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 29-32
이름을 노아라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의 형태의 시작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규명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그의 전 생애와 삶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에 순종하는 삶의 형태를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압축된 언어형식으로 표기된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땅위의 수고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형태를 노아를 통해서 주시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1. 본문 29-31절은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입니다.
히브리어로 동사 (나캄)이라는 말의 어근은 우리가 (멤)이라는 글자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서는 명사인 (노악흐)라는 말과는 하등의 관련을 갖지 못합니다. 때로는 작문에서도 어떤 글자들은 장황한 것들이 있듯이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안식을 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위로하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전자의 동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글자가 다른 의미로 변형되는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라멕이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라 하리라”고 말할 때에 순수한 풍자를 의미했든지 그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현재 다루고 있는 요점에 대해서는 그가 자신에게 그의 노동의 경감이나 위로를 약속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것은 아직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직능도 분별할 수 없는 아들에게서 어떻게 그런 소망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라멕의 표현이 하나의 예언이라고 선언하는 면에서 오류를 전혀 범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에서 유발되고 죄의 열매로 거두어들이고 있는 생활의 비참성들에 관련되는 모든 것을 단지 농업에만 제한시키는 데서 철저하게 무지몽매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룩한 조상들은 그들의 주위에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 모든 죄악들의 최초의 기원에 대하여 계속하여 상기시킴을 받으면서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불쾌를 사고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그저 근심에 싸인 한숨만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이란 말의 표현에서는 ‘제유법’의 비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가지의 수고로 그는 인류가 타락에 빠진 완전히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수고스럽고 슬프고 걱정스런 생활, 즉 그는 아담의 운명이었던 그 생활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했던 것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사악성이 날마다 증가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기대하지 않았던 구원을 보내주시지 않으신다면 도저히 그 형벌의 경감을 바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아주 간절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매우 강했으며 그런 구원의 필요성이 그들을 재촉하여 도움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노아에게 그렇게 경솔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모세가 분명하게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기억해 둘 가치가 있는 일로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확실히 다른 족장들의 이름에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왜 그들이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노아의 이름에는 상당히 그의 주장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신자들은 여기에서 노아의 이름에는 다른 이름에 적당치 않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라멕이 자기 아들에게서 무언가 희귀하고 비범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라멕이 자기 아들 노아가 그리스도인 것으로 믿은 만큼 그는 속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의견을 지원하는 면에서 합리적인 추상(抽象)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보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자기 아들에 관하여 어떤 큰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그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자신의 상상을 혼합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들이 때때로 계시의 분량을 넘어가는 일을 곧잘하여 결국에 가서는 하늘이나 땅에도 관련되지 않은 것을 다루고 있듯이 그도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인 듯합니다.
2. 본문 32절은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입니다.
모세가 여기가지 나열하고 있는 조상들에 관해서 그들 각자가 그들 가문의 최초의 장자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추측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는 단지 교회의 지속되는 계승을 추적하여 가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믿는 헛된 믿음으로 도취되는데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시려고 흔히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후반부에 속한 사람들을 택하시기도 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하시는 자들의 목록을 기록하고 있는지 또한 장자의 권리로 그들의 동족들 가운데서 가장 주요한 계급을 지니고 있는 자들의 목록을 기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그들 각자가 아들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도 잘라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에 관해서는 아들이 셋뿐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리고 모세도 이것을 의도적으로 보다 자주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노아의 모든 가족이 완전히 보호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도록 그는 그렇게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노아의 순결성이 선포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의 5세기에 걸쳐서 오직 일률적인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하는 오류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가 아버지가 되는 해에도 그 말이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차 홍수에 대하여 그가 경고를 받은 때를 약간 언급하면서 모세는 추가하기를 그 즈음에 그는 세 아들의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노아가 이에 세 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얼마 되지 않아서 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셈이 태어나기 전에 그가 정말 500년 간을 살았다는 것은 11장에서 그 증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아들에 관해서는 야벳이 동생이라는 것 이외에는 확실히 알려져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류의 멸망에 관하여 그가 무서운 말씀을 받았을 때부터 그의 커다란 비통으로도 아내와 부부관계를 하는 데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몇 사람들도 생존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가족이 두 번째의 세계를 재흥시키는 데에 쓰이려고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 언제 아내들을 각각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그것은 대홍수 오래 전에 되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자녀를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오직 여덟 영혼만을 보존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