“침묵,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 침묵은 우리를 깊게 만든다. 말을 멈추고 고요 속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은 내면의 앙금을 가라앉히는 여과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나 자신과 나누는 가장 밀도 높은 대화이며,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숭고한 수행이다.”
“2026년에도 이어질 꾸역꾸역 포복하는 삶”
삶에는 도약이나 비약의 첩경은 지름길은 없다는 것이요, 우보천리 삶의 자세가 진리입니다.
“국내 최장수 월간 교양지 <샘터>가 2026년 1월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한다. 디지털의 파고에 창간 56주년을 앞둔 한 종이 매체가 멈추었다!”
아쉽습니다. 아날로그 노년 인생들, 샘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여, 신을 욕하지 마라. 신은 그런 악을 설계하지 않았다.”
대부분 하느님 탓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 탓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2026년 새해를 맞이하여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말씀들이 답을 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너나할 것 없이 인간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인생 순례 여정중 주님의 별을 따라가는 희망의 순례자>라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그 아득한 옛날 하느님을 대변한 거룩한 성인들의 예언이 점차적으로 실현되는 역사가 놀랍습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
이사야의 예언이, 또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나는 계시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니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마태복음의 이방의 <동방박사들의 방문> 일화가 인생 순례 여정에 결정적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존재 깊이에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예루살렘들이요, 주님을 찾는 동방박사 구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한 우리 모두를 향한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이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자, 그러니 다시 용기를 내어 복음의 동방박사들이 되어 일어나 비추면서 인생 순례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갈 바 오늘 복음은 ‘역사(history)’가 아니라 ‘이야기(story)’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사실(fact)’을 다루지만 이야기는 ’의미(meaning)’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을 대할 때마다 반복하는, 12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체험입니다. 인생순례여정을 압축한 산티아고 순례여정이자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을 향한 순례여정입니다. 이들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우리의 평생 인생 순례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의 죽음과 더불어 끝납니다. 제가 묻는 질문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첫째, 우리의 <궁극 목적지>는 무엇입니까?
30여일 해당되는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여정의 목적지가 산티아고 대성전이듯, 동방박사들의 순례여정 최종목적지는 베들레헴이었고,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의 최종목적지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과연 평생 삶의 최종목적지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향해 잘 가고 있습니까? 혹시 목적지 하느님 아버지를 잊고, 잃고 살지는 않는지요?
끊임없이, 한결같이, 항구히, 간절히,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찾아야 할 궁극의 목적지 살아 계신 하느님입니다.
둘째, 우리의 궁극 목적지를 향한 희망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순례 여정중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이정표따라 제대로 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이정표는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주님의 별은 이정표이자 주님의 현존입니다. 그 멀리 동방에서 산전수전 온갖 유혹의 위험들 다 겪고 통과하며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릴 수 있었음은 끝까지 이정표 주님의 별을 잃지 않고 별의 인도따라 걸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별이 있습니까? 누구나에게 자명히 드러나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재인 주님의 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깨어있는, 눈이 열려 있는 가난하고 겸손한 구도자에게만 나타나 보이는 주님의 별입니다. 무지의 탐욕으로 마음의 눈이 먼, 눈 뜬 맹인들은 봐도 보지 못하는 주님의 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늘 깨어 눈이 열려 있는 구도자들이었음을 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주님의 별들 이정표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시 길목마다 있는 이정표들이 아니라 깨어 있어야 보이는 이정표들입니다. 과연 주님의 별같은 이정표들은 무엇이 있겠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두가 주님을 가리키는 주님의 별, 이정표들입니다.
셋째, 우리의 길벗 <도반들>은 누구입니까?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듯이 혼자의 순례여정도 없으며 더불어의 구원, 더불어의 순례여정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혼자라면 그 먼 순례여정 곧 도중에 멈췄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세 동방박사들 이름은 가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평생 도반이 있습니까? 1인 가구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일수록 도반의 필요성은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면서 미사전례에 참여하며 더불어의 도반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열두명 수도형제 도반들과 순례여정중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도 순전히 홀로는 없습니다. 늘 더불어와 홀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순례길이였습니다. 순전히 홀로라면 재앙이요 엄두도 못냈을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도반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월 지나면서 하나 둘...곁을 떠납니다. 결국 홀로입니다. 이를 대 비해 젊고 힘있을 때부터 영원한 도반인 살아 계신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함께 해야 고독사나 고립사가 아닌 언제 어디서나 텅빈 충만의 겸손과 평화, 행복과 기쁨, 감사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선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반 임마누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넷째, 우리가 할 평생 수행인 <기도>는 어떤 상태입니까?
기도가 답입니다. 산티아고 800km 2000리 시종여일 끝까지 날 듯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매일 강론쓰기와 미사, 그리고 성무일도는 물론 걸으면서 끊임없이 바쳤던 묵주기도 은혜였습니다. 걷는 것이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삶의 꼴을 결정하는 기도요, 나중 남는 얼굴은 주님을 닮았는지 아닌지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가장 많이 화살기도로 바쳤던 시편 성구였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끊임없는 목적지를 향한 떠남의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제일 행복했던 시간은 날마다 새벽 떠날 때 였습니다. 떠나는 설렘의 기쁨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이런 떠남의 기쁨을 능가하는 기쁨은 체험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기도의 은혜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가 깨어 있게 하고 목적지를, 이정표를 잃지 않게하고, 도반들과의 관계를, 특히 영원한 도반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깊이해 줍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평생 순례 여정중 주님의 별 이정표 따라 가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자주 순례여정중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 상태를 점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순례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는지, 그 시점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거품이나 환상, 허욕이 걷힌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에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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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왕’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왕’은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h),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의 별”(마태 2,2)
빛으로 오신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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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016년의 일입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둑만큼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의 승리였습니다. 알파고는 4번을 이기고 1번을 졌습니다. 인공지능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00년 전부터 인류는 인공지능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따라올 수 있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공지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따라올 수 있는 계산 능력, 인간의 지성을 배울 수 있는 정보, 그 정보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학습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가능성을 충족할 수 없었기에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공지능 대신에 ‘통신’ 쪽으로 연구했습니다. 광케이블이 깔리고, 그 고속도로 위에 인터넷이 연결되었습니다. 그 인터넷을 통해서 빛의 속도로 정보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통신의 고속도로 위에 정보가 쌓였고,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머신러닝과 딥러닝을 통해 드디어 2022년에 인공지능인 챗지피티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인공지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게 인공지능은 말 잘 듣는 ‘비서’와 같습니다. 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콩글리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맥도 틀리고, 의미 전달도 안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저의 강론을 빠른 시간에 영어로 번역해 주었고, 문맥과 의미도 정확하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없었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번역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달라스 교구에서 보내는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영어로 된 공문을 읽는 것보다 한글로 번역된 공문을 읽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쉬었습니다. 덕분에 교구와 소통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교황님께서 보낸 문서를 요약해 주었습니다. 교황님의 문서는 “Dilexi Te(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를 우선으로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용이 길어서 10페이지로 요약을 부탁했더니 인공지능은 보기 좋게 요약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3시간 관람하고, 식사할 수 있도록 부탁했더니 현대미술관에서 3시간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알려주었고, 근처에 있는 식당도 알려주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인공지능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공지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인공지능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의 존재를 변화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이 정보의 고속도로에서 나를 목적지로 안내하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이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은 또 다른 인공지능으로 대체 될 수 있다면 구세주의 탄생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때까지 인류는 통신의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그 위에 인터넷을 설치하였고,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를 연결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예언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동방박사는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린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주님의 성탄,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 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창과 칼, 권위와 권력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공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성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리고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빛은 정의롭게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공정하게 모든 곳을 비추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영광도 정의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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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안내 묵상: 소금과 빛이 되기 - 쉰세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6년 1월 3일 토요일- 쉰세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 안에서 인도받는 묵상을 실천하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불교 수행자 카이라 주얼 링고가 ‘소금과 빛’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묵상 지도를 제공합니다:
https://youtu.be/fuXtI2Elcwo?t=256
<동영상, 5:55>
A Guided Meditation with Kaira Jewel Lingo — Richard’s Rohr Daily M
핵심 내용 요약 ✨
묵상의 주제: 신앙인으로서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의미를 깊이 성찰.
소금의 상징: 세상을 보존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은총, 공동체에 맛을 더하는 삶.
빛의 상징: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며, 어둠 속에서도 진리와 사랑을 비추는 사명.
명상 방식: 호흡과 마음을 고요히 하며, 일상 속에서 어떻게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내면을 비추도록 안내.
목적: 단순한 명상 체험을 넘어, 신앙적 삶의 실천을 더 깊이 깨닫도록 돕는 영적 초대.
즉, 이 영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 안에서 은총과 사랑을 나누는 삶을 묵상하도록 이끄는 안내 명상입니다.
