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세상] 불운했던 고흐의 아름다운 유산
연합뉴스 2023. 3. 12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이런 순간이 있다. 아이의 첫걸음. 운 좋게 그 장면을 보는 일만큼 행복감이 밀려오는 시간이 있을까? 울컥하며 감동하거나 흐뭇한 웃음을 놓지 못할 시간이며, 영원히 머릿속에 아로새겨질 경험이다. 아기의 도전과 엄마의 뭉클함, 아빠의 환희가 마음 깊숙이 스며온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유화로 그린 '첫걸음'(1890)이다.
고흐의 '첫걸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 작품은 원조가 있다. 고흐는 거의 똑같이 모사했다. 농촌에 살며 농민들의 힘겨운 삶을 화폭에 담던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가 파스텔과 크레용으로 그린 '첫걸음'(1858)이다.
밀레의 '첫걸음' 로렌 로저스 박물관 소장
고흐가 가장 존경한 화가는 밀레였다. 그는 이 작품 이외도 '씨뿌리는 사람', '낮잠' 등 밀레의 작품 다수를 복사하듯이, 때로는 재해석해서 그렸다. 고흐는 밀레를 알고 난 이후론 한결같이 그를 닮고 싶어 했다. 고흐가 아기의 첫걸음 장면을 모티브로 '천국' 같은 장면을 헌정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와 영혼까지 나눴다고 여겨지는 동생 테오 반 고흐(1857~1891)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흐가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려 테오 가족에게 선물한 그림은 한 점 더 있다. 고흐가 살던 지방에서 봄이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를 그린 '아몬드꽃'(1890)이다. 선과 색이 단순하지만, 그 조화는 매우 아름답고 강렬하다.
'아몬드꽃' 반 고흐 미술관 소장
화면을 채운 가지와 꽃의 윤곽선이 율동감 있고 뚜렷하다. 이는 고흐가 일본 판화 '우키요에(浮世繪)'로부터 배운 화풍이다. 우키요에는 대체로 16세기부터 그려진 일본 에도시대 풍속화를 말한다. 평면성과 과장성, 뚜렷한 외곽선, 파격적인 구도가 특징이다. 인상주의 화가들 다수는 우키요에 화풍을 그림에 적용했는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화가가 고흐였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팬시 제품이나 다양한 소품의 디자인으로 널리 활용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작품에 스민 뒷이야기를 알면 그림을 보는 눈과 마음이 더욱 따뜻해진다. '아몬드꽃'도 제작 연도를 보면 '첫걸음'과 마찬가지로 고흐가 사망한 1890년이다. 이 해에 고흐는 광기를 폭발시키듯 무려 8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혼을 소진했던 것인지, 희망 없는 비참한 생활에 절망했던 것인지 그해 7월 말, 고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앞서 두 형제의 영혼이 이어졌다는 말을 한 것처럼 테오도 고흐가 사망한 지 불과 약 6개월 후 질병으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은 테오의 부인 요한나 반 고흐 봉허(1862~1925)와 갓 태어난 아기였다. 앞서 말한 '아몬드꽃'은 아기의 침대 위에 걸렸고, 아기는 성장하면서 그림과 편지로 큰아버지 고흐와 아버지 테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며 존경심을 품었다.
요한나 봉허의 초상(아이삭 이스라엘스 작품)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생전 단 한 작품만 판매할 정도로 무명이었던 고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이 두 사람의 활약 덕이었다. 분투 끝에 1905년 의미 있는 회고전을 열었으며, 1915년에는 고흐와 테오가 남긴 700여 통의 편지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하는 등 고흐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봉허가 사망한 뒤인 1930년대 들어서면서 고흐의 가치가 서서히 알려졌으며, 1941년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그 진가를 감지하고 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을 들여왔다. 오늘날 MoMA에서 가장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마침내 고흐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로 우뚝 섰으며, 197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당시 미술관 개관식에는 눈에 띄는 인물이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이미 80대의 노인이 된 그 아기였다. 그의 이름도 빈센트 반 고흐(1890~1978)였다.
2023년 2월 열린 반 고흐 가족사 초상 전시회 신화사
기억은 감동이나 영광일 수도 있고, 후회나 반성일 수도 있다. 아이의 첫걸음 장면을 직접 본 사람에게 '첫걸음'은 '미소 어린 그리움'이다. 새봄을 맞는 사람에게 '아몬드꽃'은 '설레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사무침', '절실함'과 동의어다.
그림 한 점에 깃든 화가의 영혼과 숨겨진 사연은 '삶의 정화(淨化)'가 되기도 한다. 시의 한 구절, 음악의 한 소절도 그렇다. 예술이 인간의 역사와 공존해 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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