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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2)
참 아들인가
로마서 8:12-14 / 이규현 목사
최근 고위공직자의 숨겨둔 아들 논란이 있었습니다. 요즘에 이런 일들이 부쩍 많아져서 친자확인 의뢰도 많고, 그런 일을 하는 기관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의뢰한 사람들 가운데 30%는 실제로 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는 의심이 간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친자확인을 합니다.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온 것에 놀라고, 두 번째는 저 인간도 왔나 하고 놀라고, 세 번째는 잘 믿는 것 같았던 그 사람은 왜 보이지 않는가 하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정말 믿느냐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어릴 때는 누구를 닮았는지 잘 모르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반드시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발가락이라도 닮습니다. 친자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이것이 기준입니다. 참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영을 모시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다면 새로운 DNA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닮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려면 내 삶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변화의 속도는 다르지만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변화란 세상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는 주제이고 로마서 전체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분에 걸맞은 성화,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화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육신을 따라 살면 죽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육신을 따라 살려는 죄의 본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현재형인데,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육신의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고 그 육신대로 살려는 유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동시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움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본능의 지배를 받아 충동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기적 욕망이 우리를 주도해나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이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냥 산 것이지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유혹이 오면 오히려 반갑게 맞았고 거부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적당히 다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너무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은밀하게 말하면 아직도 세상에 재미가 있고, 이 재미를 놓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눈을 떴습니다. 죄에 끌려다니고 육신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지 않고 싸우겠다는 태도만 가져도 이미 성화의 단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빛과 어둠의 차이를 알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흥하고 망하는 길을 명확하게 아는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처럼 우리가 더 이상 육신대로 살 수 없는 이유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히 단호합니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나오니까 담담하게 받을지도 모르지만 죽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병에 걸려서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면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굉장히 엄중하고 타협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의 악한 행실을 죽이는 것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누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십시오. 결국 신앙생활은 세상에 익숙한 때들이 점점 벗겨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즐거움이 점점 사라지고 세상의 모습 대신 내 안에 다른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말 신자답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단한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기독교가 활동도 많이 하고 건물도 많이 세우고 좋은 일들을 많이 했지만, 그 일을 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를 닮았구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할 때도 그 활동이나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속에서 그분을 닮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맡을 때 그 일을 통해서 대단한 것을 이루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그 일을 이루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로 세워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빛으로 온전히 드러나 너희의 행실을 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삶으로 세상에 드러낼 때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주제는 “신앙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분이며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거룩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하는 데 자기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죄와 육체의 소욕을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거룩하기 위해, 하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고 다른 차원의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그 해답이 1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우리 힘만으로는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말씀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며 붙들어야 할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죄의 세력 앞에 꼼짝 못 했고,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깨어졌습니다.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는 갈등 속에 살았던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너무도 나약하게 살았던 우리에게 죄의 세력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씀합니다. 지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성령장’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해답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만 하면 모든 죄와 육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명목상의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너 진짜 예수 믿는 것 맞냐고 합니다. 유전자 감식을 해보라는 말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믿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상당히 헌신된 그리스도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도록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내 발로 왔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움직이게 하여 이끄는 힘이 성령인 사람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 할지라도 내 안의 성령께서 강력하게 이끄십니다. 육신은 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게 하셔서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은 그저 슬그머니 당겼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고, 강력하게 당겨서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인도하심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통해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시험해서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인도함을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화의 과정은 대가지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대가지불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힘든 선택을 해야 하고, 육신과 충돌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고 힘든 길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불신자들을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서 쟁취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안 되고 막히고 억울하고 당하고 손해 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형통한 삶이 아닌 것 같을 때가 많지만 이것이 정상일 수 있습니다. 다 되는 것은 세상에 있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예수 안 믿어도 잘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결과, 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에서 승부를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환란이 오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보고, 억울함을 당하고 큰소리 못 치고 쫓겨나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져 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입니다. 성령이 이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모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는 형통의 복음은 물을 탄 복음이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천국 가는 길을 너무나 넓혀 놓았습니다. 거짓된 복음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신앙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내가 참 아들인가?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가? 자기 검증을 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길은 육신의 정욕과 충돌하고 내가 살아온 방식과 충돌하는 길입니다.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힘들게 사는 것 같아도 성령의 이끄심에 내 삶을 맡기면, 나중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크기 때문에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죄의 권세가 그들을 쥐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이 보여도 죄의 권세에 무릎 꿇은 인생은 단번에 날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죄의 권세를 단호하게 끊고 승리할 때,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죄의 권세를 끊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무참하게 무릎 꿇고 노예처럼 끌려가는 것이 무슨 복입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형통이 아닙니다. 내 육신의 충동과 욕심은 끝이 없지만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환희, 승리의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절대적인 선택이지 인도받을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도받지 않으면 육신의 힘이 득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화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제 육신의 힘 앞에 너무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분들 중에 패배주의에 젖어있는 분이 많습니다. 죄 앞에 굴복하는 삶이 반복되면 패배주의가 찾아옵니다. 신자이긴 하지만 죄 안 짓고 살 수 있느냐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끌려다니며 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기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영적 자신감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자신감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속수무책이었지만 이제 달라졌습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충분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꺾고 이기게 하십니다. 