References
Kaira Jewel Lingo, Being Salt and Light: A Guided Medit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June 11, 2025, YouTube video, 5:5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Zach Lucero,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불꽃이 또 다른 불꽃을 지피듯, 관상적 실천은 고요하면서도 힘 있게 퍼져 나가 마음을 밝혀 세상을 사랑으로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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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리스도인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디로 향하든 우리는 지금도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꿈이나 환상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쉼 없이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의 뜻과 그 부르심의 상징인 별을 보고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우리네 삶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을 율법이나 예언서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별을 보고 온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별은 꼭 하늘에 있는 별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별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마음속에 심어주신,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별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학자인 그들은 진리에 이르고 싶은 소망과 열망을 가졌기에 진리로 인도하는 별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이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뜨면 별은 보이지 않듯, 우리가 따르는 별도 때로는 다른 많은 장애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박사들도 그랬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왕궁에서 살 것이란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지로 인해 착오나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갈망을 놓지 않으면, 다시 별은 보이게 마련입니다. 박사들은 이로써 헤로데에게서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다시 떠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진리인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나는 진리다, 고 말씀하실 분이십니다. 참으로 나약한 이 아기를 유다인의 임금으로 알아보고 경배할 줄 알았던 동방박사들의 안목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반전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대성전이 있고 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있고 헤로데가 사는 화려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2, 6)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작고 초라한 고을로 인식되던 곳이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와 율법 학자 그리고 대사제들은 그들이 안주해 살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화려한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박사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것처럼 목표를 향해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이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욕심과 집착은 별을 보지 못하게도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났던 때는, 물론 별이 나타난 때이며 예수께서 나신 때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별을 보고 표징을 읽고 기회를 포착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마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별은 언제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보일 때 행동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떠난 사람만이 동방박사들처럼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습니다. (마태 2, 11참조) 이처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뵙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나서, 그들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른 길입니다. 꿈에 헤로데한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만난 사람의 길은 만나기 이전과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로데를 만나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아기를 발견한 이후, 그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사들은 그들이 가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지시해 주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은 본래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찾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습니다.
그 옛날, 그 아름다운 밤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보았던 소외되고 미천한 처지의 목동들로부터 오늘 이방인 동방박사들까지 모두에게 개방된 구원의 보편성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페 3, 6) 우리 또한 동방박사들과 함께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헤로데나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 없이도 잘 굴러가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하고 흠집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나 그런 삶은 어둠이며 인간성 상실의 삶입니다. 인간 상실의 표본이 바로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향해 행동한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진리를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교훈은 머물러 주저앉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변화와 떠남의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장이셨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모세의 생애를 묵상하시며 그런 존재를 파스카 인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파스카 인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건너가는 인간을 말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한 체험에서 다음 체험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다. 크고 고통스럽고 참으로 인생을 뒤집어엎는 사건들 속에 끼어서 하나에서 다른 경험으로 옮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또 자기 겨레가 한 실존에서 다른 실존으로 옮아가고 옮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다. 모세는 구원의 역사를 산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 하나의 여정을 걸었고 자기 백성에게도 걷게 한 인물이다.』가끔 신앙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은 변화와 전진前進에 대한 두려움과 깨달은 바를 실행하지 못하는 용기와 열정의 부족입니다. 현재의 기도 생활에, 현재의 신앙생활에,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곳에서 더 이상 진전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인생의 별이 비추고 있음에도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장엄한 주님의 목소리가 울려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신앙은 퇴보하며, 믿음은 편협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같은 눌러앉은 신앙, 움직이지 않으려는 신앙,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에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또다시 준엄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60, 1~2) 우리는 분명 우리 인생을 밝혀줄 은총의 별을 보고 축복의 길을 걷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이 슬픔의 암흑과 고통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를 비추는 별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향해 반사하도록 분발해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도록 마음의 별을 따라나설 준비가 되었는지요? 그 별의 인도를 따라 매일 매일 아기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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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 박사들은 유다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고,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나타난 별빛을 따라 진리를 찾으려는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공현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스스로를 비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출신과 신분, 지식의 수준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공현의 또 다른 의미는 참된 경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이는 왕이신 예수님, 하느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통받으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드린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들의 마음, 곧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린 경배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선물 역시 결국 우리의 마음이며, 주님을 향해 기꺼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결단입니다.
공현은 빛으로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 니입다. 동방 박사들은 헤로데의 어둠을 따르지 않았고, 세상 권력과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별빛을 좇았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방향을 비추는 ‘별’을 주십니다. 그것은 말씀, 성사, 그리고 양심의 작은 속삭임입니다. 그 빛을 따르는 사람이 결국 주님을 만나며,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복음의 마지막 표현처럼 주님을 만난 이에게는 언제나 ‘다른 길’이 열립니다. 옛 방식과 죄의 길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게 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 주님을 만나 새로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비체이며 동시에 성령을 통해 신자들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이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표현 안에서 성모님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고 그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셨듯이….
교회 역시 성령으로 인해 신자들을 잉태하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구성원입니다.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고 세상에 드러나는 교회의 모습이 살아 숨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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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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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한처음에 '의미'가 계셨고, 그 의미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한처음에 '조화'가 계셨습니다…."
원은 숫자 0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념일 뿐입니다. 0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숫자에 없는 0을 보태면 10배가 더해지지요?! 그러니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이 바로 이 0이나 원이고, 이것이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0이나 원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를 규정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바퀴나 동전, 시계판처럼 둥근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원은 0처럼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 원은 끝도 없고,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상징으로 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원은 깨달음을 의미하지만 이 깨달음은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창세기)과 신약 성경(요한 복음 - 새로운 창세기)은 모두 "한처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가 곧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 복음의 서두입니다.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단순히 우리말의 '말씀'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말씀'은 모호한 단어입니다. 문자로 된 말일 수도 있고, 구두로 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어는 더 분명하게 ‘la parole’, 즉 '말해진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야기는 오래된 사전이나 텍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어떤 분에 관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로고스는 단순히 '말씀'만이 아니라, 내적 원리, 의미, 조화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처음에 '의미'가 계셨고, 그 의미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한처음에 '조화'가 계셨습니다…."라고요. 이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익숙한 말과 생각을 넘어 복음이 우리 안으로 더 깊이 스며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바로 회개(meta-noia)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meta는 '초월하다' 혹은 '뛰어넘다'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고, noia는 '생각'이나 '정신', '마음의 상태', '이해'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본래 meta-noia는 일상적인 마음과 사고, 관념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원과도 같은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고, '너'와 '나'의 구분이 없으며,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조화와 화합이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말씀"은 "말씀"이지만 일상적인 우리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깊은 조화와 의미의 깨달음에 이르게 해 주는 "말씀"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방의 현자들(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조화롭게, 화해 안에서 서로를 '나'로 바라보며 삶의 참된 의미를 살아가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 삶의 여정에 도반으로서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가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참으로 지혜로운 어른이십니다.
지금은 성탄 시기를 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떠올리곤 합니다만,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은 이 아기가 참된 어른의 상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에서는 이 이야기를 아주 중대한 진리로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우리가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며 이 동방의 현자들과 함께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인 생명과 사랑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이 바로 이 현자들처럼 주님께 선물을 드리는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듯, 로고스를 '진리'로 번역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거짓, 특히 체계적인 거짓은 원래의 의미를 깨뜨리고, 표지판을 뒤바꿔 모든 이들을 길 잃게 합니다. 그것은 조화를 파괴하고, 인간 사회를 무너뜨리며, 우주를 파편으로 흩어지게 하는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것입니다.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서게 하는 거짓을 퍼트리며 서로를 심판하고 단죄하게 만드는 파괴자가 바로 '사탄'(고발하는 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 고통스러운 세상 속으로 로고스께서 들어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 안에서 조롱당하고 고통받으십니다. 태초부터 살인자들은 그분을 뒤쫓았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성탄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성탄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성탄 휴전에서 병사들이 하루 동안 축구를 함께한 뒤, 다음 날 다시 서로를 죽였던 일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을까요?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곧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서로에게 '행복한 성탄', '평화로운 성탄'을 기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며, 어둠은 그것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 1,5).
