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3. 2009. No.1342
SEOUL SUSAN REPORT
(서울
水山會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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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예천 醴泉)
예천군이 예천읍을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거점도시로 육성, 경쟁력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상설시장 리모델링 사업 등 소도읍 육성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예천읍 소도읍 육성사업은 군이 지난 2005년~2008년까지 4년간에 걸쳐 총 사업비 237억원을 연차적으로 투입, 상설시장 리모델링 및 특성화사업을 비롯한 예천코어 이미지파크조성사업, 전통스포츠 종합레저프라자 조성사업, 바이오식품 특성화단지 조성사업 등 4개 분야 사업으로 현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사업별 추진사항은 우선 예천읍 동본리 상설시장 리모델링 및 특성화사업으로 2006년까지 18억6천만원을 투입해 상설시장을 현대화 한 데 이어 올해는 11억4천만원을 추가 투입해 상설시장주변 진입로를 개설하여 시장접근성을 제고하고 지역주민 교통편익증진과 지역경기 활성화에 기여하게 된다.
또, 80억원이 투입되는 예천코어 이미지 파크조성사업은 남산공원 산책로 개설과 주변정비를 마치고 현재 한천생활체육공원 조성사업을 마무리 중에 있으며, 각종 생활체육시설을 설치하여 지역주민의 쾌적한 생활여건과 여가공간을 조성해 군민의 삶의 질 향상에 앞장서고 있다.
예천진호국제양궁장 일원에 105억원을 들여 조성하게 될 전통스포츠 종합레저프라자 조성사업은 다목적운동장, 국궁장, 활체험장 및 판매장, 풋살경기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조성을 위하여 현재 각종행정절차를 마치고 토목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사업이 완공되면 참여하여 즐기는 관광으로 전환되는 동시에 세계적인 양궁도시로 탈바꿈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바이오식품 특성화 단지 조성사업은 사업 계획의 일부수정으로 세부계획을 조기에 확정하여 시행하고자 전문가와 각계 의견을 수렴하는 등 추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예천읍 소도읍 육성사업을 금년에 마무리 하기 위해 사업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완벽한 시공으로 경쟁력 있는 경제적 거점도시로 만들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
안동하회마을 ☞ "클릭" http://www.bukchondaek.com/
봉정사 대웅전과 고금당 사이에 안정사 석조여래좌상이 외부에 안치되어 있으며, 고금당 정면에 있는 석탑이 봉정사 삼층석탑입니다. 봉정사 극락전 외부는 고풍스럽거나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는데,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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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2호) |
▲ 안정사 석조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44호) |
극락전(極樂殿) 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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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안내도의 1번 건물이 극락전입니다.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
봉정사
안동 근처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봉정사. 사실 지인의 강력한 권유로 가게된 곳이다.
봉정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오래된 나무 기둥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작고 아담한 절이다. 소박한 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강력한 추천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갔지만 솔직히 말하면 '강추'라고 하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절 주변의 노송과 잘 어우러진 곳.
[도산서원(陶山書院)[史蹟 제170호] - 동방의 명현 퇴계를 모시는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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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사림에서 세운 사액(賜額) 서원(書院)이다. 선생이 처음 명종 12년[1557]에 이곳 산수 좋은 언덕을 택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건립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내었다. 그후 선생께서 서거(逝去)하자 사림(士林)의 발기(發起)로 서당 뒤편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서원의 건물은 모두 30동인데 경내(境內)와 주위(周圍)임야(林野)를 포함 총 98,296평을 보호구역(保護區域)으로 묶어 사적 제170호로 지정 안동시[도산서원 관리소장]에서 관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 <擇里志>에는 계승(溪勝)의 제일로 기록했고 뒷사람들은 안동팔경(安東八景) 중 하나로 <退溪門下洛江流>라 하였다. 더욱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천원권 지폐(紙幣)를 보면 뒷면에는 도산서원의 그림이 있고 앞면은 퇴계의 초상(肖像)이 있다. 자녀들에게 돈을 줄 때는 도산서원과 퇴계 선생에 대한 약간의 상식만이라도 설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부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이긴 하나 한번쯤 읽어보면 일말(一抹)의 도움이 될 것이다.
1. 서원(書院)의 연혁(沿革)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처음 지은 <도산서당>이 전신(前身)이다. 1557년 도산의 남쪽에 터를 잡고 손수 마련한 청사진[室舍圖]으로 법연(法蓮)이란 중을 시켜 서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는 그의 죽음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중 정일(淨一)로 하여금 조영(造營)케 되었다.
그러니까 1560년 11월에 서당 3칸을 준공했다. 헌(軒)은 암서(巖栖), 재(齋)는 완락(玩樂)이라 하고 도산서당(陶山書堂)의 편액(編額)을 걸었다. 또 서편에 정사(精舍) 8칸을 세워 헌은 관란(觀蘭), 재는 시습(時習), 요(寮)는 지숙(止宿)으로 곧 농운정사(隴雲精舍)라 하였다. 당(堂)을 정남방(正南方)으로 한 까닭은 행례(行禮)에 편하고자 함이고 재를 정서향(正西向)으로 한 것은 원포(園圃)를 마주하여 그윽한 운치(韻致)를 숭상(崇尙)함이다.