성령을 온전히 모시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죄 지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 지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죄 지을 생각이 나면 이미 죄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나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안 지을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면서도 깊숙한 곳에서는 죄를 즐기고 싶어하는 죄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죄의 힘이 그런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완전히 그 죄를 경멸하고 단호하게 끊고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죄에 대한 호감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다른 힘이 들어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성령충만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는 내 모든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다른 인격이 찾아온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의 영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거룩한 생각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죄를 지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다른 것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죄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에 대한 열망이 깊어지고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성령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이사야 6장에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나님에 대해 ‘사랑이다’가 아니고 ‘거룩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거룩이 없으면 사랑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에 대한 열망이 깊어지면, 하나님을 닮는 참된 아들과 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룩을 놓쳤습니다.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성령은 거룩의 영입니다. 그 거룩한 영은 우리 안에 죄의 문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을 때 우리 안에 성령이 탄식하십니다. 신자라도 죄에 대한 즐거움, 그 단맛 때문에 그 유혹을 못 이기고 죄에 빠집니다. 후회하면서도 그 단맛에 빠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는 비결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죄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맛보면 이전 것은 잊어버립니다. 그 죄가 주는 즐거움을 이길 수 있는 즐거움은 더 높은 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뿐입니다. 영적 세계의 즐거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맛본 사람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영을 추구하면 그 황홀함은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은 매일 교회에 나와도 질리지 않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는 괜히 교회에 와보고 싶고, 하루 종일 찬송을 부르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 보니 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 중독’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중독은 마약입니다. 약이 없는 마약중독보다 더 강력한 것은 딱 하나, 하나님에게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 하나님께 미치면 마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은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의 싸움을 일평생 해야 합니다. 전에는 홀로 싸우며 결심도 하고 작정도 해봤지만 죄의 세력이 너무나 커서 안 되었습니다. 육신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그냥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황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본래 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성령이 이미 내 안에 오셔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그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충만을 구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세상 속에 살면서 치열하게 죄와 싸우며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구합니다. 치열하게 싸우지만 성령의 인도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드라마나 보고 놀러 다니면서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은혜 받을 기회가 있으면 열심히 찾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에 힘쓰고 은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의 인도를 받고자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우리를 이끄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시다. 이제는 이름만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 말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신앙생활을 해 온 만큼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드러나는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못한다고 해도 내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과 인격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가 될 때 세상이 놀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존귀한 일이고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영광스런 신분, 자녀 – 상속자
윤영택 목사
지난 주일에 ‘영광스런 신분,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며 나는 부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고민해보자고 했었습니다. 한 주간 고민 좀 해보셨는지요. 그 고민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한걸음 더 성숙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성장되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말씀 듣고 문 밖으로 나가면서 자동으로 다 삭제하고 성도다운 삶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묵상도 없이 한 주간을 바쁘게 지내다가 주일이 되어 습관적으로 이 자리에 와있는 분은 없는지요.
고속비행을 하는 전투기가 고공 선회 훈련 중에 추락하였다는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제트기를 조종하던 파일럿이 고속 비행 중에 업치락 뒤치락 방향을 바꾸며 날다가 하늘로 급상승한다는 것이 순간 착각으로 땅을 향해 급강하하여 곤두박질 치고 만 것입니다. 너무도 빠른 속도 때문에 주변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각을 의지하여 순간 판단으로 조종간을 당겼는데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돌진한 것이지요.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도 가끔 내 인생의 비행 중에 이런 혼란과 착각으로 급상승이 아니라 급강하하여 그만 땅에 곤두박질하는 경험을 합니다. 인생 길에 잘 못 방향을 잡았는데 내 스스로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급가속을 하다가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길되신 주님 대신 나의 판단을 의지하고 세상의 넓은 길을 향해 돌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기판으로 삼고 내 길의 방향을 점검하며 살아야 하는 조종사가 계기판을 무시한 채 자신의 경험과 관록과 감각을 의존하고 냅다 달리려고 합니다. 세상이 주는 안전함과 안락과 행복에 익숙해져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인지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인지 구분을 못하고 정신 없이 빠져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절, 14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가? 나의 비행이 정치 비행인가 거꾸로 곤두박질하는 전복 비행인가 방향을 분명히 하며 살기 바랍니다. 항로를 벗어난 비행사를 향해 관제탑으로부터 경고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경고음을 즉시 알아듣고 항로를 변경하면 살지만, 경고를 못듣거나 무시하고 계속 내 방식으로 가면 머지 않아 위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성도로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잘 하고 있다고 자신만만하다면 정말 잘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비행 항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말씀의 연속이 됩니다.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성도’라는 신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영광스런 이름이라면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영광스런 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내 아들 내딸’ (사43:6) 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사63:16, 64:8) 라 불렀습니다.
신약에 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롬10:13) 하였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특권을 주셨다’(요 1:12)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말씀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4)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즉 관제탑에서 우리의 비행 항로를 살피시며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를 아들과 딸이라 부르시고 오직 자녀들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또한 선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신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아버지라 부르셨던 그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실 때 독특하게 사용하신 호칭은 ‘아바 아버지’였습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빠’라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사랑하는 아버지, 믿음직스런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친근한 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은 ‘아빠’셨습니다. 이런 친근한 관계를 우리에게도 허용하시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으니 오직 자녀된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늘에 계신다 함은 세상을 초월해 계시는 능력있는 아버지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하늘 아버지는 인간 세상에 제한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세상 사람들의 복잡한 형편을 알고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초월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저 멀리 우주 밖에만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아빠이십니다. 나의 소원과 염려를 이미 알고 계시며 나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자상한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아버지께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또는 찬송부를 때 아무런 어색함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 이것이 자녀된 사람의 특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하십니다. 후사는 대를 잇는 아들 곧 아버지의 유산을 받는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아버지의 유업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심판하실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녀들을 향해 주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입니다. 예수께서 그 영광스런 나라의 보좌에 앉아 만국을 다스리실 때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광을 나누는 엄청난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상속자는 그리스도의 영광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늘 보좌를 사양하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아들이셨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구원의 능력도 없고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는 그대로 우리에게 머물러 있고 우리는 그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영광의 그 나라로 들어갈 길을 열어주셨고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상속받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니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앞에 있는 고난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참고 견딜 수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고 그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보호하여 넉넉히 이기게 하시니 이 또한 자녀된 사람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죽어서 가는 천국, 죽은 다음에야 상속받는 천국만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풍성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특권입니다.