이 갈등은 군대의 충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태어난 아기는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 가장 새롭고 가장 어린, 가장 최근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소리나 광고의 요란한 목소리로 선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말씀은 사람이 되셨지만, 아기처럼 말할 수 없는 모습으로 누워 계십니다. 오직 침묵 안에서만 이 ‘침묵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이 로고스를 우리의 존재 안에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새싹이 소란을 피우지 않듯, 말씀도 조용히 우리 가운데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침묵 안에서, 우리 존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며 로고스인 이 아기가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음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기는 매일, 매 순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공현은 2,000년 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명과 사랑 안에서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동방의 현자들처럼 다른 이들 안에서 계속해서 태어나시는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며 하느님께는 물론이고 '나'와 함께 존재 전체를 형성해 주는 모든 존재, 특히 우리 이웃들, 형제자매들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이라는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 삶의 여정에서, 이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내'가 원하는 방향을 가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도 그 반대 방향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향하게 하실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방향이 실패나 하느님의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조화와 화합 감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는 방향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에고는 늘 '나'에게 집중하지만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존재의 원천이신 '말씀'께서는 '우리'와 '전체'를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Jonathan Livingston Seagull)』은 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조나단은 단순히 먹이를 얻기 위해 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아름답게 날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무리의 규범과 충돌합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먹이를 얻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조나단의 자유로운 비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추방합니다.
조나단은 외로움과 실패를 겪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비행의 참된 의미, 즉 자유와 완성, 그리고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른 갈매기들에게도 이 깨달음을 나누며, "삶의 목적은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실현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길로 이끌릴 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조나단이 무리에서 쫓겨났을 때는 좌절처럼 보였지만, 그 길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었지요.
신앙에서도 "내 뜻"이 아닌 "더 큰 뜻" 안에서 방향을 찾을 때, 오히려 삶의 참된 의미와 조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나단의 이야기는 결국 자기 초월과 내적 자유에 관한 비유인데, 신앙의 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뜻밖의 방향"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쪽으로 물 위를 걸어오셔서 베드로더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로 오게 하신 이야기를 예로 들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나서 베드로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거센 풍랑 위를 걸어오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지요?! 삶의 거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이신 당신께로 방향을 잡도록 끊임없이 동반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이 삶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그 모든 것에 존경심을 갖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탄생과 공현의 의미이고 부활의 의미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탄생 안에는 이미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미사 끝에 신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평화로이 가서 주님을 찬양하고 서로 존경하며 삽시다!"라고요...
이것이 바로 매일, 매 순간 우리 서로의 존재 안에서 공현하시는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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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랑의 호르몬, 유대 호르몬, 포옹 호르몬이라 불리는 호르몬이 있습니다. ‘옥시토신’입니다. 이 호르몬은 따뜻한 신체 접촉, 신뢰와 편안한 대화, 기도와 묵상, 그리고 부모가 아이를 안아줄 때 등의 상황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안정과 평화, 신뢰 형성, 관계 강화, 스트레스 완화 등이 이루어집니다.
이 옥시토신을 이야기할 때 함께 말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파민’입니다. 흥분할 때 나오며 짜릿한 기쁨을 줍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약, 도박, 게임 등을 할 때 나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빠른 보상과 자극을 주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시토신은 흥분보다 평화를 주며, 이는 오랫동안 유지되는 따뜻한 행복을 줍니다. 비록 반응은 느리지만 확실한 행복을 줍니다.
빠른 자극, 그러나 빨리 없어지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랫동안 유지되는 따뜻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주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동방 박사들로 대변되는 모든 민족(이방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은 민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뵐 수 있었던 사람 중에서 유다인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제외하고 없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방 박사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목동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던 것은 신분이 높아서도, 또 능력과 재주가 많아서도 아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나는 용기가 있었고, 더불어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황금, 유향, 몰약)을 주님께 내어놓는 봉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동들 역시 자기가 돌봐야 하는 동물들을 뒤로 하고 주님을 찾아갔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요? 헤로데와 수석 사제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지 성경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잃을지 두려워하며 적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헤로데는 무죄한 어린이들을 죽이는 끔찍한 죄악을 펼칩니다.
쉽고 편한 길만 쫓는다면, 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헤로데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커다란 용기와 봉헌의 마음 그리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행복이 주님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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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 하늘에 낯선 별 하나가 밝게 빛을 내며 나타났습니다. 동방의 세 박사는 그 별빛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이르자, 갑자기 별빛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헤로데의 어둠
헤로데의 어둠은 불의와 폭력과 자기중심성의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를 상징합니다.
약탈과 불의를 낳는 어둠
헤로데는 왕권을 얻기 위해 아내와 아들들을 차례로 죽였습니다. 권력에 대한 살벌한 집착은 인간을 깊은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어둠이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의 어둠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의도뿐이었습니다. 거짓은 타인을 친구가 아닌 ‘이용 대상’으로 보게 만드는 어둠입니다.
이기심과 배척의 어둠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베들레헴과 근처 지역의 두 살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파괴하는 이기심, 그것이 인간을 짐승보다 더 잔혹하게 만드는 어둠입니다.
잔혹함과 비인간성의 어둠
베들레헴은 피바다와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서진 생명들, 파괴된 사랑, 이 모든 것은 인간 사회가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어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캄캄한 밤 속으로, 하느님의 아들께서 하늘의 빛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예루살렘의 어둠을 지나자 다시 별이 나타나 박사들을 베들레헴의 구유까지 인도했습니다. 그 별빛은 곧 아기 예수님의 빛, 하느님의 빛이었습니다.
겸손과 비움의 빛
헤로데가 오만과 집착의 어둠으로 가득찼다면, 아기 예수님의 빛은 겸손과 자기 비움의 빛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왕이신 분이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이 겸손의 빛은 세상에 큰 희망을 줍니다.
진리로 인도하는 빛
죄와 거짓은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속여왔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구원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는 빛입니다. 이 빛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모든 이에게 열린 환대의 빛
헤로데는 사람을 배척하고 죽였지만, 예수님은 누구나 품으시는 분입니다. 동방박사, 가난한 목자들, 이제 이방인들도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약속을 공동으로 상속받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빛
헤로데는 죽음의 어둠이지만, 예수님은 살리는 사랑의 빛입니다. 주님의 빛은 인간을 회복시키고 생명을 일으키는 빛입니다.
우리에게 비추는 빛
동방박사는 빛을 보고 새 길로 향했습니다. 어둠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빛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것은 빛을 따라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많은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탐욕과 거짓, 이기심과 배척, 냉혹함과 무관심…
우리 안의 ‘작은 헤로데’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추면 그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 빛에 마음을 열면 우리는 변화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를 비추는 너의 빛이 왔다.” (이사야 60,1)
겸손의 빛을 비추고,
진리의 빛을 비추고,
환대와 용서의 빛을 비추고,
사랑과 자비의 빛을 비추십시오.
그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주님께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 빛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시대에 정의가 꽃피고 평화가 풍성하리라.”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지금 어떤 ‘빛’을 따라 살아 가고 있습니까?
그 빛은 정말 나를 주님께로 이끄는 빛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욕망이 만들어낸 가짜 빛입니까?
2. 내 마음 안에는 여전히 어떤 ‘헤로데의 어둠’이 자리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탐욕, 거짓, 이기심, 배척, 냉혹함, 주님이 비추시려는 어둠은 무엇입니까?
3. 아기 예수님의 ‘겸손과 비움의 빛’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말과 행동, 선택 속에서 나는 주님의 빛을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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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을
하느님께서는 별을 통해 동방에 있는 박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유다인들의 임금님께서 태어나셨음을 알아듣고
그 별을 따라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우리와 같은 모습이기에 친근함이 있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 태어나시면서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태어나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별을 보내주시어
하느님의 소식을 알아듣는 이들이
하느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초대해 주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처음에
유다인들의 임금이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고는
곧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헤로데가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두 번째 별이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박사들은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박사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한 길을 걷습니다.
그것이 좀 어긋난 길이었어도
하느님께서는 또다른 별을 통해 인도해 주십니다.
그들의 모습과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는 헤로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박사들을 통해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았지만
찾아가지 않습니다.
박사들은 그 멀리에서도 왔지만
헤로데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그 가까운 거리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별의 인도를 보아도
그 인도를 받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 주십니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여러 방식, 여러 계기로 나타납니다.
