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법 추워져서, 몇 번 얇게 입고 나갔다가
떨었던 것을 생각하고, 오리털 파카를 입힌 아이와
패딩 점퍼(그냥 말할 땐 잠바...라고 하는)를 입은 엄마가
나들이를 나섰는데...
이런... 오늘 날씨는 별로 춥지 않군.
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게
가을보단 봄날씨 같기도 하고... 나는 더워서 겉옷을 벗어
유모차에 건 채로 조금 멀리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내가 일을 해서 통장으로 매달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던 때와는
영판 달라진 나의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서점에 가 본 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는 형편이다.
책을 읽고 싶을 땐 다행히 가까운 곳에 구립 도서관이 있어서,
다 낡아서 나달나달하고 누군가 아무데나 마구 밑줄을 그어놓은 책들을
빌려 읽었다. 읽다 보면 밑줄 그은 곳이 왠지 더 중요해 보여서,
독서의 흐름을 제법 방해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감지덕지...
그런데 중요한 건 빌린 책은 다시 반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읽던 책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속상할 때가 많았다. 나는 책을 한 번 잡으면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고, 그 다음엔 다시 아무 데나 펼쳐서
또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책의 문장들이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드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또, 한참을 안 읽고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책을 발견하고 다시 읽기 시작할 때의 기분도
꽤 괜찮다. 그런데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니.
그건 그냥 책의 맛만 본 거나 마찬가지다. 입맛만 버리고...
어쨌든, 오늘 큰맘먹고 서점에 가게 된 건, 오천 원짜리 문화상품권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디서 생긴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얼마 전부터 그것이 집안에서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난 그걸 지갑 속에 잘 넣어서 간직했었다.
5천원으로 살 수 있는 책은 별로 없겠지만,
조금 돈을 보태서 사면 되겠지...
그런데 막상 서점에 가 보니, 도대체 뭘 사야 할지...
책은 많고, 돈은 없고. 결정적으로 서점을 들어가면서,
"해리 포터 5권 나왔음"이라고 써붙인 걸 보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을 책들 앞에서 서성거렸다.
박완서, 공지영, 장정일, 이외수... 또 한동안을 시집들 앞에서
서성거리다 마음에 드는 시집을 하나 발견했다. 값은 6천원.
그걸 들고 돌아섰을 때, 드디어 내 눈에 띄고 만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나도 모르게 푸른 색 표지의
매끌거리는 책을 집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망설일 것도 없다.
사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해리 포터 시리즈는 우리 집에 거의 다 구비되어 있다.
물론 내 아이디인 아웬, 혹은 아르웬이 나오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아, 반지의 제왕 3부가 12월에 개봉한다... 기대 기대...
그렇지만 난 국내의, 드래곤들이 판치는 판타지 문학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언뜻 보니, 이건 뭔가. 신경숙의 신작 소설집 종소리, 가 또 눈에 띈다. 나는 세 권의 책을 들고 망설였다.
다 사버리면 문화상품권이고 뭐고, 얼마 안 남은 생활비가 동날 테고...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하지, 이런 경우를.
결국 난 시집을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책꽂이에 꽂았다.
그래도 책 두 권을 사니 상품권과 만 이천원이 날아갔다.
나는 서점 옆에 있는 제과점에 들어가서, 이천 원 짜리 쵸코케잌도
하나 사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아이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다.
잠깐, 세븐일레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쳐보았다.
화창한 날씨, 부드러운 산들바람, 따스한 햇살,
유모차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
그리고 새 책 두 권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콤한 쵸코빵...
그리고 나는, 작가지망생에서 알게 된 인연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오빠이고 스승이고, 친구이고 동생인 그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함께 글을 쓰고자 하는 동지들을 갖고 있다...
아... 이걸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가 행복이란 말인가.
첫댓글 아, 정말 따뜻한데요.^^
우리 동생이 같이 있었음 더 좋았을텐데...^^
도, 도서관은 자주 간다는...
다음에 같이 가요.^^ / 육교 를 지나 신호등 건너기가 귀찮아서 도서관 안가본게 몇달째라는...-_-
아웬님 섭섭 언니는 빠졌넹
실브리스 언니, 언니는 스승에 들어가거나 친구에 들어갈 거야. 아마도~ 호호호홋~
엄머...ㅎㅎ 실브리스님 당연히 친구죠...^^ (두 살이나 차이 나는데 히힛) 사실 대부분 친구고 절대적으로 동생들이 많으니 '언니'는 깜빡했어요... ㅎㅎㅎ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아웬님 존경스러운 +_+
작은 행복을 느낄수 있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하던데....역시 아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