또 하나 자녀가 가지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자비와 긍휼로 용서하시고 아들은 어떤 죄도 아버지께 고백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자녀 입장에서는 엄한 아버지가 두려워 잘못을 고백하기 어려워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어떤 실수와 실패, 심지어 온 세상이 비웃고 경멸하는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고백하는 자식을 끝내 용서하지 않고 매몰차게 내치는 비정한 부모가 간혹 있지만 하늘 아버지께서는 돌아오는 자녀를 무정하게 내쫒지 않으시고 항상 품에 안으십니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비유로 설명하신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아들 이야기처럼,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녀를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아버지와 형의 간섭 없이 마음껏 살고 싶었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갔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외국으로 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작은 아들은 돈이 충분하면 인생이 즐거우리라는 신념이 있습니다. 돈이 넉넉히 있을 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친구도 따르고 여자도 따르며 주변에는 항상 흥청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이 아들은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별이 안되는 전복 비행을 하면서도 자기 만족과 착각 속에 조종간을 쥐고 있는 파일럿과 같습니다.
결국 돈 떨어지고 그 땅에 흉년까지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돼지 기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돼지와 몸 싸움하며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에 울리는 경고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얼마나 잘못을 하였는가 깨달았고 드디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동안 전복 비행을 하며 급추락하던 방향을 바꾸어 정치 비행으로 돌아섰으며 거기서부터 급상승 기어를 당기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로 날마다 문 열어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저 멀리서부터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흉한 꼴로 돌아온 더럽고 냄새나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품에 안고 그 얼굴에 입맞추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베풀 수 있는 사랑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누리는 자비와 용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엄하게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엄한 아버지 모습을 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느니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누구나 잘못하면 징계를 받는 것이니 만일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는데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는 더욱 복종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자기 뜻대로 징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심으로 그의 거룩에 동참하게 하시느니라. 징계를 받는 그 순간은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프지만 그 징계를 통해 연단을 받은 사람은 나중에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것이니라’ (히12:5-11)
제가 중학교 2학년 쯤일 때 아버지께 제 어린 인생 최고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호되게 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제가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돈을 쓸쩍하여 하루 종일 바람을 쐬고 저녁 예배가 시작될 즈음에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철 없는 어린 마음에 나홀로 기차여행을 하고 싶어 아버지 허락도 안 받고 내 맘대로 아버지 돈 가져다가 하루 종일 기차 타고 전에 살던 도시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 타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한테 속된 말로 뒤지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아버지 호주머니를 쓸쩍한 것도 잘못이고 주일날 그런 못된 생각,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녔으니 매를 맞아도 싼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저에게 대단히 화가 나셔서 혼 좀 나봐라 하셨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매로 다스리는 광경을 보고 아들 잡겠다 싶어 ‘애 죽겠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말리셔서 겨우 상황이 끝이 났습니다. 매를 맞는 순간 얼마나 아프고 부끄러운지 아버지 바지가랑이 붙잡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하겠으니 용서해달라고 매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문의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아버지의 호통을 듣고 저도 이후로 다시는 아버지께 매 맞을 짓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날 아버지의 매가 저에게는 마지막 매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아버지가 무섭고 어려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지금 연세 드신 아버지를 뵈면 그렇게 엄하시던 모습보다는 잔잔한 정이 더 앞서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바르게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채찍이었기에 그 순간은 서로 힘들었지만 그 징계로 인해 아들이 살게 되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쳐오고 끝 없는 고난 속에 살도록 하시는가? 이게 무슨 하나님 자녀의 삶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은 장차 받을 영광을 위하여 꼭 통과해야만 하는 연단의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주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길이 참고 기다리면 우리의 성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나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징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는 수 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버지 유산 챙겨들고 집을 나간 아들처럼 아버지 간섭이 귀찮고 아버지 그늘이 싫어 멀리멀리 떨어져 내 맘대로 살다가 내 잘못으로 받는 시련이니 속히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오래 버텨봐야 매만 더 벌고 더 오래 고생할 뿐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하나님 등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난 몇 년간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막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여전히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하고 자만합니다. 착각도 고단수인데 고집 또한 노새처럼 세고 절대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아 사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 안 짓고 선하게 살면 되지 꼭 예수 믿고 교회 다녀야 하나?’ ‘주일성수? 하나님께 대한 내 마음이 중요하지 꼭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형식이 중요한가?’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주께드려 헌신하라? 그런 것은 사람을 교회에 묶어두려는 가르침이지 기독교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야’ 하면서 나름 고집스런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몰라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 그 귀한 사랑을 깨달았던 적이 있고 그 사랑 안에 살았지만 잠시 아버지 품을 떠나 내 맘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문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어도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라면 자녀된 도리를 다 함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가 참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마치며 복음송 ‘너는 내 아들이라’ 를 함께 불러봅시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 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지금 힘들고 지친 분들 있지요? 시간이 여기서 그만 딱 멈추었으면 하는 분들도 있지요? 기다리시는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제가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날마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립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생활
강문호 목사
조 용기 목사님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조 용기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내와 수 십년을 같이 살지만 내 아내의 성격보다 성령님의 성격을 더 잘 알아" 나는 이 말씀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과연 큰 목사님은 다르구나. 나는 성령님 성격보다 내 아내의 성격을 더 잘 아는 데.." "이렇게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가니까 큰 일을 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들의 마음을 주소로 살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개가 사는 집이 개 집입니다. 대통령이 사는 집이 청와대입니다. 토끼가 사는 집이 토끼장입니다. 성령님이 사시는 집이 성전입니다. 우리 몸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안에 김 순덕이 거하고 계십니까? 내 안에는 김 순덕이 가득 차 있습니다. 김 순덕은 돌아 가신 우리 어머니입니다. 6.25 때 나를 업고 피난 나오시다가 헛간에서 주무시면서 사타구니에 끼고 주무신 우리 어머니, 나는 그 어머니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제일 좋아 하시던 음식이 잡채였습니다. 잔치 집에 다녀 오실 때면 나는 으래 어머니가 좋아 하시던 잡채를 조금 싸 달라고 하여 갖다가 어머니를 드리 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500원짜라 동전이 처음 나오던 때에 버선속에 500 원 짜리 동전을 신기한 듯 차곡차곡 모아 두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지금도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도 내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어머니를 만나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갈보리 선교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에 먼저 가신 이들을 한 분 한 분 만나 볼 것입니다.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 김 순덕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데 여러 분 안에는 김 순덕이 좁쌀만큼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이들 속에는 성령님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십니다. 1. 증거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김 순덕이 거한다는 사실은 내가 김 순덕이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 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4-17)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안에 거하시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아이들 속에서 자기 자녀를 찾을 때 결코 망설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 천명 자녀가 있어도 자기 자녀는 금방 알아 봅니다. 