어쩌면 각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이 달라
그 눈높이를 맞춰주시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아듣는 것보다
알아듣고 나서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박사들처럼 우리도 그 초대에 응답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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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1-12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복음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빛이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죄악의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이들은 그분께서 오셨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에 전등을 다 꺼놓고 있으면 방 구석에서 빛나는 아주 희미한 빛조차 너무나 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그 빛이 너무 신경쓰여 잠이 안와서 다른 것으로 가려놓기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왜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건 아마도 빛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깊이 박혀있던 ‘안일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구세주가 오시는 그 때가 지금은 아니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잠들어버려, 한밤 중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지 못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그런 점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하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헤로데가,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유다 땅 베들레헴’이라고 즉시 답하지요. 그들은 예언서에 기록된 바를 바탕으로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태어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등잔 밑이 어두웠던’ 이유는 ‘설마 메시아가 지금 태어나시지는 않겠지’하는 안일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확고한 믿음으로, 간절한 희망으로 발전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동방박사들은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도 구세주께서 태어나셨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첫째, 구세주께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그분의 탄생을 알리는 ‘표징’을 찾았고 그 결과 상서로운 별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둘째,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주저없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두려움으로 미적대다가 때를 놓쳤다면 ‘주님의 별’을 놓쳐버렸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말겠다는 의지로, 그 과정에 어떤 고난이 따르더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으로 즉시 떠났기에 주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허름한 마굿간 한 구석에, 작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실 임금이심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낸 동방박사들은 그분을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누군가를 ‘경배’한다는 것은 그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찬미를 드린다는 뜻이지요. 대제국 페르시아에서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이 아기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그분을 경배한 겁니다. 사제 서품식 때 주님의 제단 앞에 납작 엎드리는 수품 후보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저 ‘일회성’으로 그칠 ‘가식’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준비한 선물로 주님을 생각하는 자기들의 진심을 드러냈지요. 권력자에게 대가를 바라며 바쳤다면 ‘뇌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게 그저 감사해서, 그분의 탄생을 축하드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으로 바쳤기에 ‘예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봉헌이 그래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바치는 작은 성의가 그분께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고이 간직해온 보물상자를 열어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황금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 황금을 예수님께 봉헌한 것은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며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그분께 자신을 봉헌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성전에서 하느님께 거룩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올리는 가장 경건한 예가 바로 향이지요. 그것을 아기 예수님께 바친 것은 그분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 앞에서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몰약은 죽은 이를 염할 때 쓰는 약품입니다. 몰약을 예수님께 봉헌한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앞에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임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그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주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따르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할 ‘황금’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할 ‘유향’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할 ‘몰약’입니다.
경배를 마친 동방박사들은 꿈에서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유다인의 임금이 될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달라’는 헤로데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보다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동방박사들처럼 세상의 뜻과 하느님의 뜻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되지요. 지금 당장은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편한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고 아직 잘 몰라서 불안한 방식을, 더 힘들고 어려워서 불편한 방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스라엘에 갈 때와는 ‘다른 길’로 간 것처럼,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어렵고 힘든 길을 마다않고 가야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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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나는 일어나 빛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다만 빛이 나를 찾아오도록 허락받은 존재일 뿐이다.
어둠이 땅을 덮고, 내 안에도 암흑이 깔릴 때
주님께서는 이미 떠오르신다.
빛은 내가 준비되었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조용히 나 위에 떠오른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나는 길을 계획하지 않았다.
별이 나타났고, 나는 그 별에 끌려 나섰을 뿐이다.
그 별의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사라지지 않는 부르심에 내 몸을 내어주었을 뿐이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단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 지위, 계산을 내려놓고
아기 앞에 엎드릴 수 있는 마음을 내어주었다.
그 경배는 능동의 성취가 아니라
수동의 항복이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내가 쥔 것보다,
내가 지켜온 생각보다,
내가 옳다고 여긴 신념보다
내려놓을 수 있는 여지를 드린다.
주님,
제가 빛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빛 앞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소서.
제가 별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별이 인도하는 대로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헤로데의 길이 아닌,
익숙했던 길이 아닌,
성과와 증명의 길이 아닌
당신이 조용히 바꾸어 주신 길로 돌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믿음은
무언가를 해내는 믿음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린 채 머무는 믿음입니다.
오늘의 경배는
말로 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당신께 내어주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빛이 되려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당신의 빛이 머무를 자리로
가만히 서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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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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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밤을 설친 동방 박사들 / 주님 공현 대축일
밤마다 걸어온 그들은 길을 떠났다.
동방에서 본 그별이 앞서 가다, 아기가 누운 곳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에게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서,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다.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모든 이에게는 구원의 표징은 아니었다.
못된 헤로데에게는 두려움으로,
동방의 박사들에게는 하늘의 지혜를 얻고자하는 기다림으로.
삶에는 대체적으로 이런 두 모습이다.
헤로데는 온갖 수단으로 세상 권력을 탈취해 권좌에 오른 이다.
메시아의 탄생이 위협임을 눈치 챈 그는, 잔꾀를 찾으려 덤볐다.
’유다인들의 임금‘, 이 말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로데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유다인들의 임금은 단 하나 헤로데여야 하였기에.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헤로데에게 그들이 예로부터 기다린 메시아 대망을 짚어 주었다.
‘유다 땅 베들레헴’,
그곳에서 참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는 신앙 고백은 헤로데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박사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먼 길 마다않고 길을 나섰다.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는 그분만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그 믿음으로 별빛을 따라 밤이면 밤마다 걸었다.
그 어둠을 별빛이 인도해 주는 길 따라서.
왕과 박사들은 똑같이 예수님을 찾지만 그 목적은 서로가 달랐다.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사회에 혼란을 초래했다.
그 못된 여우같은 헤로데는 단지 자신의 권력 유지로 찾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진리를 찾아 경배하며 선물을 드리려 하였다.
같은 예수님을 두고 한 쪽에서는 원수, 또 다른 곳에서는 진리의 불빛이 된 셈이다.
이처럼 박사들은 기쁘고 행복해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헤로데는 늘 초조와 불안이다.
이는 예수님 등장이 마냥 기다렸다거나,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만도 아니었다.
사실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는 것은 모진 고생과 위험을 받아들이고
이겨 내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렇게 기약 없이 길 떠남은 가진 것을 죄다 버리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지 가족을 포기했듯이,
먼 길 나섬은 편안함과 개인의 욕심을 버리는 ‘자기 비움’일 게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먼 곳에서 밤마다 별의 인도로만 왔을 게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그분은 시도 때도 없이 다 개입하신다.
그분 떠난 우리는 없다.
우리도 박사들처럼 물러나지 말고, 발걸음을 주님께 돌리자.
그러면 그분께서는 삶의 별빛으로 답을 주시리라.
이렇게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은 이미 예고된 바다.
박사들의 길 나섬이 이를 드러낸다.
그들이 그 귀한 선물을 들고 광야를 지나 베들레헴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구세주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우리 역시 일상의 여정에서도 그분 찾아 믿음을 택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희망으로 큼직한 선물을 움켜쥐고 그분께 경배 드릴까?
오로지 하늘의 별만을 보고 발길 옮긴 박사들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기를 간곡히 청하자.
오직 밤중에만 그 머나먼 길 달려온, 동방의 그 박사들을 꼭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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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4. 주님 공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 로마노 님
다시 돌아가면?
복음(마태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 별은 왜 먼저 헤로데에게 인도 됐을까? “너희 세상 임금은 아니다”를 알리심이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미카5,1)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 아기를 죽이려는 속셈이다. 곧 자신의 임금 자리를 지키려는 음모이다.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황금은 왕께, 유향(기름)은 대사제께, 몰약은 죽은이들에게 필요한 예물이다.
곧 성경은 당신 나라에 오신 평화의 왕이신 아기를(요한1,10-11참조), 그리고 죄로 가로 막혀 있던 하늘을 당신 몸으로 찢고, 다시 연 대사제이신 아기를(마르15,37-38 히브4,14 10,19-20참조), 그리고 당신 나라 백성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실 새 계약의 그리스도, 대속(代贖)의 구원자께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독서(에페3,4-6)
4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비밀)에 관하여 깨달은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동방박사들은 당신들의 죄로 죽으실 자신들의 왕, 대사제, 구원자로는 깨닫지 못했다. 임금인 아기가 왜 마굿간에, 그것도 짐승의 먹이통에 뉘여 지셨는지, 즉 짐승들의 집, 먹이 통에 누우신 그 모습을 보면서 죄인(짐승)들의 양식, 구원자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 자기 고장, 자기 삶으로 돌아갔다. 구원자로 깨달았더라면 따랐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인 영혼의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 육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신앙을 살기에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로움, 명예를 위한 신앙을 산다.
오늘도 성당에 와서 감사의 미사(예배)가 아닌 자신들의 뜻을 위한 제사를 드린 후, 자신의 집, 자신의 뜻을 위한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많다. 곧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따로 삶 따로!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되살아 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
(루가24,12)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요한20,9-10)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 빈 무덤을 통해 자신들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음을, 곧 구원이 이루어 졌음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뜻, 욕망을 이루지 못한 큰 실망으로 자신들의 집,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말씀 안에 구원의 약속을 깨닫지 못해,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신 후, 그들은 박해하는 사람들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진리로 선포한다.
그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보호자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고, 그 성령께서 오늘도 일(사역)하신다.
(에페3,5-6) 5 그 신비(비밀)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은 우리가 말씀 안에 머무를 때 일하신다.(요한8,31-32 1요한5,6)
☨보호자이신 진리의 성령님!
