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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21. 주일 큐티
다니엘서 1:1 ~ 9
뜻을 정한 소년 4명으로 반전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관찰 :
1) 상황 => 남왕국 유다가 망했다
- 1절.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 성경의 기사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의 실재라는 것을 이러한 분명한 시간과 장소와 인물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싸고 함락을 시켰습니다.
- 2절a.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 유다가 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신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신 벨(혹은 므로닥 혹은 마르두크)보다 약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에서 쓰시던 제기들을 보관하시기 위한 사건이었다고 다니엘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를 벗어나서 온 세상으로, 온 제국의 역사속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섭리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 2절b.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 하나님이 넘기신 것들을 가지고 느부갓네살은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가서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습니다. 시날 땅은 바벨탑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전 기명들을 두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결국 이 보물들은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에 의해서 고스란히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건이 됩니다. 유다의 멸망은 도리어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2)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다
- 3절 ~ 4절a.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들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만한 소년을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의 통치 정책이었습니다. 식민지의 우수한 인재들을 끌고 와서 자국의 통치를 맡기는 정책을 활용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이들을 친바벨론 인사로 길러야 하는데 어릴수록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느부갓네살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나가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소년들을 모아다가 바벨론을 위한 일꾼으로 키워내고자 한 것입니다.
- 4절b.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 바벨론의 우수한 문명을 가르치게 함으로 그들이 친바벨론 성향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을 통치하고자 하는 고육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은 앗수르 때와는 달리 상당히 인정을 받았고, 사회 지도계층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피지배민족이었습니다. 억압과 부당함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 5절.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 데려온 소년들에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했습니다. 삼년간 이들을 양육한 후에 이들이 왕 앞에 서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왕에게 바쳐진 음식과 포도주는 바벨론의 주신 벨에게 이미 제물로 드려진 최상급의 음식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직접 먹는 것이었고, 그만큼 바벨론으로 데려온 소년들에 대한 대우는 최고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들에게 벨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인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온 소년들에게 자신들의 신인 벨에게 굴복할 것을 의미하는 행위였습니다.
- 6절 ~ 7절.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 이렇게 바벨론으로 끌려온 소년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있는 소년들 중에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향후 이들의 이름은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바뀌게 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심판자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냐는 ‘여호와의 자비하심’,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이 될 수 있으리요’라는 의미이며,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이름을 소유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부모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할지라도 그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이름은 바벨론식으로 개명이 됩니다. 벨드사살은 ‘벨이 그를 보호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사드락은 ‘달의 신을 경배하는 자’라는 뜻으로, 메삭은 ‘포도주의 신에게 몸을 바친 자’라는 뜻으로,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주신 바르두크의 아들 나부신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일제시대 ‘창씨개명’을 하듯이 이들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네 소년의 바벨론식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다 바벨론의 신들의 이름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환관장이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는 이름을 지어주었건만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인생은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바벨론의 모든 신들을 이기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3) 뜻을 정하는 네 소년들
-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 이러한 상황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뜻이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이들의 결심은 하루에 정한 시간에 정한 횟수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와 왕의 진미를 먹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이를 위해 환관장에게 자신들의 결심을 고했습니다. 사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요구는 매우 되바라진 요구였습니다. 포로로 끌고 온 소년들에 대한 처우는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일임된 일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들에게 문제가 생기고 하자가 생기면 자신의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왕이 맡긴 엘리트로서 바벨론의 신들을 위하여 준비되는 일꾼이 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름을 지어준 환관장에게 그렇게 대놓고 자신들은 바벨론의 신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선전포고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환관장 아스부나스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 열흘간의 테스트 기간을 거쳐서 식물을 먹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빛이 더욱 아름답게 하시고, 더욱 총명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 9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뜻을 정하는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게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지식과 총명을 주시며, 다니엘은 바벨론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나은 총명을 갖게 채워주셨습니다.
가르침 :
1) 유다가 망했습니다.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했고, 사마리아인들이 발생함으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흔들려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파훼되고 유다가 망했다는 것은 언 듯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의 주신 벨에게 패배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유다만의, 이스라엘 민족만의 민족신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유다를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유다의 불순종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힘의 의도가 있었기에 유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2) 다니엘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뀌고도 계속해서 다니엘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에 있는 의미대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로 불리워져야 할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나라가 망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속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개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라가는 인생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향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왕 원년에 이르기까지 총리로 지내게 되는 다니엘의 격동하는 인생의 시작입니다.
4)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의 제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울기만 하고 그친 선지자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최고의 병기 곧 다음세대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잃고 목숨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하는 이들을 세우게 된 것이고, 궁극적으로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 70년 뒤에 포로 귀환이 있을 것을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는 가운데 깨닫고 세 이레의 기도를 통하여 준비하는 역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뿐 아닌 온 제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스케일이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열방에 미치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성취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5) 십대였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뜻을 정한 인생은 결국 그들의 인생을 Finishing well 할 수 있도록 이끈 모토가 되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여러 차례의 위기(느부갓네살의 꿈, 느부갓네살이 세운 탑에 절하게 하는 것, 풀무불에 던짐을 당하는 것, 사자굴에 던짐을 당하는 것, 벨사살의 잔치에서 벽에 손이 나타나 글씨를 새기는 것 등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결심이 되었습니다. 유소년 때에 그러한 뜻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6) 이들 네 소년의 뜻을 세움은 또한 하나님께서 유다를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반전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을 함부로 멸시하지 못하도록 최고 통치리더십에 믿음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배치해 주셨던 것입니다.
적용 :
1) 다니엘이 어려서 십대 때에 뜻을 정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며, 오늘날도 유소년들에게 뜻을 정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일을 도울 수 있었던 예레미야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뜻을 세울 수 있었던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같이 나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뜻을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아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를 더욱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민영이와 찬영이와 병조와 더불어 함께 하나님 앞에 헌신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을 위하여 중보합니다.
2) 유소년들이 뜻을 정하는 인생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유소년 뿐만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뜻을 정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것. 그것을 날마다 쉬지 않고 하는 것. 이것이 내가 붙잡고 있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자,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작정한 바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욱 간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