한참 뜯어 보고 나서 <내 아들이구나!> 결론을 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내 아들인지 아닌 지 긴가 민가 한데...>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자기는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실히 압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인도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면서 하시는 두 번째 일은 인도하심입니다. 바울은 이미 봉독한 성경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17)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어디론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나는 어째서 성막을 연구하게 되었는 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확실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 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울 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아시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 하게 막았습니다. 브루기아로 갔습니다. 역시 성령님이 막으셨습니다. 갈라디아로 갔습니다. 무시아로 갔습니다. 비두니아로 갔습니다.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7) 모두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기도하는 데 마게도니아 청년이 환상중에 나타나서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16;9) 그래서 바울은 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미국 LA 은혜 한인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쳤습니다. 부흥회를 하고 나면 강사비를 줍니다. 강사비를 바라고 부흥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여겼지만 강사비 왜 안 주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뉴욕을 들러서 다시 LA에 왔다가 귀국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나는 거냥 뉴욕으로 왔습니다.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고 맨하탄 31가에서 내렸습니다. 혼자 짐을 들고 약속 장소로 걸었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혼자 다닐 수 있게 익숙한 거리였습니다. 그 때 흑인 5명 정도가 나를 둘러 쌌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이 걸어 가며 나에게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리는 일행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 내놓았습니다. 지갑은 물론 패스포트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돈도 다 털리고 말았습니다. 영사관에 가서 임시 패스포트를 만들어 가지고 간신히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돈도 없어서 아는 이에게 좀 빌려서 비행기 표까지 다시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LA로 왔습니다. 김 광신 목사님이 재정부장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그리고 강사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강 목사님! 우리가 너무나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재정부장님이 강사비를 직접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나에게 드리게 하고 싶어서 내 책상위에 강사비를 놓아 두었습니다. 나는 드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때 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았습니다. 그 교회로서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만일 그 때 주었더라면 나는 그 돈을 다 빼앗겼을 것입니다. 나느 뉴욕에서 있었던 사건을 김 목사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김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둘이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유익되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3. 책망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죄와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증거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고별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상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 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같이 죄를 지었어도 성령님이 안에 계신 분은 너무나 괴로워 합니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수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집을 다 짓고 돈을 다 받았습니다. 같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술집 여인과 범죄를 하였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장로님 안에는 성령님께서 거하고 계셨기에 성령님이 죄를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즐거워 하는 데 왜 장로님만 그렇게 괴로워 하는 것일까요? 성령님이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태리 앗시시에 가서 가시없는 장미 밭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만 죄를 지어도 못 견디는 프란시스였습니다. 그는 조그만 죄에도 성령님께서 책망하셔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견딜 수 없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벌을 주려고 장미 밭에서 가시에 찔리려고 디굴디굴 굴렀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고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를 동원시켜서 가시를 모두 없애 버리셨습니다. 지금까지 가시없는 장미가 피어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조그만 죄를 지어도 책망하시기에 언제나 괴로워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진정 믿으면 정말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도저히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신 데 부부 싸움을 할 수 있을 가요?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목사가 들어서면 싸움을 그칩니다. 화가 났다가도 금방 웃습니다. 성령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데 싸운다면 성령님은 목사보다 못 하다는 말입니까? 성령님이 안에 계심을 믿는다면 그 분과 음란 비디오를 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같이 볼 것입니까? <성령님! 같이 보실까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일에 예배 참석하지 않고 단풍놀이를 갔습니다. 뻐스 안에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심지어 춤을 추며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왠지 불안이 있습니다. <주일인데 하나님이 노하시지 않을가? 뻐스가 사고나지 않을가? 오늘 무슨 일이 있지 않을가?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시간인 데 무슨 설교를 하실가?> 안에 계신 성령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다같이 즐겁고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 안에서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불안합니다. 무슨 재산상의 손해를 보면 내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그런 가 보다라고 깨닫게 됩니다. 한번만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이런 마음이 드는 데 세상 사람들은 평생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그랬습니다. 요나는 나 때문에 풍랑이 일어나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이런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같이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4. 심판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면서 심판하여 주십니다. 칸트는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고 마음에는 양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면서 하나님이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심판을 대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실상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 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히9;27) 우리는 김 수연 집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정말 아득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가장 큰 걱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였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심판받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료비 남은 것을 다 드려서 말리부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대나무로 잘 지어졌습니다. 그 교인들은 그 교회 이름을 수연교회라고 붙였습니다. 봉헌에배에 꽂았던 꽃을 내가 주어서 내가 갖다가 김 수연 집사님에게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심판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국민일보 겨자씨에 원고지 두 페이지에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어느 권사님의 마음을 성령님이 두드렸습니다. "너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터이니 심판을 준비하여라" 성령님의 이런 음성을 듣고 그는 얼마 전에 300만원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심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5. 소원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마음속에 무엇을 하고 싶은 소원이 막 일어나면 그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성령의 음성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다가 예수님을 만나 옷자락을 붙들고 고침받은 여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 병을 고치려고 의사란 의사를 다 만났습니다.재산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더 중하여졌습니다. 그는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소원이 일어 났습니다. 예수님 뒤로 와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갑자기 혈루 근원이 마르면서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침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소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1989년 4월 19일 미국 란카스타에 가서 성막을 보는 순간 한국에도 성막을 만들고 싶은 소원이 분수대처럼 품어 올랐습니다. 자나깨나 그 생각이었습니다. 기도하여도 찬송을 부를 때도 오직 그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 제작에 들어 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미쳤다고 하였고 헛수고한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복음 시대에 율법으로 돌아 가려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왜 예수 피 시대에 짐승피를 이야기하려느냐고 욕하였습니다. 심지어 우리 교인 가운데 미친 짓 한다고 떠나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성막은 복음의 핵심인 것을 알게 되고 성막 쎄미나가 잘 되고 있습니다. 소원은 성령이 주시는 축복의 신호입니다. 미국 수정 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원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지 단순한 내 생각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성령님이 주시는 소원입니다. 