세상이 어둠(암흑)으로 덮였지만 그리스도인들 위에는 주님의 영광(사랑)이 떠오르라(1독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 졌음을 깨닫고 믿어 주님 안에서 그분 영광(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의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동박박사(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
우리도 동방박사들 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주님안 에 머무르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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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59
1월4일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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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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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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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
피정객들이 들어올 때, 제 하루 마지막 일과는 지하 보일러실에 들러 난방 상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올라오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별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산골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 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주님 공현대축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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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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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당에 와서도 불안할까?>
찬미 예수님!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새해 인사를 나눈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분의 마음 기상도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하십니까?
오늘은 조금 엉뚱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인간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했고, 경제학자들은 '소비하는 동물'이라고도 하고, 사회학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인간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경배하는 동물이다." 조금 거창하게 들리시나요? 사실 아주 본능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아니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주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그게 바로 경배입니다.
집에서 강아지 키우시는 분들 계시지요? 강아지가 주인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인이 퇴근해서 들어오면 꼬리가 헬리콥터처럼 돌아갑니다. 기분이 좋으면 바닥에 발라당 누워 배를 훤히 드러냅니다. 개에게 있어서 배는 가장 약한 급소입니다. 그걸 보여준다는 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은 나의 생명줄입니다. 당신이 나를 먹여 살리니, 내 생사여탈권을 당신께 맡깁니다."
이게 바로 동물이 보여주는 경배의 원형입니다. 개는 밥을 주는 주인에게 경배하고, 직장인은 월급을 주는 회사에 경배합니다.
1587년 일본, 천하를 호령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립니다. 당시 다카야마 우콘은 타카츠키 성의 성주이자, 존경받는 다이묘(영주)였습니다. 그에게는 비옥한 영지(황금)가 있었고, 사무라이로서 높은 명예(유향)가 있었으며, 자신과 가문을 지켜줄 강력한 군대와 칼(몰약)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당시 난세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키트'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우콘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신앙을 버리면 더 큰 영지와 관직을 주겠다. 하지만 거부하면 모든 것을 빼앗고 추방하겠다." 주변의 가신들이 울면서 말렸습니다. "주군, 딱 한 번만 눈 딱 감고 믿지 않는 척하십시오. 그래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존 본능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우콘 역시 밤새 고민했습니다. 이 칼을 버리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내 가족은 어떻게 하나...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우콘은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사무라이의 자존심이자 신분 그 자체인 머리의 상투(촌마게)를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던 '두 자루의 칼'을 풀어 히데요시의 사자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나의 영지와 나의 칼, 나의 명예를 모두 반납하겠소." 그렇다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착한 유배지 마닐라에서, 하느님은 그를 어떻게 만나주셨을까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던 것처럼, 우콘에게도 그런 '공현(Epiphany)'이 있었을까요?
1614년 12월, 우콘이 마닐라항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페인 총독이 예포를 쏘며 그를 국빈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제안을 건넸습니다. "당신에게 무적함대와 군사를 주겠소. 일본으로 돌아가 그들을 정벌하고 영지를 되찾으시오."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자, 그가 버리고 온 '생존의 칼'을 다시 쥐여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무력으로 내 구원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인내와 겸손으로 죽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는 총독의 화려한 관저를 마다하고 가장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지 불과 44일 만에 열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임종의 순간, 사람들은 그가 고통스러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에서 객사하는 처지였으니까요.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숨을 거두는 우콘의 얼굴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평온하고 빛이 났다고 합니다. 그가 십자가를 꼭 쥐고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 그는 비로소 본 것입니다. 자신의 영지와 칼을 버린 그 빈자리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거대한 평화이신 분이 꽉 차 계심을 말입니다.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별'은 화려한 일본의 성(城)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초라한 병상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카야마 우콘이 체험한 '주님 공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예물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져온 황금, 유향, 몰약. 우리는 이것을 비싼 선물로만 생각하지만, 고대 여행자에게 이 세 가지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서바이벌 키트'였습니다.
'황금'은 어디서든 통용되는 화폐, 곧 경제적 생존 수단입니다. '유향'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악취를 막는, 명예와 품위 유지의 수단입니다. '몰약'은 상처를 치료하고 시신을 보존하는 비상약, 곧 육체적 생명 보존의 수단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 보따리들을 풀었다는 것은 단순히 선물을 드린 행위가 아닙니다. 다카야마 우콘이 자신의 칼을 풀어놓은 것과 똑같은 항복 선언입니다.
"주님, 이제부터 제 돈(황금), 제 자존심(유향), 제 목숨(몰약)까지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이 없으면 저는 죽습니다." 자신의 생존 수단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경배(Proskuneo)'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쿠오레(Cuore)』에 보면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짧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열세 살 소년 마르코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엄마를 찾아 지구 반바퀴를 도는 목숨 건 여행을 합니다. 주변 어른들이 말립니다. "그 작은 몸으로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마르코는 떠납니다. 왜일까요? 엄마가 없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마르코에게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마침내 낯선 병원에서 죽어가던 엄마를 만났을 때, 마르코가 엄마 품에 안겨 보여준 그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그 안도감, 그 평화. 그 순간 마르코에게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엄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보태려 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앞서 말씀드린 그 '사나운 개'처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사제 지망생이었고 신학생이었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향해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이만큼 했으니 제 인생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그것은 경배가 아니라 거래였습니다. 제 생존이 조금이라도 위협받는다 싶으면 언제든 주님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늘 불안했고, 주님의 참모습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늦은 나이인 스물여섯 살, 신학교에 입학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사다리, 다카야마 우콘이 내려놓았던 그 화려한 칼과 명예들을 다 내려놓고 진짜 '항복'을 선언했을 때였습니다. 마치 강아지가 배를 까뒤집듯이, 제 가장 약한 부분을 주님 앞에 드러냈습니다. "주님, 이제 제 생존은 당신께 달렸습니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뜻대로 하소서." 그때 매일 영하던 성체였는데, 그날따라 주님의 목소리가 제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래, 너는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저에게 내어주신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경배는 곧 '항복'입니다. 항복이 무엇입니까? 전쟁터에서 흰 수건을 들고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적의 총부리 앞에 내 생명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내 손에 든 무기를 버리고 상대의 처분에 나를 맡길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상대의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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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016년의 일입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둑만큼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의 승리였습니다. 알파고는 4번을 이기고 1번을 졌습니다. 인공지능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100년 전부터 인류는 인공지능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성과 지능을 따라올 수 있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공지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을 따라올 수 있는 계산 능력, 인간의 지성을 배울 수 있는 정보, 그 정보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학습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가능성을 충족할 수 없었기에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인공지능 대신에 ‘통신’ 쪽으로 연구했습니다. 광케이블이 깔리고, 그 고속도로 위에 인터넷이 연결되었습니다. 그 인터넷을 통해서 빛의 속도로 정보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통신의 고속도로 위에 정보가 쌓였고,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머신러닝과 딥러닝을 통해 드디어 2022년에 인공지능인 챗지피티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인공지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게 인공지능은 말 잘 듣는 ‘비서’와 같습니다. 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콩글리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맥도 틀리고, 의미 전달도 안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저의 강론을 빠른 시간에 영어로 번역해 주었고, 문맥과 의미도 정확하게 번역해 주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없었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번역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달라스 교구에서 보내는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영어로 된 공문을 읽는 것보다 한글로 번역된 공문을 읽는 것이 훨씬 편하고 쉬었습니다. 덕분에 교구와 소통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은 교황님께서 보낸 문서를 요약해 주었습니다. 교황님의 문서는 “Dilexi Te(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를 우선으로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용이 길어서 10페이지로 요약을 부탁했더니 인공지능은 보기 좋게 요약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3시간 관람하고, 식사할 수 있도록 부탁했더니 현대미술관에서 3시간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알려주었고, 근처에 있는 식당도 알려주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인공지능을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공지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인공지능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의 존재를 변화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이 정보의 고속도로에서 나를 목적지로 안내하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이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라면 구세주의 탄생은 나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은 또 다른 인공지능으로 대체 될 수 있다면 구세주의 탄생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때까지 인류는 통신의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그 위에 인터넷을 설치하였고, 인터넷은 수많은 정보를 연결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예언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동방박사는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린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주님의 성탄,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 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창과 칼, 권위와 권력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공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성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리고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빛은 정의롭게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공정하게 모든 곳을 비추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영광도 정의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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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지난해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젊은이의 희년’ 행사가 열렸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수십만 명의 젊은이가 그곳에 모여, 레오 14세 교황께서 주례하신 밤샘 기도와 미사에 함께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교황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선한 일을 위하여 과감히 투신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우정’이야말로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평화로 나아가는 길임을 강조하시면서, 세상은 정의와 평화의 증인이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하셨습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가 언어와 인종을 넘어,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자 모인 그 광경을 보면서 저는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젊은이들의 모습은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라고 하며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자 먼 길을 걸어온 동방 박사들의 모습과 닮아 보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께 드릴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선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교황께서 말씀하신 ‘우정’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연대하며, 선을 위하여 과감히 용기 낼 수 있는 참된 우정을 예수님께 드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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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1. 공현: 성탄의 완성
주의 공현 대축일은 “두 번째 성탄”이라 불린다.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그 탄생의 의미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유다에서 태어나셨으나, 동방에서 경배받으셨다. 이는 구원이 유다로부터 나지만, 온 세상으로 흘러가야 함을 의미한다.”(Sermo 202, In Epiphania Domini) 따라서 공현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계시이며, “빛이신 그분이 모든 민족에게 비추시는 사건”(이사 60,1-6 참조)이다.