그밖에 방실, 곳간, 문호는 제각기 뜻이 있다.[아래 설명 참조] 여기에 걸린 모든 편액(編額)은 선생의 필적인데 경제잠(敬齋箴), 백록동규(白鹿洞規), 명당실기(名堂室記) 등을 벽에 걸어 두었다.
암서헌(巖栖軒)의 위치는 방향(方向)이 양용삼문(陽用三門)의 제도인데 삼면에 퇴주(退柱)를 세워 동면으로 익랑(翼廊)을 덮었던 까닭에 매우 시원하고 수려(秀麗)하다. 방의 서쪽 벽에 서가(書架)를 만들었고 격장(隔墻)을 두어 그 반(半)을 침실(寢室)로 하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성현(聖賢)의 경훈(經訓)을 등뒤에 두는 것은 온당(穩當)치 못하다’ 하였다.
이 가운데 고서(古書) 천여 권을 좌우 서가에 나누어 꽂았다. 방에는 화분 한 개, 책상 한 개, 연갑(硯匣) 하나, 지팡이 한 개, 침구, 돗자리, 향로, 혼천의(渾天儀)를 놓아두었다. 벽에는 시렁을 만들어 옷장과 서류를 넣고 서통(書筒)을 두었다. [성제(惺齊) 금난수(琴蘭秀)의 도산서당기(陶山書堂記)]
서원(書院)은 선생이 서거(逝去)한지 2년 뒤에 제자의 발기(發起)로 위패(位牌)를 상덕사(尙德祠)에 모시기로 결정되어 1574년에 상덕사(尙德祠), 전교당(典敎堂), 동서재(東西齋) 가 낙성(落成)되어 사림(士林)이 모인 가운데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하였다.
후일 선조(宣祖) 임금은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편액(編額)을 하사(下賜)하여 명실공(名實共)히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향사축문(享祀祝文)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지었다.
心傳孔孟 道紹閩洛 集成大東 斯文準極
공맹을 심전하고 정주를 이어 받아 대동에서 집대성하셨으니 사문의 지극한 사표이시다. 원규(院規)는 퇴계(退溪)가 지은 이산원규(伊山院規)를 그대로 습용(襲用)했다. 이는 선생의 교육관(敎育觀)이 뚜렷하게 서려 있어 후에 영남(嶺南)의 각 서원에서는 이를 모두 준용하였다.
2. 위대한 동방(東邦)의 주자(朱子)
▣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대학자(大學者)이다. 자(字)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며 본관(本貫)은 진성(眞城)이다.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로 안동시 도산면 온혜에서 탄생(誕生)하였다.
어머니는 두 분인데 전모(前母)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슬하(膝下)에 2남 1녀를 두었고 퇴계는 친모(親母) 춘천박씨(春川朴氏)의 소생 으로 5남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불행(不幸)하게도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 박씨는 ‘너희들은 과부(寡婦)의 자식(子息)이라 비난(非難)받기 쉬우니 남들보다 백배(百倍) 공을 쌓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항상 훈육(訓育)하였다. 양육(養育)은 숙부(叔父) 송재(松齋)가 했는데 6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12세에 벌써 이(理)를 깨우쳤다. 이마가 넓어서 숙부는 그를 늘 광상(廣顙)이라고 불렀다.
8세 때 형이 잘못으로 칼에 손이 베여 피가 흐르자 퇴계는 큰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어떤 부인이 묻기를 “형은 울지도 않는데 너는 왜 우느냐?” 했더니 “형은 비록 울지는 않지만 피가 저렇게 흐르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니 그 나이에 벌써 할반지통(割半之痛)을 느꼈던 것이다.
20세에는 주역을 읽었고 21세에 장가들어 허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다. 부인 허씨(許氏)의 어머니는 문씨(文氏)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종이모(從姨母)이다.
27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해 11월에 아내 허씨 부인이 작고하므로 상처를 했다. 29세에 진사회시에 2등으로 합격했고 30세에 비로소 재취(再娶)하니 권질(權礩)의 딸이 그 아내다. 선생은 후일 그의 장인의 호를 사락(四樂)이라 지었다. 사락이란 1] 농사하고 2] 누에치고 3] 낚시하며 4] 나무하는 일이다.
34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셨으니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을 지냈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였다. 36세때 어머니 박씨의 상(喪)을 당하여 잠시 낙향 3년상을 치르고 상경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겸경연검토관(知製敎經筵檢討官)이 되었다.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專念)하였다.