1. 이 소원을 이루고 나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인가? 2. 이 소원을 이루고 나면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게 되는가? 3. 이 소원을 생각만 하면 이루고 싶어서 가슴에 불타는 기쁨이 있는가? 예를 들어 봅니다. 우리 교회는 <12345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일한 교회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박물관, 성막, 숙소, 쎄미나 실, 그리고 특별한 기도실을 만들어 2천 교회를 개척합니다. 3천성도가 예배드립니다. 4만명이 방문합니다. 5억을 선교비로 사용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세 가지 질문에 비추어 보면 모두 <예>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고 수많은 이들이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꿈만 생각하면 기쁨이 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LA 레돈돈 비치에 가면 게를 먹는 집이 있습니다. 나무 망치를 가지고 게를 까먹는 아주 특이하고 인상깊은 음식점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인은 으레 한번은 둘르는 이름난 곳입니다. 너무나 잘 되는 음식점입니다. 그 집 주인은 한국인입니다. 그가 그 음식점을 경영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와서 어떤 일을 할가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말도 통하지 않고 미국도 모르고 막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그 음식점에 들렀습니다. 맛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습니다. 이런 음식점을 경영할 수 없을가 생각하였지만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되는 음식점을 팔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동안에 이 음식점을 살 수 없을가 하는 소원이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이 주인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말했습니다. "혹시 이 음식점을 팔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 미국인은 너무나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왜 이렇게 잘 되는 음식점을 파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명함을 하나 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은 팔 생각이 없으시지만 혹시 이 음식점을 팔 경우가 생기면 제게 연락 주시면 제가 사겠습니다"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관심없이 그 명함을 받았습니다. 체면상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난 후였습니다. 그 주인은 더 큰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점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점을 사게 된 것입니다. 그 주인은 힘들지 않고 팔 수 있었고 그 사람은 힘들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소원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5가지 일을 하십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여 주십니다. 2.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3. 우리를 책망하여 주십니다. 4. 우리를 심판하여 주십니다. 5. 우리에게 소원을 주십니다. 일본의 유명한 내촌감삼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하루>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매일 매일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님과 순간순간 일거수 일투족 살아 가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5가지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황광민 목사
어느 마을에서 17살짜리 소년 마이크가 지붕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하겠다고 소동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생활고를 고민하다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어린 소년은 오랫동안 너무 많은 문제로 고민하다가 자살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때 신사 한 분이 지붕으로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동안 그 소년을 설득했습니다. 그 신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 그 친절한 신사는 조지 폭스 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기어이 소년을 설득하여 데리고 내려와서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친절한 새 아버지 밑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신사가 불쌍한 소년을 양자로 삼아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 양자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받아 주시고 자녀와 같은 대우를 해주십니다. 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격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받아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원래 마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은 은총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녈 칭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지 않습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 것처럼 여겨주시고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로마의 양자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의 양자법에 따르면 양자가 되면 그 사람은 옛 가정에서의 권리는 다 잃어버리며 그 옛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됩니다. 이전의 권리가 하찮은 것이든 굉장한 것이든 일단 다른 집의 양자가 되면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또한 이전 가정에서 가졌던 의무에서도 완전히 해방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집에서 새 권리와 새 의무를 갖게 됩니다. 과거에 종이었던 귀족이었던 상관없이 새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갖습니다. 그 집안에 정식으로 상속자가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적용해 보면 양자됨은 첫째로 '관계의 연결'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 양자로 받아들여져서 부자관계, 가족관계로 연결됩니다. 둘째로, 양자됨은 '본성의 연결'입니다. 본질로는 여전히 죄인이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본성에 연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셋째로, 양자됨은 '사랑의 연결'입니다. 우리의 양자됨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무런 자격이 없으나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귀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증거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성령님이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도 잘 믿어지지 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증거해 주십니다. 머리로는 자녀 되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실제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에 감동을 주셔서 믿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격을 생각하지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자격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자녀로 삼을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어지지 않으면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성령의 감동을 바라십시오. 성령이 역사 하시면 확신이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일본에 훌륭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옛날 시장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첩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그래서 구박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공부를 못해도 구박, 잘해도 구박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쳐박혀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세군 사람들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서자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전도인은 즉시 서자든 누구든 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그는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고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무개 시장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으로는 첩의 아들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이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 정체성을 가지고 늘 감사하며 한평생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신하십니까?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시는 분은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줍니다. 믿음을 키워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도 믿어지게 만드십니다.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확실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시고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 양자의 권리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양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하였습니다. 양자라 할지라도 일단 자녀가 되면 아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습니다. 똑같은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지만 그리스도와 똑같은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일단 양자로 받아들여지면 상속자가 되는 권리를 얻습니다.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그는 원래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왕위도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옥타비아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위를 양자인 네로에게 넘겨주면서 딸 옥타비아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결혼하는데는 절차가 복잡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법적으로는 확연한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나라에서는 그들이 결혼할 수 있도록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남남이었을지라도 양자가 된 이상 아들 딸과 똑같은 신분을 갖게 되어 상속권까지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공동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권리입니다. 양자가 무엇입니까? 피가 섞였습니까?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권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 양자의 의무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리를 가진 동시에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권리가 있는 곳에는 의무가 있기 마련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인정하는 후사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당연합니다.