2. 새 예루살렘: 교회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라는 구절은 과거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했지만, 전례 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신 신비를 가리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의 빛이시다. 그분의 빛은 동방과 서방을 가리지 않는다.”(In Matthaeum Homilia 6,3)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교회이며, 교회는 이 빛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 안에서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3. 동방박사들의 신앙 여정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별은 신앙의 내적 빛을 상징한다. 그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며 때로는 그 빛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것은, 믿음의 여정 안에서의 어둠과 침묵의 체험을 상징한다.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그 별은 겉으로는 빛을 비추었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서는 더 깊은 믿음의 불을 밝혔다.”(Homilia in Evangelia 10,6) 이 믿음의 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의 행위이며, 그 여정의 끝에서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으로 보상받는다.
4. 별의 신비: 발람의 예언의 성취
민수기 24,17의 말씀,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는 발람의 예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적 예언의 성취로 읽혔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별은 단지 하늘의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의 마음에 떠올라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신다.”(Commentarium in Matthaeum, II,13) 따라서 별은 계시의 빛이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
5. 헤로데와 예루살렘: 빛을 거부한 자들
헤로데와 대사제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지적 앎은 있으나, 마음의 신앙이 부재한 상태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꼬집는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분을 부정했다. 그들의 지식은 그들에게 구원이 되지 않았다.”(Sermo 199,1) 빛은 모든 이에게 비추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는 이는 겸손한 이들뿐이다.
6. 다른 길로 돌아감: 회심의 표징
박사들이 “다른 길로 돌아갔다.”(마태 2,12) 구절은 단순한 방향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 회심을 상징한다. 성 베다 존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는 더 이상 옛 길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길, 곧 믿음의 길로 나아간다.”(Homilia in Epiphania, 1) 즉,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존재 전체의 전환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7. 우리의 공현 신앙
“빛에서 빛으로”(2코린 3,18) 나아가는 여정은, 우리 안에서 공현의 신비가 계속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단지 외적 복음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서 반사되어 세상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빛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대가 빛나면, 세상은 어둠에서 벗어날 것이다.”(In Matthaeum Homilia 15,6)라고 한다. 공현의 은총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빛으로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그리고 그 빛을 세상 끝까지 비추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며, 그리스도인 존재 이유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내 안에서 “빛의 별”은 얼마나 분명히 빛나고 있는가? 나는 예루살렘의 헤로데처럼 빛을 두려워하며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을 만난 뒤 “다른 길로 돌아가는” 변화가 내 삶에 있는가?
결론
공현은 하느님의 “드러남”이며, 동시에 인간의 “응답”이다. 빛은 이미 비추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그 빛 안으로 들어가느냐이다.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모든 인간의 여정을 상징한다. 그들의 길은 우리의 신앙의 길이며, 그들의 별은 우리 내면의 빛이다. 그 빛은 지금도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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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우리가 있잖아요>
마태오 2,1-12 (동방 박사들의 방문)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그분의 우리가 있잖아요>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착함께서 계시니
착하고 싶은 벗들이
착함 찾아 길을 나서지만
착함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착함 모셔 착한 우리가
착하고 싶은 벗들을
착함께로
고움께서 계시니
곱고 싶은 벗들이
고움 찾아 길을 나서지만
고움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고움 모셔 고운 우리가
곱고 싶은 벗들을
고움께로
맑음께서 계시니
맑고 싶은 벗들이
맑음 찾아 길을 나서지만
맑음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맑음 모셔 맑은 우리가
맑고 싶은 벗들을
맑음께로
밝음께서 계시니
밝고 싶은 벗들이
밝음 찾아 길을 나서지만
밝음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밝음 모셔 밝은 우리가
밝고 싶은 벗들을
밝음께로
따뜻함께서 계시니
따뜻하고 싶은 벗들이
따뜻함 찾아 길을 나서지만
따뜻함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따뜻함 모셔 따뜻한 우리가
따뜻하고 싶은 벗들을
따뜻함께로
깨끗함께서 계시니
깨끗하고 싶은 벗들이
깨끗함 찾아 길을 나서지만
깨끗함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깨끗함 모셔 깨끗한 우리가
깨끗하고 싶은 벗들을
깨끗함께로
부드러움께서 계시니
부드럽고 싶은 벗들이
부드러움 찾아 길을 나서지만
부드러움 계신 곳을 모르니
어찌할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부드러움 모셔 부드러운 우리가
부드럽고 싶은 벗들을
부드러움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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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동방 박사들이 얻어 간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12)
1) 동방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예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과 정성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표현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받아 갔을까? 먼 길을 와서 예수님께 경배함으로써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얻어 간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과 ‘구원의 희망’이라는 것을... 그 기쁨과 희망은 그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들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 경배를 하고, 각자 무엇인가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무엇을 얻어 갑니까? 만일에 물질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에 실망하고, 더 이상 예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힘’과 ‘용기’와 ‘희망’과 ‘기쁨’ 등을 얻어 갈 것입니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은총’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는, 또는 세속의 방식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자비’ 라는 은총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 동방 박사 이야기는,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을 것이고(루카 2,16), 동방 박사들은 두 번째로 찾아간 사람들일 것입니다. ‘목자들’은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방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을 합하면 모든 사람, 즉 인류 전체가 됩니다. <목자들의 이야기에는 ‘구유’가 언급되어 있는데,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에는 ‘구유’가 없고, ‘그 집에 들어가’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에 방을 구해서 옮겨 간 것 같습니다.>
또 동방 박사 이야기는, 당시의 통치자가 ‘메시아 강생’을 공식 확인했음을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탄생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수호천사로 해석됩니다. <성경에서 천사를 ‘별’로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묵시 1,20)>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라는 말은, 천사가 나타나서 박사들에게 지시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으로 직행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도 천사가 지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아 강생’을 선포하여라. 그리고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알아내게 하여라.”
3)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그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하느님을 안 믿었고, 성경을 안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아무도’ 베들레헴에 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안 믿었거나 못 믿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거나, 또는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정말로 갈망하고 기다렸다면, 동방 박사들의 말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베들레헴으로 가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로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 됩니다. <‘기쁜 소식’은 그 소식을 듣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간절함으로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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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드리는 귀한 예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구원자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도 주님을 알고, 참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길 희망한다.
구세주의 탄생은 커다란 기쁨인데 각자의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1. 동방의 박사들은 기뻐서 선물을 바치며 경배하였다.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난 아기에 관한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왜 놀랐을까?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이다. 3. 예루살렘 주민들은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고,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는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는 등 권력의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왔다. 오늘도 세상의 권력다툼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야고1,15). 또한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한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운다.’(야고4,2).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고, 욕심은 지금 행복마저도 거두어 간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으나 지금 그는 없다. 죽었다. 그러니 욕심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다.
이교도인 동방의 박사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끝까지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인가? 별이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니라 믿음이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다.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말한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부름)은 온 인류를 상징한다. 그들이 바친 예물은 인류가 메시아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빛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들은 주님을 경배하러 왔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는가?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란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이다. 우리는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된다.
황금은 왕권을 말한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한다. 희생 봉사다. 유향은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신성을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을 상징한다.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한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불사불멸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다. 거룩함과 성화의 사제직을 상징한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한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다면 우리의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희생 봉사하는 삶으로 황금을,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 성화의 모습으로 몰약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유향을 예물로 바쳐야 한다. 구원에 대한 희망은 어떤 희생과 고난도 감수하게 하는 힘이다.
선물을 드리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 하나는 전교다. 영원한 생명에 확신을 지녔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언해야 한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 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의 방향 전환이 꼭 필요하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끄시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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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대건 베드로 신부님]
<희망의 순례자가 되자!>
새해 첫 주일인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 성년의 희년을 보내는 이 땅의 모든 하느님 백성은 희망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가 되자. 그리하여 “성사 은총 안에서 형제 공동체인교회”와 “복음을 전하며 피조물을 돌보는 교회”의 모습을 온 세상에 전파하자. 이를 위해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는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그분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예루살렘에 찾아온 박사들의 모범을 본받아야겠다.
