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성희롱 피해자의 싸움이 남긴 것
490일만의 원직복직 합의,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는
<여성주의 저널 일다> 나영
필자 나영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으로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 노동자 지원 대책위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편집자 주]
성희롱 피해 책임 인정한 현대자동차
이제 2주일이 지났다. 12월 14일 투쟁승리보고대회를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 앞에서는 더 이상 텐트도, 현수막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노사합의서를 작성한 바로 다음 날, 농성을 하던 두 사람은 그간 투쟁에 함께했던 이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아산 공장 앞으로 가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투쟁 승리를 알렸다.
세 차례의 교섭 끝에 작성된 노사합의서의 내용은 전례 없이 피해자의 요구를 거의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제 합의서에 따라 2012년 1월 31일부로 가해자는 해고되고, 피해자는 2월 1일부터 원직복직이 된다. 복직 후에도 회사는 어떠한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 되며 회사가 불가피하게 폐업을 하게 될 경우에도 피해자의 고용을 승계해야 한다.
또한 고소, 고발 취하는 물론 피해자의 해고시점인 2010년 9월 20일부터 복직시점까지 발생한 임금에 대해서도 지급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향후 재발 방지를 위해 직장 내 성희롱 근절을 위한 예방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도 명시했다. 비록 현대자동차가 직접 협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마지못해 물류업체인 현대 글로비스를 내세워 교섭을 하도록 한 것은 결국 현대자동차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197일, 피해자가 처음으로 사건을 제보하고 투쟁에 나선 2010년 8월 12일로부터는 490일 만에 이루어진 값진 승리였다. 무엇보다, 이 투쟁은 개인의 투쟁을 넘어서 여성 노동자의 노동 문제와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중요한 의미와 과제들을 남긴 하나의 역사적인 과정이었다.
직장 내 성희롱의 실상을 드러내다
이 투쟁이 많은 사람들에게 새삼 깨우쳐 준 진실은 '직장 내 성희롱'의 실상이 그간 그려져 온 이미지들이나 추상적으로 생각해 온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선전물이나 교육용 자료에서 만나게 되는 고정된 이미지들은 유니폼을 입은 사무직 여성 노동자가 음흉한 눈빛을 한 남성 관리자의 신체적 접촉 또는 음담패설 때문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 그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직장 내 성희롱을 그저 '기분 나쁜 일' 정도로 인식하게 하고, 성희롱 피해자를 '치마 유니폼을 입은' '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림으로써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교육용 자료들이 오히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통해 편견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투쟁은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를 완전히 깨고 직장 내 성희롱의 가장 현실적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피해자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무직 여성이 아니라 세 자녀를 키우면서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였고 가해자는 새삼 음흉한 눈빛을 할 것도 없이 수시로 여성 노동자들을 성희롱하는 공장 관리자들이었다. 반복되는 성희롱에 힘들어하던 피해자가 동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징계해고를 당하는 현실은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가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단순히 '기분 나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가해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강고한 사회적 결합망, 고용노동부와 여성가족부 등 정부 기관들의 책임회피와 무능력, 문제가 발생하면 아예 폐업을 시켜서 책임을 털어버리려는 원청 업체의 행태 등은 그간 이루어져 온 직장 내 성희롱 대책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예방 교육이나 방지 대책은 꿈도 꿀 수 없는 언명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함께.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언론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자 그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던 많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농성에 필요한 물품들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통계나 사례 속에만 존재할 뿐 드러나지 않았던 이들, 또는 아예 사례로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낼 수 없었던 이 수많은 여성들이 직장 내 성희롱의 현실과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교육의 허상을 함께 증명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 이용한 성희롱
이 투쟁이 깨우쳐준 또 하나의 중요한 진실은 직장 내 성희롱이 단지 개인 간의 권력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 통제의 주요한 수단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같은 현실은 계약직, 하청, 특수고용 등 비정규, 간접고용이 만연한 노동 현장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올해 민주노총과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여성노동자 1,652명을 대상으로 ‘여성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정규직(3.11%)보다 비정규직(3.76%)이, 직접고용(3.13%)보다 간접고용(4.02%) 노동자가 성희롱을 더 많이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고용상태를 이용해 성희롱을 하고, 성희롱 사실에 대해 침묵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 통제에 순응하게 만든다. 박 씨는 현대차 아산 공장에서 성희롱이 자신에게만 일어난 문제가 아니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라고 밝혔다.
