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디바, MARIA CALLAS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1923-1977)는 자신이 연기했던 오페라의 주인공들과 같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금세기 최고의 디바인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넘었지만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대위에서 불태웠던 열정과 진정한 예술혼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La Traviata]의 비올렛타, [Lucia Di Lammermoor]의 루치아, [Norma]에서의 여사제 노르마, [Carmen]에서의 정열적인 여인 카르멘으로 열연하며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인물들의 정형을 마련해 놓았다. 개성이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캐릭터와 비교를 거부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칼라스는 10여년의 길지 않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영원히 불멸의 위대한 디바로 오페라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될 것이다. 칼라스는 1923년 12월 4일 미국으로 이주한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배우가 꿈이었던 어머니 에반겔리아와 약국을 경영하는 아버지 조지에게 있어 마리아 칼라스의 탄생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일찍 죽은 아들을 대신할 사내아이가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던 부모는 5Kg의 우람한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비만과 지독한 근시를 지닌 칼라스의 유년기는 날씬하고 예쁜 언니 재키로 인해 더욱 비참했다고 할 수 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랐지만 다행이도 음악에 관해서는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11살 무렵에 WOR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해 '라 팔로마'를 불러 1등상과 함께 블로바 시계를 받는 등 가려졌던 그녀의 재능은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경제공항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영하던 약국을 팔면서까지 부모는 두 딸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게 된다. 특히 어머니 에반겔리아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예술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음악교육에 더욱 열성을 쏟았다. 칼라스가 13살이 되던 해 그녀의 어머니는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위해 뉴욕을 떠나 두 딸과 함께 고국인 그리스로 향한다. 부부간의 불화도 겹쳤던 이 시기에 칼라스의 부모는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아테네에 자리를 잡은 후 왕립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된 칼라스는 서서히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낸다. 당당히 장학생이 된 그녀에게 최초의 진정한 스승인 이달고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자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였던 이달고는 칼라스의 재능을 다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가르침과 오페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전수해 주었다. 오페라에 숨어있는 드라마틱한 감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달고의 가르침으로 인해 칼라스의 집중력과 배움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져갔다. 2차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오직 끊임없는 연습과 공부에 몰두하며 오페라 역사를 빛낼 '불멸의 디바'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정결핍과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사춘기 소녀가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칼라스의 노력의 결실은 16세의 나이에 아테네 왕립 극장 무대에 나가 주뻬의 [보카치오]에 첫 출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스승 이달고의 후원에 힘입어 17살에 아테네 오페라단에 최연소 단원이 되었으며 토스카, 피델리오 등을 공연하면서 점차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7월 칼라스는 아테네에서 최초이자 단 한번뿐인 리사이틀을 열고 자신의 출생지이자 어머니에 비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45년 미국으로 돌아온 칼라스는 기대했던 미국 데뷔를 이루지 못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그녀에게 피델리오와 나비부인의 타이틀 롤을 제안했지만 90Kg의 과체중과 영어로 부르는 오페라에 대한 부담으로 이를 거절 했던 것이다. 데뷔, 성공으로 향하다 칼라스는 1947년 8월 8일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라 죠콘다]의 주역을 맡고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하며 오페라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또한, 칼라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죠반니 바티스타 메게니니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메게니니는 칼라스보다 23살이나 연상인 지방 부호였으며 훗날 메니저이자 남편이 된 인물이다. 메게니니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인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지도를 받게 되었고 칼라스는 점차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해 나갔다. 1948년 피렌체 시립극장에서 막을 올린 세라핀과 칼라스의 노르마는 이탈리아 벨칸토의 새로운 지평을 선언한 무대가 되었고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그녀만의 전설을 만들어 간다. 베르디와 푸치니뿐만 아니라 벨리니, 도니제티의 여러 작품들을 라 스칼라의 주요 레파토리로 삼은 것은 그녀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50년 3월 라 스칼라의 히로인이었던 레타나 테발디가 갑자기 병이나자 칼라스에게 출연요청이 들어오게 된다. 라 스칼라에서 [아이다]로 데뷔한 이후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노르마], [후궁탈출]에 출연하며 금세기 최고의 디바의 진면목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칼라스가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그녀 인생의 중요한 인물인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비스콘티는 지적이고 세련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비스콘티의 연기지도는 칼라스를 더욱 드라마틱한 오페라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몽유병 여인], [해적], [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오페라에서 배역을 관통하는 극적인 표현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이 요구하는 완벽한 테크닉과 연기로 무장한 칼라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세계에 걸쳐 있는 오페라 무대를 정복하는 것뿐이다. 런던 파리, 뉴욕,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칼라스 마니아들의 광적인 열광과 뜨거운 갈채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90Kg이 넘는 육중한 몸을 1년간의 다이어트로 28Kg이나 줄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생의 끝자락에서 60년대에 접어들어 칼라스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점차 시들어 갔다. 65년 런던에서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를 떠났으며 오랜 세월 칩거에 들어가게 된다. 70년대에 접어들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칼라스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하였다. 오랜 시간을 무대에서 떠난 그녀였지만 오페라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를 학생들 앞에서 선보이며 그녀만의 놀라운 예술세계를 전수하였다. 73년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미성중 하나인 디 스테파노와 함께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지를 순회하는 연주여행을 떠난다. 스테파노는 50년대 칼라스와 함께 무대에서 완벽한 호흡을 맞추었던 뛰어난 테너이자 칼라스의 오랜 친구였기에 그녀는 스테파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된다. 순회공연 중에 이들은 74년 10월 5일과 10월 8일에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펼쳤다. 그 해 11월 11일 일본의 삿뽀로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칼라스는 대중들앞에 나서지 않게 되었고 스테파노와도 연락을 끊고 지내게 되었다. 75년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나자 칼라스는 더 이상 삶의 의욕을 잃고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을 이룰 정도로 그녀의 정서는 이미 황폐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77년 9월 16일 늦게 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욕실로 향하던 마리아 칼라스는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의사가 도착하기 전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으며 53세의 '성스러운 디바'는 사랑의 상처를 안고 '노르마'의 영혼으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칼라스의 신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조차 환영받지 못했던 마리아 칼라스는 최후의 순간에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오페라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수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그녀였지만 한 여인으로 살아가기에는 사랑의 상처가 너무도 깊었던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드라마속의 여주인공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며 금세기뿐 아니라 다음세기에도 이어질 그녀만의 신화를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