이로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받은 아기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었으니, 이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가 메시아 왕이요, 세상의 주님이란 뜻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구원과 희망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주님께 각자 준비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또한 지쳤을 때는 뒤에서, 즐거울 때는 앞에서, 위로할 때는 옆에서 함께하시는 주님과 밝고 희망찬 나날을 보내자. 그러려면 자주 기도하면서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비추시는 그분의 별을 발견하고 경배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의 계획들을 모두 주님께 맡겨드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친히 놀라운 섭리로 어떻게 이를 완성하시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말농장이나 캠핑등으로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때만 누릴 수 있는 삶의 여유일 것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여유롭게 지내며 일상의 사소함에 감사하는 생활을 만들어가자. 지나고나면 모든 것이 추억이 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헤로데 임금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동방에서온 박사들처럼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된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 그러니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라는 말씀으로 위안을 삼으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주님께 맡겨드리자.
한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이 바로 “주님 공현” 사건의 핵심이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벗어나 모든 민족에게 펼쳐지게 되었음을 제2독서는 알려준다. 그리고 제1독서는 어둠의 땅에 비추는 빛처럼 떠오르는 주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들이 주님 안에서 구원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곧 기도 안에서 인생의 나침반을 자주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동방의 박사들처럼 주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땅에 엎드릴 줄 아는 겸손을 키우고 지혜도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새해의 계획들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주 별을 보며 점검하는 시간을 만들어가자.
특히 올 한 해 동안 가슴에 품으며 새기고 싶은 성경 말씀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가훈이나 인생의 좌우명처럼 삶을 성찰하고 돌아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바쁠수록 천천히 돌아가라는 말처럼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일 때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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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정광철 마르첼리노 신부님]
<우리는 무엇을 보러 산에 오르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러 산에 오르고 있나요?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2-3)
그 빛은 강렬하지도, 뜨겁지도 않습니다. 너무 밝아 쳐다보지도 못하고 피할 수밖에 없는 그런 강한 빛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을 걷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끝까지 우리 앞에서 가고, 우리 위에서 함께하며, 우리 뒤에서 지켜주는 작은 별빛일 뿐입니다.
이 세대를 뭐라 말할까요.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이 어두운 세상에, 작은 별이 우리 앞에 우리 위에 우리 뒤에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빛나고 있습니다. 그 작은 별이 모든 민족을 곧은 길로 인도합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9-11)
유다인도 아니고 그 어떤 지도자도 아니고 임금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머나먼 동방의 박사들이 그 작은 별빛을 따라 그들보다 먼저 아기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기 예수님-그리스도-메시아-임금님을 위한 세상의 가장 귀한 선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들고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작은 별을 보고 찾아온 이 아름다운 길에 어떤 마음을 지녔는지. 또한, 무엇을 보려고 이 아름다운 산에 오르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보러 모였습니다. 아기 예수님 - 그리스도 - 메시아 - 임금님을 만나러 모였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려, 가장 나약하고 가난해지신 분을 만나보러 모여왔습니다. 우리 사랑을 기꺼이 받으시려고 칼과 창도 방패와 갑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아기 예수님, 당신을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아기 예수님을 얼싸안아드리고 얼러드리려 모여왔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러 온 우리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우리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릅니다. 이 마음이 우리가 드리는 황금과 유황과 몰약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들었을 줄 압니다. …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2.6)
우리는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위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빛인 주님으로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을 따라 우리도 어둠과 죽음의 골짜기를 걷는 누군가에게 태양은 못되더라도 평화의 작은 빛이라도 되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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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대건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그리스도, 우리의 빛>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맞이하는 첫 주님의날, 우리는 동방 박사들을 통해 구세주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내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뻐하며 축제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삶 속에서 그분을 찾아가는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보고 먼 유다 땅까지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유다인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는 구원이 특정 민족이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빛은 누구에게나 다가가며, 우리 모두가 그 빛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박사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종종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느님의 빛은 우 리 삶을 비추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동방 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귀한 선물을 준비하여 예수님께 봉헌했듯이,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는 여정에서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며,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박사들의 여정처럼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이 험하고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신앙과 희망을 붙들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기뻐하며 그분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 우리의 사명을 되새깁시다.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며 자신의 삶을 봉헌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빛을 따라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리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갑시다.
주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그 빛을 세상에 전하며 신앙의 여정을 굳건히 이어가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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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리스도인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디로 향하든 우리는 지금도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꿈이나 환상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쉼 없이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의 뜻과 그 부르심의 상징인 별을 보고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우리네 삶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을 율법이나 예언서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별을 보고 온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별은 꼭 하늘에 있는 별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별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마음속에 심어주신,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별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학자인 그들은 진리에 이르고 싶은 소망과 열망을 가졌기에 진리로 인도하는 별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이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뜨면 별은 보이지 않듯, 우리가 따르는 별도 때로는 다른 많은 장애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박사들도 그랬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왕궁에서 살 것이란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지로 인해 착오나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갈망을 놓지 않으면, 다시 별은 보이게 마련입니다. 박사들은 이로써 헤로데에게서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다시 떠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진리인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나는 진리다, 고 말씀하실 분이십니다. 참으로 나약한 이 아기를 유다인의 임금으로 알아보고 경배할 줄 알았던 동방박사들의 안목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반전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대성전이 있고 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있고 헤로데가 사는 화려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2, 6)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작고 초라한 고을로 인식되던 곳이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와 율법 학자 그리고 대사제들은 그들이 안주해 살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화려한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박사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것처럼 목표를 향해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이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욕심과 집착은 별을 보지 못하게도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났던 때는, 물론 별이 나타난 때이며 예수께서 나신 때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별을 보고 표징을 읽고 기회를 포착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마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별은 언제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보일 때 행동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떠난 사람만이 동방박사들처럼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습니다. (2, 11참조) 이처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뵙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나서, 그들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른 길입니다. 꿈에 헤로데한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만난 사람의 길은 만나기 이전과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로데를 만나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아기를 발견한 이후, 그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사들은 그들이 가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지시해 주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은 본래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찾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습니다.
그 옛날, 그 아름다운 밤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보았던 소외되고 미천한 처지의 목동들로부터 오늘 이방인 동방박사들까지 모두에게 개방된 구원의 보편성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페 3, 6) 우리 또한 동방박사들과 함께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헤로데나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 없이도 잘 굴러가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하고 흠집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나 그런 삶은 어둠이며 인간성 상실의 삶입니다. 인간 상실의 표본이 바로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향해 행동한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진리를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교훈은 머물러 주저앉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변화와 떠남의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장이셨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모세의 생애를 묵상하시며 그런 존재를 파스카 인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파스카 인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건너가는 인간을 말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한 체험에서 다음 체험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다. 크고 고통스럽고 참으로 인생을 뒤집어엎는 사건들 속에 끼어서 하나에서 다른 경험으로 옮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또 자기 겨레가 한 실존에서 다른 실존으로 옮아가고 옮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다. 모세는 구원의 역사를 산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 하나의 여정을 걸었고 자기 백성에게도 걷게 한 인물이다.』가끔 신앙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은 변화와 전진前進에 대한 두려움과 깨달은 바를 실행하지 못하는 용기와 열정의 부족입니다. 현재의 기도 생활에, 현재의 신앙생활에,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곳에서 더 이상 진전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인생의 별이 비추고 있음에도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장엄한 주님의 목소리가 울려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신앙은 퇴보하며, 믿음은 편협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같은 눌러앉은 신앙, 움직이지 않으려는 신앙,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에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또다시 준엄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60, 1~2) 우리는 분명 우리 인생을 밝혀줄 은총의 별을 보고 축복의 길을 걷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이 슬픔의 암흑과 고통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를 비추는 별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향해 반사하도록 분발해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도록 마음의 별을 따라나설 준비가 되었는지요? 그 별의 인도를 따라 매일 매일 아기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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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험한 길과 다리를 건널 필요가 없다 해도>
+찬미예수님
스무살 초반, 군입대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수류탄 투척 훈련을 앞두고 훈련장에서 대기하던 중, 왼손잡이들을 먼저 선별하는 작업이 있었습니다.