일찍이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 여기에 몰두(沒頭)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大成)함으로 동방(東邦)의 주자(朱子)란 칭호(稱號)를 받게 되었으니 많은 학자들이 몰려와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선조(宣祖)께 올리니 왕은 이를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ꡔ성학십도ꡕ는 성리학(性理學)의 요결(要訣)이라 평가되었고 그 덕성(德性)과 교화(敎化)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크게 믿치었음으로 그 공적(功績)은 매우 공경(恭敬)을 받고 있다.
선생은 조정의 부름을 거역(拒逆)할 수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오래 머물지를 않았고 부득이한 경우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였다. 중요(重要)한 관직(官職)은 단양(丹陽)과 풍기군수(豊基郡守), 대사성(大司成), 지중추부사겸지경연(知中樞府事兼知經筵), 예조판서(禮曹判書)등을 지냈는데 출사(出仕)이래 90개 직종(職種)에 140회나 임명되었고 79번을 사양(辭讓) 했다.
저서(著書)로는 변론(辯論), 저술(著述) 편저(編著)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사단칠정(四端七情) 분리기서(分理氣書)가 대표적이다.
선생은 선조3년(1570) 11월에 득병(得病)하자 유계(遺戒)하기를 자신의 묘에 갈명(碣銘)을 <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로 하라고 하였다. 그해 12월 신축(辛丑)일 정침(正寢)에서 시병자(侍病者)의 부축으로 일어나 앉은 채로 편안히 운명(殞命)하였다.
부음(訃音)이 조정(朝廷)에 전해지자 임금께서는 한없이 슬퍼하며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재민(李齋閔)을 보내어 조상(弔喪)케 하고 이어서 우승지(右承旨) 유홍(兪泓)을 다시 보내어 제사(祭祀)를 지내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례(前例)에 없던 특유한 절차였다.
그후 선생에게는 대광숭록대부(大匡崇祿大夫), 영의정겸영경연(領議政兼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로 추증(追增)되었다.
1574년 사림의 발기로 서당 뒤편에 사우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도산서원이라 하였으며 매년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일에 향사한다.
◎ 선생의 자호(自號)
1]46세때 : 토계의 지명 토(兎)자를 퇴(退)자로 고쳐 <퇴계(退溪)>라 하였고 2]50세때 : 도산서당을 짓고 거기서 기거(起居)하며 <도옹(陶翁)>이라 했으며 3]70세때 : 임종시 유계하여 이젠 도산에 돌아왔다는 뜻으로 <퇴도(退陶)>라 했다.
선생은 이 수려한 도산과 퇴계의 자연 명칭으로 자호(自號) 하였으니 도산을 따서 도옹(陶翁), 도수(陶叟), 도산(陶山), 도노(陶老), 도일(陶逸)이라 했고, 퇴계를 따서는 계노(溪老), 퇴계(退溪), 계옹(溪翁), 병계(病溪)라하여 자신을 지극히 낮추었다.
또한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고도 했으며 돌아가시면서 도산(陶山)과 퇴계(退溪)를 못내 잊으심인지 <퇴도(退陶)>라 하였다.
◎ 시호(諡號) : 문순(文純)
道德博聞 曰文 :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은 문이요 中正精粹 曰純 : 중립해서 바르고 순수한 것은 순이다. 3. 서원(書院)의 건물(建物)
▣ 도산서당(陶山書堂)
선생께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낸 건물이다. 1557년에 착공하여 4년만에 완공 했는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한다.
◉ 완락재(玩樂齋)
락이완지(樂而玩之)란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서 따온 말이다.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즉, ‘도(道)와 리(理)를 즐기고 완상(玩賞)하며 죽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암서헌(巖栖軒)
암서(巖栖)란 뜻은 속세를 떠나 산다는 말로 주자의 운곡시(雲谷詩)에 나온다.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 즉, ‘학문에 자신이 오래도록 없었는데 바위에 기대서 라도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뜻이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제자(弟子)들이 기숙(寄宿)하면서 공부(工夫)하는 집이다. 공(工)자 모양의 평면(平面)을 가진 것은 공부를 의미한다. 제자들이 공부하는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쉬는 마루는 관란헌(觀蘭軒)이라 하였다. <농운(隴雲)>은 고개위에 걸려있는 구름이고 <정사(精舍)>는 정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가르치는 집을 뜻한다.
◉ 시습재(時習齋)
논어의 첫장 학이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온 것인데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란 뜻이다.
<時習>이란 말은 주자대전에 “庶有開於時習” 즉, ‘시습하며 공부를 깨우칠 것’이라 했고 “而吾時習之功” ‘나의 때때로 익히는 공이다 ’라고 하였다.
◉ 관란헌(觀蘭軒)
맹자에 “觀水有術 必觀其蘭”이란 글에서 따온 것으로 ‘물을 보는데도 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치는 이치를 살펴봐야 한다’로 <觀蘭>이란 수중의 큰 물결을 잘 관찰한다는 뜻이다.