여기에 양자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아들도 일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최선을 다하여 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을 빚진 자라는 의식에서 시작합니다. 12절에서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복음에 빚을 온 세상에 갚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음으로 로마에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건물보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건물도 중요합니다. 그릇이 있어야 물건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만드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로서 전도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자된 성도들의 또 하나님의 의무는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을 따르고 육신을 따른다면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자녀는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육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바르게 살고 싶어도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로 무척 고민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싶으나 육신 속에 있는 죄의 법을 따라 죄를 짓는 자신을 성찰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러나 바울은 해답을 찾았습니다.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성령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고 말했습니다(롬8:2). 성령이 해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의 유혹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살면 죽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8:6).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8:13). 육신을 따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갈5:19-21).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삽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이 더 재미있어 보일지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십시다. 육신을 따르는 것이 더 평안하고 쉽게 생각될 지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십시다. 그 길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박상훈 목사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넘어가서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신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작고를 하셨지만 우리나라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판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했고 또 삶도 청빈했습니다. 그의 믿음도 독실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있으면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사도 법관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시외버스를 타고서 강원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탄 버스가 검문소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순경이 올라와서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검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경은 아무래도 그의 행색이 조금 수상하게 여겨졌는지 그의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대법원 판사입니다."
그러자 순경은 그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를 벌컥 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 지금 누구를 놀리는거요? 무슨 판사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오? 어디 신분증 한 번 내봐요!"
그는 자기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순경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를 판사라고 하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순경이 그의 신분증을 보니까 대법원 판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 자리에 대통령의 아들이 타고 있다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그 순경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다가 깜짝 놀라서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탔습니다. 순경이 우리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예, 저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순경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쳇! 예수쟁이구먼."
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시한 듯이 우리를 쳐다보지는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과연 시시한 분이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시한 삶을 살아가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마치 시시한 분이신 것처럼 평가절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어떤 거지아이가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아이를 이끌고 가까운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 시켜주었습니다. 아이는 정신없이 국밥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그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계면쩍은 듯이 아주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하나님과 친척이시지요?"
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고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하나님의 친척이 아니야. 하나님의 딸이란다!"
그 소리를 듣고서 거지아이는 자기 짐작이 맞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제가 생각했던 것이 맞았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르게 처신할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너무나도 감동이 되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황금문자로 기록되었으면 더 나을 뻔하였다! 너무나도 위로가 넘치고 큰 소리로 찬양할 만하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좀 더 바르게 처신함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12∼14절 말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우리가 다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빚진 자입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습니까?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육신의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빚을 다 탕감받았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의 빚진 자처럼 육신의 인도함을 받고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에 빚져서 육신의 인도함을 받는 자의 삶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의 삶은 무엇이 다릅니까?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은 육신에 빚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신의 인도함에 따라서 육신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빚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물론 내 힘, 내 의지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일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5:29∼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육신대로 살아갑니다. 결국은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거부하면서 육신대로 살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근심하실 것입니다. 탄식하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갈 때면 경호원들이 그의 주변을 호위해 줍니다. 대통령차가 갈 때는 앞뒤로 경찰차가 호위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갈 때는 누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줍니까? 경찰차가 대수입니까? 경호원들이 문제입니까? 천사들이 우리를 호위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천사장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인도해 준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갈 때는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인생길 걸어가는 동안에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보살피심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우리를 영원한 가나안 복지까지 안전하고도 무사히 인도하고야 마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은 상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벌받지 않을까?" 그러한 심령의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보면 무서워합니까? "아빠!"라고 부르며 반가워서 쫓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깁니다. 우리의 심령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 마음, 사랑의 마음, 친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모든 속사정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무거운 짐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우리의 모든 속사정을 아룁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들으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녀인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힘주시며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막14:36입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아버지를 좀 더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아빠," 영어식으로 하면 "papa, dad"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자라고 하니까 친아들과는 달리 차별대우를 받을 것 같고, 천대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 들어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 에스더도 생각해 봅니다. 그의 부모가 죽었습니다. 친척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데려다가 자기의 친딸처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잘 양육했습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내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사울 왕의 손자였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움을 할 때 사울 왕도 죽었고, 또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사울 왕에 속한 남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두 발 다 절뚝발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블레셋을 무찌르고 나라를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자기의 사랑했던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면서 요나단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속했던 모든 밭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식사할 때면 언제나 그를 불러 자기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므비보셋입니다.
이와 같이 일단 양자로 입적이 되면 친아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기록할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 사회에서는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던지 딸을 낳던지 상관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갖다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주변에 있는 아이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양자로 입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가문에 속한 모든 권한은 양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황제 네로도 양자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 클라우디우스황제가 죽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난 뒤에 양자였던 네로가 로마제국의 5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만큼 양자라고 하면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인정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양자는 오히려 친아들보다도 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당시에는 양자가 되면 막대한 권한이 양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양자를 삼을 때는 반드시 증인을 세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누가 증거해 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증인이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천사들이 증인이 됩니까?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증인이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관공서에 가서 중요한 서류를 받을 때나 또 은행에 가서 현찰을 찾을 때 신분증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도, 아무리 많은 현금이라도 그냥 내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1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함. 쾅!" 성령께서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엄청난 것이 오게 될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여기서 후사는 "상속자," 곧 유업을 이어받을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후사입니까?
"곧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될 후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기업의 회장자리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또 한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게 될 후사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사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납니까? 우리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중에서 최고로 감격적인 말씀입니다. 무한대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17절 중반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이어받을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모든 영광을 우리도 다함께 똑같이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유업을 자녀들이 나누어 갖습니다. 그래서 자녀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돌아오는 몫은 적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한합니다.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후사인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빠짐없이 충만하게 무한대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터져 오르는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황금문자로 기록하였으면 더 좋을 뻔하였다! 너무나도 위로가 넘치고 큰 소리로 찬양할 만하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말로 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말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에 압도를 당해서 그곳의 광경을 도무지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듯 엄청나고 놀라운 영광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후사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 무궁토록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너무나도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17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장차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될 엄청나고 놀라운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주와 더불어 받는 잠시 잠깐 동안의 고난은 얼마든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순교했던 것입니다. 롬8:18의 말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릴 영광스러움을 생각한다면 잠시 잠깐의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를 우리가 기쁨으로 지고, 주를 위해서 더욱더 헌신하며 충성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의 걸음을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모든 어려운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이어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듯이 우리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군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 무궁토록 왕노릇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육신에 이끌려서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더욱더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김홍규 목사
<현대인의 어두운 그림자, '두려움'>
세상 살다보면 두려워 할 일이 많습니다. 몰래 저지른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렵습니다. 숭례문이 전소되었을 때 책임소재를 묻는 공방전이 치열했습니다. 이전에 조금이라도 잘못한 분들은 다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전에 학위 위조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잘한 일이 세상에 안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제발 세상이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고 또 두려운 사람들이 있지요.
