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복음: 요한 10,11-18
목자와 삯꾼
한국 천주교는 다른 나라들처럼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선교사를 요청한 유례가 없는 교회입니다.
즉, 성호학파와 남인계 실학자들에 의해 천진암-주어사에서 처음엔 학문으로 시작했다가 차차 종교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각기 주교, 사제 등의 성직을 만들어 자신들이 미사를 행하기도 하였지만(가성직자 제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비밀리에 선교사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직자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입니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거치며 조선은 다시 성직자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성직자들을 모셔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이 온
유럽 교회에 퍼져있었기에 당시 선교회들은 조선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파리외방 선교회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한 분, 브뤼기에르 신부가 나서서 자신이 그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섰고 그렇게 그분은 초대 조선교구장이 되신 것입니다.
파리외방 선교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들었을 때, 브뤼기에르 신부는 또박또박 반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 전교회는 현재 기금이 없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2. 해외에 파견할 선교사가 부족하다. “선교사가 지금보다 많았던 때는 또 언제입니까?”
3.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조선의 양떼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습니다.”
4. 조선 포교지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렵다. “예전에 중국인 사제 한 분이 조선에 들어가서 순교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5.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 선교회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데, 이 말은 현실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파리외방 선교회의 걱정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저 위험한 조선 사목을 맡겠는가?”
브뤼기에르 주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75일간의 생사를 건 위험한 항해와 3년여에 걸쳐 남에서 북으로 중국 땅을 횡단하다가 결국 힘이 다하여 조선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가자라는 곳에서 마침표를 찍고 말았습니다.
한 여름에도 파란 눈과 큰 코, 노란 머리를 감추기 위해 거지복장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고, 기후와 음식, 피로와 열병 등 그 풍토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여행 중 파리외방선교회에 자신이 못 이룬 일을 부탁하였고, 모방, 엥베르, 샤스탕 등의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조선교구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참조: 개포동 성당, 브뤼기에르주교의 발자취를 찾아서(유투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시며, 위험이
닥쳐 양들을 버리는 목자는 ‘삯꾼’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브뤼기에르 조선교구 초대 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참 목자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한국천주교회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목숨을 다시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상황을 보더라도 미사나 강의, 특강을 할 때마다 사례비를 받습니다.
강의할 때 기쁘게 하지만 막상 그 봉투를 받을 때쯤엔 왠지 그것 때문에 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데 쓴다는 명목으로 받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어찌 자녀에게 무언가 받으며 자녀를 보살피고 키워줍니까?
저는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삯꾼’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기에 내가 행복해서 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목자가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18
오늘 우리는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양부(養父)로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엄청난 기여를 하신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의 희생과 헌신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느님께 사랑하는 약혼녀 마리아를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함께 평범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녀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셉은 군말 없이 수용했지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배신감과 서운함을 감출 길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루아침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요셉을 과묵하고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참 신앙이었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그 어떤 토도 달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당장 이집트로 떠나라니 순순히 떠났습니다.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평생토록 그저 묵묵히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크게 일조한 요셉이 당대 잘 나가던 고관대작이 아니라는 것,
시대를 주름잡는 엄청나고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대신 그저 평범하고 가난한 목수였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요셉이 엄청난 부자여서, 우리나라로 치면 한강 뷰가 좋은 초고층 100평 아파트에 사셨다면,
막대한 시세를 호가하는 노른자위 부동산의 소유자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가난하게 이 땅에 오시고,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순례자로 사셨던 예수님의 배경이요 디딤돌이 되어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자신을 증거합니다.
요셉은 엄청 대단한 일이나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자신이 행하던 작은 일들,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못질을 하는 일에 충실함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요셉처럼 매일 우리 손으로 하는 작은 일들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요셉처럼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요셉처럼 그 작은 일들을 통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1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착한 목자는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당신의 몸과 피를 성사로 변화시켜 당신이 구원하신 양들에게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착한 목자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이에 반해 삯꾼은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인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이리가 양들을 습격하면 도망을 가고 만다. 삯꾼에게는 이리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도 없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는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주님은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두고 달아나지 않는다.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신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 양들을 지키신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가르쳐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이시므로 그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도 항상 그 관계 안에서, 성령 안에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