◉ 지숙요(止宿寮)
지숙이란 어떠한 곳에 머물러 잠을 잔다는 뜻이다. 논어에 <止子路宿 殺鷄桼 而食之> ‘자로를 붙들어 자고 가게 하고 닭잡고 밥지어 대접하였다.’란 글이 있다.
이것은 자로가 어느 날 공자를 따라 가다가 뒤떨어졌는데 어떤 노인이 지팡이에 삼태기를 지고 있었다. 자로가 그 노인에게 묻기를 “영감! 혹시 공자님을 못 봤습니까?” 하니 노인은 “손발을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을 분간하지 못하니 누가 선생이라 하겠는가?” 하면서 지팡이를 땅에 꽂고 잡초만 뽑는 것이다. 자로는 그만 두손을 마주잡고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만에 그 노인은 자로를 묵어 가게 허락하고 닭을 잡아 수수밥을 지어 대접하며 자기의 아들도 만나게 했다.
이튿날 자로가 떠나와서 이 일을 공자에게 말씀 드리니 “그분은 은자(隱子)니라 다시 돌아가서 만나 보아라” 하거늘 그곳에 찾아갔더니 노인은 어디론지 떠나고 없더란 것이다. 이에 자로는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이롭지 않다. 어른과 이이의 예절도 없앨 수 없는데 임금과 신하의 의리(義理)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다가 큰 인륜(人倫)을 어지럽힌다.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정도(正道)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하였다.
▣ 상덕사(尙德祠)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퇴계를 주향(主享)하고 월천을 배향(配享)했다. <尙德>이란 덕을 높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이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이는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 덕을 숭상 하도다 이 사람이여!’란 뜻이다.
▣ 전사청(典祀廳)
전사(典祀)란 조선조 장례원에 소속된 제사(祭祀)일을 맡아보는 곳으로 서원에서는 향사(享祀)할 때 쓸 제물(祭物)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 전교당(典敎堂)
전교(典敎)란 <顯宣尼之典敎>란 글에서 따온 것으로 공자의 법과 교를 밝힌다는 것인데 <典敎> 즉, <늘 지켜야 할 가르침, 가르침을 담당한다>는 뜻이다.[宣尼 : 文宣王 仲尼, 곧 공자를 말한다]
이건물은 서원의 강당(講堂)으로 한존재에는 원장(院長)이 기숙한다.
◉ 한존재(閑存齋)
閑存은 헛된 생각을 막고 성심을 보존한다는 뜻이다. 주역에 ‘子曰 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謹 庸行之謹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용덕이 있으면 서로 바르고 가운데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말을 함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함에는 항상 조심하고 간사하지 않토록 하며 그 성실함을 보존 한다면 세상을 착하게 하지만 자랑을 아니 하느니라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한존은 또 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
내세를 밝게 보아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삼가며 사악을 막고 정성을 다하니 성나는 것과 걱정 스러운 것은 반드시 막고 고치니 상제가 이에 임하시다.
(紹示來世 戒懼謹獨 閑邪存誠 曰忿曰懲 必窒必懲 上帝寔臨).
▣ 동서재(東西齋)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방이다. 동은 ‘박약재(博約齋)’ 서는 ‘홍의재(弘毅齋)’라 한다.
◉ 박약재(博約齋)
박약(博約)은 논어의 박문약예(博文約禮)에서 따온 말이다.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절제하면 도가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학자가 폭넓은 학문을 하여 교양을 풍부하게 쌓는 동시에 이것을 집약하여 실행하는데 있어 예(禮) 즉 바른 생활양식을 규범으로 한다면 어긋나지 않아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 홍의재(弘毅齋)
넓고 의연한 마음 가짐을 홍의(弘毅)라 하는데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맡았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하랴? 죽은 뒤야 그만 둘 것이니 또 멀지 아니한가?
▣ 진도문(進道門)
진도는 학문을 하여 나아간다는 뜻이다. 근사록(近思錄)에 ‘明道若昧 進道若退’란 글이 있으니 곧, ‘도를 밝히는 것은 우매한 것 같이하고 도에 나아 감에는 물러 서서는 안된다’란 뜻이다.