두려움은 날마다 현대인을 위협하는 원수입니다. 왜 두려워할까요?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가고 싶지 않은 어떤 곳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요. 작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1세 된 벤 카펜터(Ben Carpenter)라는 청년은 근육 위축증에 걸려 전기 휠체어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휠체어를 타고 인도(人道)로 가는데 트럭이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트럭 앞에 휠체어가 끼여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운전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운전을 계속했습니다. 벤이 탄 휠체어의 바퀴는 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지탱해주고 있었던 안전벨트 덕분에 벤은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행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는 911에 전화를 했습니다. 한 4km 정도 간 다음에서야 벤은 구조될 수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벤은 멀쩡했습니다.
이 트럭에 매달린 휠체어처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으로부터 벗어나야>
본문 15절을 보세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큰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일체의 두려움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 새번역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정반대 되는 말씀이 '양자의 영'입니다. 여러분, 먼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무엇일까요?
요즈음 출애굽기 강해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는데 하나님은 지름길이 아닌, 훨씬 더 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광야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지 뒤로 가면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즉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이지요.
개가 낯선 사람을 보면 왜 짖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짖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 개는 잘 짖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때에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토로했습니까? 두려움이 생길 때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출 14: 10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두려워한 나머지 뭐라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까? 왜 애굽에 매장할 때가 없어서 여기 광야까지 끌고 와 우리를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항상 바로와 모세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좀 힘들고 불안정하고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도 모세를 따라 자유와 해방의 길로 나갈 것이냐, 비록 종노릇하더라도 등 따습고 배부른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길 것이냐, 항상 이것 때문에 고민합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턴이지요!
코앞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난과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때 문제와 고난과 위기에 시선을 고정하면 우리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지요. 문제를 해결하시고 고난과 위기를 타개해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양자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으니>
이제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요!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노예는 무엇입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노예이지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이가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금만 고난과 위기가 닥쳐와도 두려워합니다. 모세와 함께 자유와 해방의 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기려고 합니다. 두려움의 종이 되어 꼼짝달싹을 못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두려움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양자의 영'을 새번역은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양자'라는 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Sonship'이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 원어는 'Hiothesias'로 되어 있습니다. 'Hiothesias'는 '양자로 삼는다'(to be adopted)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양자 양녀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습니까!
로마시대는 철저한 가부장중심제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patria potestas', 즉 '아버지의 권력'(the power of the father)이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아이를 버리라고 명령할 경우 어머니는 반드시 따라야만 했습니다. 로마 군인이 임신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남자아이일 경우 살리고 여자아이는 죽이시오." 이렇게 생부(生父)로서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지고 자식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노예로 팔아 넘길 수도, 유산을 한 푼도 안 물려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로 들어갈 경우 운명은 180도 달라집니다. 로마법에 명시하기를 양자로 입적된 사람은 양부로부터 그 어떤 해를 받아서도 안 되었고 반드시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번 양자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양자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노예로 있다가 양자가 되었습니다. 종살이는 끝나고 자유가 보장됩니다. 엄청난 빚을 떠 안고 있다가 부잣집에 양자가 되었습니다. 빚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부가 깨끗이 청산해줍니다. 범죄를 저질러 이력서가 안 좋습니다. 양자로 입적되는 순간 범죄 기록이 말소가 되어서 깨끗해집니다. 이와 같이 로마 사회에서 양자가 된다는 사실은 새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새 아버지의 새 자녀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사회와 달리 유대인 사회에서는 양자 제도가 없었습니다. 간혹 노예나 하인을 가족으로 편입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기 친자식들과 똑같이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속자로서의 전적인 권리를 안은 채 양자로 입적되는 경우는 오직 희랍 로마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랍 로마의 관습에 젖어있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건을 양자 비유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친부(親父), 즉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육신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우리와의 진정한 영적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영적인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 1: 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아버지가 사는 집이 누구 집이 됩니까? 아들집이 되지요. 사실 아들은 집 장만하는데 일원 한 장 보태준 것이 없지만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모든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에 양자로 입적시킬 때 7명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을 누가 증언해줍니까? 본문 16절을 보세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자가 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의 어떤 중산층 가정이 딸이 셋이나 있었지만 양자를 하나 들이기로 했습니다. 러시아 태생의 사내아이를 입적시키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에서 수속을 밟는 데에만 14개월이 걸렸습니다. 다시 미국에서 법적인 과정을 거치는데 12개월이 필요했습니다. 미국 판사는 물론이고 러시아 판사 앞에서 러시아어로 서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법적인 서류들만 두꺼운 바인더를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어떤 서류는 18쪽이나 되는데 기입을 완료하는 데에만 6일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러시아에 두 번씩이나 가서 일주일 이상을 체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수속하는 비용은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세상 양자가 되는 길도 참 어려운데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길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길은 너무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의 특권>
이제 하나님의 양자가 되면 놀라운 특권 하나가 기다립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그 영 덕분에 하나님을 '아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라는 말은 '아바'(Abba)라는 말인데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를 희랍어로 음역해 놓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아빠라는 말을 쓰시기 전까지 유대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친밀하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시는 양자가 되었습니다. 단지 양자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17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영적인 유산을 우리도 똑같이 물려받게 된 것이지요!