제가 군입대하던 시절에만 해도 실수류탄을 훈련 때 사용하였으므로 모든 불안전한 요소를 차단하고자, 같은 손을 사용하는 인원들을 나누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무래도 그룹에 따라 모두 같은 손으로 수류탄을 던져야 조교들이 헷갈리지 않고 안전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왼손잡이였지만 소대장 훈련병이었으므로 다른 대원들을 인솔해야 했고 먼저 나가기도 왠지 귀찮아 그냥 오른손잡이 그룹에 남아있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영화처럼 언덕 위에 위치한 훈련장 저편에서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뒤, 구급차가 급하게 들어오고 헬기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안전을 기했지만 안타깝게도 먼저 올라간 왼손잡이 그룹에서 수류탄 사고가 난 것입니다. 한명의 훈련병, 한명의 조교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왼손잡이 훈련병들이 수류탄 파편에 맞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훈련이 취소되었고 부대에는 침묵만 흘렀습니다. 동료를 잃은 소대장들과 훈련병들은 그저 침묵뿐이었고 부상을 입지 않은 다른 왼손잡이 그룹의 대원들조차 그 사건을 똑똑히 지켜봤으므로 정신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종교활동을 비롯한 모든 외부활동이 차단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왼손잡이였음에도 이 큰 사건을 목격하거나 당하지 않았음에 하느님께 감사했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는데, 그리고 살면서 성체를 걸러본 적이 없는데 성당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큰 답답함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몇주 후에 성당에 다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코로나로 인하여 성당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아마 많은 분들이 당시의 저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는 날들 중에 주님께 의지하며 예수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있으실 것이고 누군가의 기일이나 생일 축일 등을 기억하며 특별히 성체를 영하고 싶은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향한 마음을 저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바라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공현대축일을 맞이해 복음에서 긴 여정을 걸어와 예수님께 준비해온 선물을 봉헌하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별을 보고 메시아의 탄생을 직감하며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까지의 그들의 여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비행기도, 자동차도, 기차도 없는 험한 길과 다리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를 생각해보면 추위를 무릅쓰고 산과 고개, 넓은 벌판을 넘어 어려운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세상이 기다려온 메시아 예수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들의 대척점에는 헤로데 왕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에게 자기도 새로 나신 왕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혹시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로 헤로데는 군인들을 보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부류의 극단적인 믿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갖게 된 첫 번째의 외국인들입니다. 기나긴 여정을 떠나온 만큼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의 값진 선물을 바쳤습니다.
헤로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서워하거나 피곤해 하지도 않았으며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을 믿게 되는 아름다운 신앙으로 재탄생됩니다.
반면 헤로데 왕은 천상의 것이 아닌 지상의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천상의 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상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려워합니다.
즉 그는 세속을 사랑하며 이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날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를 장애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결국 분노와 증오만 남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현재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일이란 물리적으로는 사실 매우 쉬운 일입니다. 긴 여행을 할 필요도 없고 물을 건너거나 언덕을 넘을 필요도 없습니다.
...성당 문만 열린다면 미사를 통해 손 쉽게 예수님의 몸을 영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실천, 정성어린 기도, 마음이 담긴 봉헌을 통해 예수님께 좋은 선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성사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인 비유일뿐 실제로는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당에 나오기까지 우리들은 사소한 귀찮음의 언덕을 넘어야 하고 미움의 강을 겅너야 하며 시기, 질투와 같은 일상적인 장애물들 또한 이겨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달콤한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러한 장애물들을 잘 이겨내고 거룩한 동방박사들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나와야 함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장애물을 잘 이겨내고 한주를 정리하며 예수님께 정성어린 경배를 드릴 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즐거워 하실 것이며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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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왕’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왕’은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h),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 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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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분의 별'(마태 2,2)
빛으로 오신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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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랑의 호르몬, 유대 호르몬, 포옹 호르몬이라 불리는 호르몬이 있습니다. ‘옥시토신’입니다. 이 호르몬은 따뜻한 신체 접촉, 신뢰와 편안한 대화, 기도와 묵상, 그리고 부모가 아이를 안아줄 때 등의 상황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안정과 평화, 신뢰 형성, 관계 강화, 스트레스 완화 등이 이루어집니다.
이 옥시토신을 이야기할 때 함께 말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파민’입니다. 흥분할 때 나오며 짜릿한 기쁨을 줍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마약, 도박, 게임 등을 할 때 나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빠른 보상과 자극을 주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옥시토신은 흥분보다 평화를 주며, 이는 오랫동안 유지되는 따뜻한 행복을 줍니다. 비록 반응은 느리지만 확실한 행복을 줍니다.
빠른 자극, 그러나 빨리 없어지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랫동안 유지되는 따뜻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순간의 만족보다 영원한 만족을 주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동방 박사들로 대변되는 모든 민족(이방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은 민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뵐 수 있었던 사람 중에서 유다인는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제외하고 없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방 박사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목동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던 것은 신분이 높아서도, 또 능력과 재주가 많아서도 아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나는 용기가 있었고, 더불어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황금, 유향, 몰약)을 주님께 내어놓는 봉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동들 역시 자기가 돌봐야 하는 동물들을 뒤로 하고 주님을 찾아갔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요? 헤로데와 수석 사제들은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날지 성경 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잃을지 두려워하며 적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헤로데는 무죄한 어린이들을 죽이는 끔찍한 죄악을 펼칩니다.
쉽고 편한 길만 쫓는다면, 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헤로데의 길을 걸을 뿐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커다란 용기와 봉헌의 마음 그리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행복이 주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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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빛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불이 되어라!>
오늘 공현 대축일에 동방박사들이 빛이신 주님을 찾아와 뵙기까지 그 배경이랄까 상황은 어두움이고 그러나 하늘에 별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성탄은 하늘에 계시던 주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신 것입니다.
이 성탄 축제 안에 공현 축일은 마리아와 요셉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 어둠 속에 있던 이방인들에게도 공적으로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로서 이방인들의 성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방인들이란 꼭 지역 곧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나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일지라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신자일지라도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빛이신 주님이 안 계셔서 어둠 속에 있는 것이요, 우리가 주님의 빛 안에 있지 않고 주님 밖에 있기에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처음부터 주님 빛 가운데 있지 않고 한때 어둠 속에 있었을 겁니다. 한때는 누구나 다 어둠 속에 있었지만 거기서 갈렸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사람도 있고,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던 사람도 있고, 자포자기적으로 어둠 속에 안주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동방박사들처럼 빛을 찾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둡기에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고 찾았으며 그래서 오늘 복음이 얘기하듯 별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이 온통 어둡다고 불평하지 않고, 나라도 촛불 하나를 들겠다는 마음으로 빛을 찾았고 그래서 그들에게 별이 은총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빛이신 주님을 마침내 뵐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빛을 발견한 사람이 별이 되고 등불이나 촛불이 될 차례입니다. 옛날 제가 야학할 때 많이 부르던 노래 가운데 등불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비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구름 사이로 푸른 빛을 보이는 내 하나밖에 없는 등불을 외로운 나의 벗을 삼으니 축복받게 하소서 희망의 빛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게 행운을 내리소서
넓고 외로운 세상에서 길고 어두운 여행길 너와 나누리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 긴긴 밤들을 보람되도록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
내가 처한 상황이 지금은 비록 너무 힘들고 세상은 너무도 악하고 가혹하더라도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여 등불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공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 축일을 제대로 지내는 우리라면 어둠을 그저 불평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 말씀대로 그리고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세상의 별이 되고, 촛불이 되고, 등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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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우리의 경배와 예물, 그리고 별!>
오늘 복음(마태 2,1-12)은 '동방 박사들의 방문'입니다.
오늘은 '또 하나의 성탄'으로 알려져 있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 곧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공적으로 드러난 날'입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인 동방 박사들에게' 당신을 처음으로 드러내십니다. 이는 모두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이방인들의 구원,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인도되어 아기 예수님께 와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의미!
'황금'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시다'는 표지로서, 우리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하느님께 올리는 우리의 향인 '기도'를 상징합니다. '몰약'은 시신의 부패 방지를 위해 쓰였던 것으로서, '예수님의 인성', 곧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우리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선물의 상징인 '믿음과 기도와 희생'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매순간 예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선물'입니다.
별의 인도로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주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주님께로 인도되어야 할 이방인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 냉담자들인 이방인들, 죄 중에 있는 이방인들. 이들이 주님께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됩시다!
'겸손한 믿음'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기도'와 '구체적 사랑 실천인 나의 희생'으로, 주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고, 너를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빛이 되고 복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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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하느님의 뜻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보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조용히
스스로를
드러내는
참된 길을
우리는
만납니다.
참된 진리는
소란 속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 만남은
어둠이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눈이 열려
빛을 알아본
만남입니다.
주님 공현은
숨겨져 있던
하느님의 빛이
세상 앞에
드러나는
사랑의
사건입니다.
빛을 본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느님 계시의
본질과 방향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주님 공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사랑 때문에
스스로 낮아지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가장 작은 아기가
가장 큰 사랑을
품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모든 확신 이후에
행동하겠다는 태도는
결국 아무 길도
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신앙이며
신앙은
또한 갈망이며
누군가를 향해
사는가의 참된
문제입니다.
길을 떠난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앎이 아니라
경배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만난 신앙은
말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길 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없는
열심은 길을
잃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은
경배의 삶으로
옮겨 가는 날이며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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