▣ 광명실(光明室)
‘萬卷書籍 惠我光明’이란 주자의 사언시 중에 나온다. <만권의 서적이 내게 광명을 안겨 주는구나>란 뜻이다. 광명실은 동서 두 개가 있는데 동 광명실에는 퇴계가 직접 보던 책들이 있고 서광명실은 근래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동쪽에 있는 집으로 출판소(出板所)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서 찍어내는 여러 가지 서책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퇴계 문집을 비롯한 유묵(遺墨), 언행록(言行錄), 도산 12곡,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액자(額字) 등 총 2,790장의 목판(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 옥진각(玉振閣)
퇴계의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1970년에 현대식 콘크리트조로 지었다. 이곳에 진열된 유품은 모두가 선생이 사용하던 일용품인 문방구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외면적인 꾸밈이나 사치(奢侈)를 떠나 오직 청빈(淸貧)에 만족한 도학자(道學者)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진열된 유물(遺物)
1]실내비품 : 완석(莞席), 안석(案席), 장추(長箠), 등경(燈檠), 백자타호(白磁唾壺) 2]문방구 : 매화연(梅花硯), 옥서진(玉書鎭), 흑단연(黑端硯), 연갑(硯匣), 서기(書丌) 3] 청려장(靑藜杖) 4] 매화등(梅花凳) 5] 투호(投壺) 6] 혼천의(渾天儀) 7]서적류 : 성학십도(聖學十圖), 사문수간(師門手簡), 퇴계서초(退溪書抄),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문집(退溪文集), 심경후론(心經後論),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다수.
※ 참고[註]
성학십도(聖學十圖) : 성학(聖學)의 대강을 도해(圖解)한 책. 1568년[선조1]에 퇴계가 저술 하였다. 이것으로 퇴계는 선조에게 경연을 시강했다.
성학이란 개념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학, 인간교육의 핵심, 또는 성왕이 되게하는 학문이다. 구성내용은 성학을 열가지 도식으로 만든 것인데 제 1도에서 5도는 태극(太極)도, 서명도(西銘圖), 소학도(小學圖), 대학도(大學圖),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는 천도(天道)에 근본을두어 인륜을 밝히고 덕업에 힘쓰는데 공이 있는 것이라 했고 제6도에서 10도는 심통성정도(心統性精圖), 인설도(仁說圖), 심학도(心學圖), 경재잠도(敬齋箴圖),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는 심성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를 높혀야 한다고 했다.
▣ 역락서재(亦樂書齋)
이 건물은 엄격히 말해서 도산서원의 건물은 아니다. 선생의 제자인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을 공부시키기 위해 그의 부친이 특별이 지어준 별개의 건물이다. 역락(亦樂)은 퇴계의 친필인데 논어에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다.
▣ 도산잡영(陶山雜詠)
퇴계는 도산서당과 주위의 자연을 7언시와 5언시로 노래 하였다. 그중 몇가지를 적는다.
1]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이곳에 연(蓮)을 심어 연꽃과 더불어 벗했다. 연꽃은 더러운 흙탕 물속에 자라지만 때묻지 아니한 고운 꽃을 피우므로 그 고결(高潔)함을 퇴계는 완상(玩賞) 하였다.
<堂之東便 鑿小塘種 蓮其中 曰 淨友塘> 서당의 동편에 작은 연못을 파고 그속에 연꽃을 심었으니 못이름을 <정우당(淨友塘)>이라 한다.
2] 절우사(節友社)
서당 동쪽에있는 산기슭에 화단을 말한다. 이곳에 선생은 대나무, 매화, 국화, 소나무를 심어놓고 수시로 산책하며 자연을 즐겼다.
3] 몽천(夢泉)
몽천이란 산밑에서 나오는 샘물이다.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 곧, 바르게 가르친다는 의미다. 주역의 <象曰 山下出泉 蒙 君子以 過行育德> 산밑에 샘이 나는 것은 몽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서 행동을 과단성 있게 행하며 덕을 기르는 것이다.
4] 유정문(幽貞門)
서당앞의 출입문에 싸리로 엮은 사립문을 말한다. ‘유정(幽貞)’이란 ‘그윽하고 바르다’는 뜻인데 주역에 ‘履道坦坦 幽人貞吉’ 가는 길이 넓고 평탄하니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이야 말로 바르고 길할 것이다.
5] 열정(冽井)
서원 앞 광장 동북편에 있다. 물이 차고 마시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열정은 찬물이다. 주역에 <井冽寒泉食>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네’란 글에서 이름하였다.
6] 곡구암(谷口巖)
서원 구길 지금은 안동호로 수몰되고 없지만 입구로 들어가는 곳에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를 곡구암이라 한다.
東躡江臺北入雲 開荒谷口擬山門 此名偶似前賢也 耕隱風聲詎易論
동으로 강대 밟고 북으로 구름 뚫고 곡구암을 파열어 산마냥 만들었네, 옛 어진이 살던 땅과 이름 같지마는 농사로 은거하는 그멋을 어찌 쉽게 논할 손가[退溪]
7] 천연대(天淵臺)와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의 앞쪽 강안(江岸)의 좌우절벽의 경치가 아름다워 동쪽은 천연대, 서쪽은 천광 운영대라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산책하였다.
◉ 천연대(天淵臺)
<천연(天然)>이란 하늘에 있는 못을 말한다. 바위 절벽에 새긴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선조 때 영상]가 썼다. <鳶飛戾天 魚躍于淵> 솔개는 하늘높이 나르고 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는 시전(詩傳)에 있는 구절이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햇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돈다는 뜻이다.