양자 비유는 참 놀랍습니다. 모든 친자식들이 사랑 받고 환대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생물학적인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받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양자는 다릅니다. 아무도 우연히 어쩌다가 양자 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해보고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결심합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책임질 준비가 되었을 때 양자를 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연히 어쩌다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숱한 고민과 아픔을 통하여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는 엄청난 수고를 겪으시면서 결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다고 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를 섬기려는 유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부를 수도 없는 하나님을 '아바, 아빠, 아버지'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든지 다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듯이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구라파가 아직 공산권이었을 때 리처드 범브랜드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두려워 말라'는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만 나타나면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랬더니 365회나 나오더랍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이 "그래. 맞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1년 365일 날마다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면서 용기를 가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양자가 되십시오! 자유함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
피종진 목사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인생이 축복되고 은혜롭게 인도해주십니다. 사람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를 가지고 잘못 판단해서 길을 잘못 찾아가기도 하고, 사람을 잘못 선택하기도 하며, 물건을 잘못 선택해서 속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생명의 길, 의의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평생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축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갈라디아서 4:6에도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감격을 가진 사람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기쁨을 가슴에 깨닫게 되는 순간 일평생 어떤 고통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한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악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사단의 영, 악한 영, 귀신들이 절대 이기지 못하게,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빛 앞에는 아무리 어둠의 권세가 강해도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가 절대 해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악령의 권세는 아무리 미사일과 핵폭탄을 가지고 싸워도 절대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에 악령이 물러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공포를 주지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셋째, 성령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님은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영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①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②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③우리의 언어를 지켜주십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잠 13:2)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것을 역사해 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혀가 성령님께 사로잡힘 받아서 복음을 전할 때에 3천명, 5천명이 마음의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④우리의 물질을 도와주십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 4:33~35)
넷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커피 잔에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내 평생에 쓴맛 단맛 다 보고 죽는구나.’라고 했답니다. 파리도 쓴맛 단맛을 다 보았다는데 우리는 인생에서 어찌 쓴맛 단맛이 없겠습니까?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인생은 누구나 쓴맛 단맛을 다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평안과 기쁨이 넘치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악령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를 받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된다는 것은 뒤따르는 문장이 앞선 문장과 긴밀히 연관됨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가까이 앞서 있는 1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했습니다. 줄여서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도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8:2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육과 죄와 사망의 노예상태에 있다가 성령의 역사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긴 했으나 주인이 없는 자유인이 아니라 새 주를 모신 자유인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옛날에는 빚진 자들은 그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채주의 종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주가 하란 대로 해야 했습니다. 육에 사로잡힌 바 되고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은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빚이 육신에게 진 빚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인데 죽을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복된 삶을 살아야 할 존재들인데 육신대로 살다가 죽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에서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지만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아들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양자로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양자도 아들입니다. 양자는 종과 다릅니다. 종은 주인을 무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언제나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공경은 하지만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부르짖는다”고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과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본래 속했던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새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새 성을 갖게 됩니다. 새 가정의 전통과 규범에 따라 예의범절, 교육, 인간관계, 언어생활, 행동방식이 다 달라져야 합니다. 새 가정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왕이 있는데 그 왕에게 왕위를 물려줄 자녀가 없다고 합시다. 그러면 촌수를 따져서 왕위계승순위가 가장 빠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런데 그 왕가에 아들이 귀해서 촌수가 아주 먼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왕손은 왕손이지만 가세가 기울고 아주 가난해서 평민 중에서도 평민 같이 살아왔다고 합시다. 왕궁으로 불려온 그는 그때부터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합니다. 그 수업의 내용과 과정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렵고 고됩니다. 거북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옛 삶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언어나 식사예절이나 걸음걸이까지 왕의 체통과 품위에 걸맞게 다 바꾸어야 합니다. 왕가에서는 부모와도 경칭을 써야 합니다. “아빠! 엄마!” 할 수 없습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해야 합니다. 프랑스 유학시절에 보니까 왕족이 아니더라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부부간이나 부모자식간에도 꼭 경칭을 쓰는 집안이 많았습니다. 아내를 부를 때도 “여보!” 하지 않고 “부인!” 합니다. 만나는 사람이나 상대하는 사람들도 다 바뀌어야 합니다. 옛 습관을 하루 아침에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궁중예절이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별히 개인교사가 붙여집니다. 신변경호도 이십사 시간 따라 붙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면 왕궁이나 국가가 나서서 다 해결합니다. 말만 하면 알아서 다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위계승자로서 왕의 아들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지체가 높아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 중의 왕이시고 천하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재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해결해주시는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멋대로 살면서 사실은 육신에 사로잡히고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해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언어와 행실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게 됩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게 해주십니다. 본문 16절과 17절 상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증언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곧 하나님나라를 차지할 상속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언어와 행실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답게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왕위계승자가 철저하게 왕위계승수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며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육신적 삶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나라 상속자의 모습을 지니게 되며 그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답을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갈5:16-26을 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여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버리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나라 상속자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의 삶을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상속자인 우리를 위하여 붙여주신 교사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며 그 삶의 과정에서 닥치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을 어떻게 지켜주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해지자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창12:10).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곳 사람들이 자기의 아내 사라가 너무 예뻐서 그녀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그녀가 자기의 누이동생인 것으로 알려지게 하여 자기를 죽일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창12:11-13). 그러나 그런 꾀는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이 데려가기도 쉽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집트 왕이 그녀를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습니다(창12:14-15).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잃고, 사라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의 순결을 잃게 된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다 살리신 일이 있습니다(창12:17).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한 남자로서 나약하고 겁 많고 졸렬함을 드러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지켜주심에 대한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서 거류할 때였습니다(창20: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랄 사람들이 자기의 아내 사라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창20:11) 자기와 사라가 부부임을 감추고 오누이 사이라고 했는데 그랄 왕 아비멜렉이 그런 줄 알고 사라를 데려간 것입니다(창20: 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사라를 가까이 하기도 전에 그날 밤으로 그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하셔서 아비멜렉이 곧바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까지 모두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병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창20:17-18). 이삭이 잉태되어야 할 태 속에 다른 씨가 잉태되지 못하게 근본적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도 지키셨고, 사라의 순결도 지키셨으며, 나중 태어날 이삭의 출생의 정결함도 지키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지켜주심을 확신하고 이 세상에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17절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집안이 융성할 때만 온갖 혜택을 다 누리고 가세가 기울면 다시 양자를 취소하고 그 집안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그와 영광만을 같이 누릴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복된 삶과 영광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오는 온갖 비난과 조롱과 박해와 손해라면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우리는 피하지 않고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