박 씨의 사례가 증명하듯, 성희롱 사실을 알렸을 경우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 쪽이라는 사실을 가해자도 피해자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가해자들은 성희롱을 이용해 끊임없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성희롱 뿐 아니라 다른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여성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건이 알려진 이후 세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가장임에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홀로 쫓겨난 피해자와, 투쟁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의 가족과 주변 권력을 총 동원하여 도리어 피해자를 몰아세울 수 있었던 가해자의 모습을 대비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박 씨가 이혼녀라서 사생활에 문제가 많았다는 요지의 공문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했던 현대자동차의 모습은 남성 중심의 권력 관계가 직장 내 성희롱 문제의 근원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결국, 성희롱이 여성 노동자 통제의 수단으로까지 기능할 수 있게 된 이와 같은 현실은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노동 현장과 불안정 고용을 양산해 낸 신자유주의 정책이 빚어낸 합작인 셈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성희롱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만 실시할 것이 아니라, 남성 가부장 중심의 노동 환경 문제와 여성 노동자의 고용 안정,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대책들이 정부의 핵심 정책으로써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 직장내 성희롱의 문제 제대로 인식해야
한편, 이 투쟁은 정부 뿐 아니라 노동운동에도 중요한 과제를 남겼다. 그간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운동계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대응해오지 못했다. 이는 노동운동계 역시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개인 간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투쟁 역시 단위 사업장의 노조와 산별노조, 총연맹이 모두 초기부터 사건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투쟁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성희롱이 '생존권', '노동권'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인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이를 개인의 문제로만 대응하려 할 경우, 기업의 책임은 사라진 채 성희롱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싸움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결국 피해자는 거대한 권력 관계와 노동문제, 가부장제의 문제에 '개인'으로서 맞설 수밖에 없게 되고 사건의 해결과정에서는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가해에 시달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의 재발 방지 대책은 기대조차 하지 못한 채 다시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온갖 비난과 시선, 불이익을 감당해야 한다.
이번에 박 씨가 최초로 성희롱에 의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런 모든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 산재인정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한다.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가 가장 1차적으로 의논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할 노동조합부터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이를 중요한 운동 의제로 설정하여 법적, 제도적 차원의 대책과 요구를 마련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길 잃은 여성가족부 ‘제 역할 찾기를’
마지막으로 이 투쟁에서 농성장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으로서의 역할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리어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여성가족부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지적하고자 한다.
단지 이 투쟁뿐만 아니라 '청소년 유해 매체 선정', '셧 다운제' 등으로 여성가족부는 이제 거의 '공공의 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청소년 관련 정책이 메인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가족부의 홈페이지를 보면 도대체 여성가족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결국 올해 7월 발표된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조차 한국 정부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가족업무와 양성평등 업무가 단일 부서 소관으로 합쳐지는 것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규범을 직/간접적으로 강화하고 양성평등을 달성하는 데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며 여성가족부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다.
더구나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대한 무능력함은 이번 투쟁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났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여성가족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으며 최소한의 성희롱 피해자 구제를 위한 노력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다.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11월 17일 여성가족부 앞에서 진행되었던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미츠비시는 미국에서 성희롱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3천억원의 배상 판정을 받았다"면서 성희롱 사건에 대한 인식과 법제도의 개선이 시급함을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해외의 인식 차이는 투쟁 과정에서 진행되었던 국제연대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처음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국제연대 행동을 기획할 당시에만 해도 사실 이렇게까지 큰 반향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해외 단체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고, 결국 11월 30일 '전 세계 동시다발 1인 시위'에서 '전미자동차노조'가 미국 전역의 현대자동차 공장, 영업소 앞 피켓 시위를 벌인 것이 현대자동차에게는 결정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가족부는 내내 대기업 눈치 보기에만 바빴다. 여성가족부가 이번 사건에 제대로 역할을 했더라면, 형식적인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백 번 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여성가족부에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거의 전무하다.
여전히 청소노동자, 요양보호사, 국민체육공단 등 다양한 여성 비정규 노동의 현장에서 성희롱이 만연하고 심지어는 재능교육, 경산삼성병원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사례에서와 같이 용역업체를 동원하여 성희롱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시급히 나서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금부터라도 성희롱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