活水天雲 鑑影光 觀書深喩 在方塘 我今得意 淸潭上 恰似塘淵 感歎長
하늘빛 구름 그림자 활수에 비추이니 글월 보는 깊은 비유 방당에 들어있네 나는 지금 맑은 못가에 참뜻을 얻으니 감탄을 길게하던 그시절과 꼭 같구려 [退溪]
8] 석간대(石間臺)
석간대는 서원 내주차장에서 시사단으로 건너가는 선착장 우측 언덕에 있다. 옛날 선생께서 제자 이귀암(李龜巖)을 작별하면서 읊은 당시(唐詩) 한귀절을 바위에 새겨 두었다.
君去春山誰共遊 鳥鳴花落水空流 今朝送別臨流水 他日相思來水頭
그대 떠나가니 이봄 누구와 더불어 놀고 새울고 꽃은 떨어지니 물만 홀로 흐르네 이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오 노니 훗날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오리라.
4. 퇴계(退溪)는 권질(權瓆)의 서(壻)
가. 권씨와의 결연(結緣)
‘이 사람 경호(景浩), 내가 자네에게 묻는 것은 자네가 아직 속현(續絃)1)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세. 자네가 내 집일을 잘 알고 있지를 않는가 ? 양대(兩代)가 입은 혼란에 내 여식(女息)은 혼이 나가 온전 하지를 못하이. 내 어디로 데리고 가겠는가!
더욱이 내가 적소(謫所)에 온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었고 또 언제 풀려날지 기약조차 없으니 혼기(婚期)를 넘겨 버린다면 저애를 그냥두고 내가 눈을 감을 수는 없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부탁하는 것은 내딸을 데려가 달라는 것일세.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를 해봐도 자네 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자네가 쳐녀를 면케하여 이 죄인의 원을 풀어 주게.’
권질(權礩)은 사화(士禍)를 입고 예안으로 유배되어 있을 때 양대(兩代)가 겪은 악경 때문에 혼이 나가 온전치 못한 딸을 항상 걱정하던 중에 퇴계가 마침 상처(喪妻)를 하고 혼자 지내는 처지를 보고 부탁의 말을 한 것이다.2)
전술한 바이나 퇴계는 21세에 허진사댁에 장가들어 23세 아들 준(寯)을 낳았고 그때는 태학(太學)에 다녔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지낸 뒤인지라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여 선생이 취하는 법도(法道)와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오히려 비웃기만 하니 상종(相從)할 사람이라고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3)뿐이었다.
얼마 뒤 고향으로 돌아올 때 하서는 작별(作別)하는 시(詩)에 <夫子嶺之秀 李杜文章 王趙筆> 곧, <선생은 영남에서 빼어난 분이요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며 또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비기리다 >라고 하였다.
정해(丁亥)년에 진사에 합격했고 10월에 둘째아들 채(寀)를 낳아 경사를 겹치더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이를 두고 했음인가, 불운하게도 11월에 허씨부인을 상처(喪妻)했다. 그 뒤 퇴계는 3년이 넘도록 새로 장가드는 것을 잊은채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다. 권질은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한지 만 9년이 되던 해의 어느날 퇴계를 자기의 집으로 조용히 불렀던 것이다.
퇴계는 일찍부터 권주(權柱, 호 花山)의 명문(名文)과 기개(氣槪)를 흠앙(欽仰)하고 있었고 그의 자제(子弟)인 수찬(修撰)을 지낸 권전(權塡) 등의 현양(賢良)과 출신 사림(士林)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권수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묘(文廟) 배향(配享)을 주창(主唱)하여 성공시키기는 했으나 끝내 무옥(誣獄)으로 희생(犧牲)당한 것을 몹씨 애석하게 여겼다.
이처럼 권화산과 수찬 부자(父子)분의 피화를[4]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터인지라 자기 고을 예안에 유배되어 살고 있는 권질(權礩)은 화산의 맏아들이자 수찬 권전(權磌)의 백씨(伯氏)이기 때문에 가끔씩 찾아가 뵙게 되었다.
그 어느날 “경호! 이사람 자넨 연전에 상처하고 난 뒤 속현(續絃)을 했는가? 장가 들어야지. 내딸을 맡아주게…….> 이렇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혼미한 딸을 맡아 달라는 권질의 부탁에 퇴계는 한동안 말을 잃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예! 고맙습니다. 제가 아내로 맞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자친(慈親)이 계시므로 이 사실을 아뢰어 승낙(承諾)을 받은 뒤에 곧 예를 갖추어 혼인식(婚姻式)을 올리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어머니의 승낙 하에 30세 때인 경인(庚寅)년에 권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함에 권질의 사위가 되었다.
※ 참고[註]
1)속현(續絃) : 상처한 뒤 재혼 하는일. 재취, 삼취를 말함. 2)권씨부인에 장가든 일 : 가일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권오근씨의 말과 권오봉 박사의 「예던길」 참조]
3)김인후(金麟厚) : 1510~1560[명종15] 조선 인종 때의 명신. 자는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 본관 울산(蔚山) 김안국(金安國)의 제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讚) 역임. 4)피화(被禍) : 연산군 갑자사화(甲子士禍)때 권주(權柱)사사. 무오(戊午)사화 때는 권전(權磌) 처형.
5. 시사단(試士壇)
시사단은 서원의 맞은편 강건너 섬마을 입구에 있었다. 이곳이 안동댐으로 수몰지역에 속하므로 안전하게 그 위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1973년 정부에서 높이 10m의 석축을 쌓아 시사단을 그위로 이건하였다.
이곳은 정조16년(1792)에 정조(正祖)께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거를 보였던 자리다. 우리 나라 역사상 지방에서 과거를 보인 곳은 도산뿐으로 매우 유서깊은 곳이다.
정조 임금께서는 선생[퇴계]을 추모하고 가상(嘉賞)하는 뜻에서 친히 제문을 지어 측신을 보내 서원 사당[尙德祠]에 제사(祭祀)를 올렸다. 그리고 영남일대의 선비를 장려(獎勵)하고 등용(登用)코자 과시(科試)를 보이도록 명하였다. 각신 이만수가 어명(御命)을 받고 도산서원에 도착해 지형을 살펴보니 장소가 협소하여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택한 것이 바로 서원건너 질펀한 송림(松林) 사이와 강변을 시험장으로 결정한 것이다. 서원(書院)에는 왕의 제문으로 제사(祭祀)올리는 식전(式典)을 할 때 7,228명의 선비가 참석하여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엄숙히 지냈다. 그리고 강변에 설치된 시험장에서 과거(科擧)를 보이니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은 3,632명이었다, 시험지는 한양으로 상봉하여 왕이 친히 급제 2명, 진사2명, 초시 7명을 뽑아 각기 시상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우고 단을 모아 <시사단>이라 하는데 비문은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陶水洋洋 其上壇也 壇有階級 水有淵源 登壇臨水 觸類而伸 先正之化 聖主之恩
도산물 양양히 흘러 그위에 단이로다 단에는 계급이 있고 물엔 연원이 있나니 단에 오르고 물에 임함에 류(類)를 따라 뜻펴니 선생의 덕화요 임금의 은혜로다 [樊巖 蔡濟恭]
서원에서는 지금도 이 정신을 이어 받고자 도산백일장을 매년 열고 있다. 여기에서 장원으로 뽑히면 어사화를 쓰고 조롱말을 타고 안동민속축제 행사장으로 와서 식전 마당을 한바뀌 돈다.
<제1회 장원 작품>
尙德祠前謁後生 光風霽月益淸明 道學文章千世範 功名事業一心情 奎星再탁(濯)昭人紀 木鐸重鳴警世聲 科場廣設都城外 仰慕乾坤聖惠盈 [巖泉 劉永仁, 경북 영풍군 이산면 용상리]
[參考事項]
도산서원은 1969년 정부에서 정화보수(淨化補修) 공사를 실시하면서 토석(土石)담을 <사고석> 담장으로 하고 지붕의 기와는 내림막사를 사용했으며 단청(丹靑)은 <금모로> 단청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옥진각>이란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을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외형은 한식 내부는 현대식]로 새로 지었다. 이 모두는 문화재 원형(原形)변경(變更)에 관계없이 박대통령(朴大統令)의 특지(特指)에 따른 것이다.
<박대통령 현장지시내용(69. 10. 14)>
- 당시 수행자 : 비서실장, 문공부장관, 내무부장관, 상공부장관, 문화재관리국장, 박종홍 교수, 의전비서관, 공보비서관, 보고관[9명] 1.창건 당시에 남아 있는 목재 등 원자재를 손실하지 않고 제 위치에 잘 복원될 수 있도록 각별히 조심하라. 2.각 건물 지붕의 처마끝 숫기와에 끝을 흙으로 하지 말고 백토를 하거나 네림막사 기와를 사용하라. 3.각 건물의 단청은 현충사[이순신사당] 영빈관단청을 참고할 것. 4.서적, 판각, 유물 등은 습기, 온도조절과 제충장치를 갖춘 전시관을 따로 지어 그 속에 보관토록 할 것[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 5.서적류는 서고를 정리하여 집중 보관할 것. 6.영구보존물은 목록대장을 비치하고 중요 서적류는 영인본을 제작하여 원본에 촉수(觸手)를 금할 것. 7.담장은 현재보다 높이 쌓고 아산 현충사와 같이 사고석 담장으로 할 것. 8.산림전문가[산림청]의 도움을 받아 아카시아 등 잡목과 잔소나무는 제거하고 벗겨진 땅은 잔디나 풀로 입히는 등 조림록화에 힘 쓸 것. 9.배산(背山)에는 철조망을 쳐서 사람들의 사방통행을 막아 경내의 분위기를 조성할 것. 10.당초보다 초과되는 예산은 별도 책정할 것.[정무제69-537(10.16) 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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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
도산서원 |
사적 170호 |
경북 안동시 |
조선 선조 |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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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http://corea3000.com/tour
도산서원[ 陶山書院]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1574년(선조7)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는 그의 문인(門人)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경북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창건한 서원. 사적 제170호
원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 1969년 문화체육부에서 해체 복원
↓ 시사단試士壇 - 도산면 의촌리 소재
서원 앞 강건너에 보인다
↑ 시사단試士壇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792년(정조 16) 왕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그곳 송림에서 과거를 치러 영남 인재를 선발하게 했는데, 이때 응시자가 7천 명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기념하기 위해 1796년 여기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썼는데, 1824년(순조 24) 비각을 개축하면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비각은 원래 도산서원과 마주보는 강변 송림 안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을 지상 10m 높이로 쌓아 옛 건물과 비를 그대로 옮겼다. 비각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목조집이며 중방 밑에 판벽이 둘러쳐져 있고,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를 받쳐 안정감을 주었다. 비각 안에 화강석으로된 비석이 있다.
↓ 도산서원
★내 인생에 후회는 없는가,,,
가끔 살아가는 일이 힘겹게만 느껴집니다 산다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고 살아가는 의미조차 무디어질 때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되돌아 보면 삶을 힘들게 하는 그것은 끝없는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들보다 잘 되야 겠다는.. 꼭 성공 하고야 말겠다는..
가끔은 그 성공이라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그 성공으로 인하여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지.. 그렇다면 얼마나 만족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그런 끊임없는 불안들로 하여금 어느새 지쳐가는 나를 발견 합니다.
욕심..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끝이 보이지 않고 쌓여만 가는 욕심은 늘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많은 욕심들로 서서히 지쳐가는 나를 보면서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온 이 삶에 후회는 없는지.. 왜 지쳐 버리고 나서야 이렇게 깨닫게 되는지.. 남은 것은 늘어버린 한숨 뿐입니다.
나 이제는 앞만 바라보기 보다는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으로 너무 많은 욕심으로 지쳐 버리기 전에 내 마음을 조금은 놓아 주려고 합니다.
많은 꿈과 화려한 미래 그 안에서 내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골의 어느 한 풍경처럼 소박한 미래에 내가 있기를..
화려한 아름다움을 탐내기보다는 그것보다 조금 초라할지언정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을지언정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그런 나이이기를 바랍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한 행복은 결코 오지 않을거라는 행복의 비밀을 되새기면서..
↓ 서원 앞의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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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 미륵불(보물 115호) / 안동시 이천동
연(燕)이를 사모한 법당 짓던 와공이 한 순간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어 날아간 혼이 제비요,
연(燕)이는 죽어 석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기에 제비원미륵불은 연(燕)이 아씨를 닮아
세상 소원 다 들어주는 미소를 지녔다.
풍채가 나라 안에서 내노라 하고 미소도 그러하다.
그러기에 안동의 얼굴로 삼았을 것이다.
산 넘어가던 길손이 쉬어가던 곳이 제비원(燕飛院)이요,
성주의 근원이 안동땅 제비원으로
민간신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제비원은 사람들이 머물다 갈 자리이다.
○ 제비원미륵불/ 안동 이천동 석불상이 공식 명칭
- 교통 : 안동 버스터미널앞에서 54번 시내버스(옹천방면.20분
간격)를타고 연미사앞 하차(15~20분 걸림)
승용차 : 서안동 나들목-서부초등학교4거리에서 좌회전
영주방면 5.2㎞ 연미사앞 주차(20분 걸림)
○ 성주 : 민간에서 집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신령. 상량신.
제비원 미륵불(보물 115호) / 안동시 이천동
연(燕)이를 사모한 법당 짓던 와공이 한 순간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어 날아간 혼이 제비요,
연(燕)이는 죽어 석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기에 제비원미륵불은 연(燕)이 아씨를 닮아
세상 소원 다 들어주는 미소를 지녔다.
풍채가 나라 안에서 내노라 하고 미소도 그러하다.
그러기에 안동의 얼굴로 삼았을 것이다.
산 넘어가던 길손이 쉬어가던 곳이 제비원(燕飛院)이요,
성주의 근원이 안동땅 제비원으로
민간신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제비원은 사람들이 머물다 갈 자리이다.
○ 제비원미륵불/ 안동 이천동 석불상이 공식 명칭
- 교통 : 안동 버스터미널앞에서 54번 시내버스(옹천방면.20분
간격)를 타고 연미사앞 하차(15~20분 걸림)
-승용차 : 서안동 나들목-서부초등학교4거리에서 좌회전
영주방면 5.2㎞ 연미사앞 주차(20분 걸림)
○ 성주 : 민간에서 집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신령. 상량신.
도산서원,농암시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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