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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3)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
로마서 8:14 / 조용기 목사
<서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의 생활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몰라서 애를 태웁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한두 가지 결정적인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이 방법으로 하라 저 방법으로 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님 뜻대로 인도하시는데 그 여러 가지 방법을 한번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특별계시를 통하여
첫째로, 성령님은 특별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는데 그 특별 계시란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 등을 통하여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도행전 2장 17절로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거기서 예언과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리라 했는데 가장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꿈입니다. 꿈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꿈을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십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알릴 때 환상으로 알리지 않고 예언으로 알리지 않고 요셉에게 꿈으로 알렸던 것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그 소식을 꿈을 통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로 21절에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메시지를 환상을 통하지 않고 예언을 통하지 않고 꿈을 통했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애굽으로 피난 가라고 지시할 때도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3절에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래서 애굽에 내려 갔습니다. 애굽에 요셉이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했는데 또 하나님께서 이제는 헤롯이 죽었으니 고향땅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도 꿈으로 메시지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9절로 20절에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그러면 우리가 꾸는 꿈은 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대게 개꿈이 많지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던지 천사가 나타나서 계시를 할 때 진실로 하나님이 주신 특별계시로 받아 들일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불러서 꿈꾸는 것은 다 개꿈이지 참된 꿈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사자들이 와서 현몽하여 말씀할 때는 진실한 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꿈을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면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말할 때도 있고 내 인간의 생각으로 꿈을 꿀 때도 많습니다. 오직 꿈이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말씀하든지 예수님이 말씀한 그 말씀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을 때 그 꿈은 진실로 하나님이 계시한 꿈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환상이 있습니다. 환상은 자지도 않고 깨어 있는데 영화를 보듯이 텔레비전을 보듯이 눈앞에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은 것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1절로 3절에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이 고넬료라는 이달리야의 대장이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했는데 제 구시라니까 오후 3시입니다. 오후 3시에 가정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랐는데 말하기를 네가 기도하고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서 상달되어 기억한 바 되었으니 욥바에 가서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환상인 것입니다. 이 환상도 우리가 잘못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환상을 뚜렷이 체험한 것은 제가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였던 것입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되야 될지 세상으로 나가야 될지 알지 못해서 상당히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금식하고 더운 여름인데 방안에 앉아 가지고서 간절히 주님 내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를 하고 그냥 드러누워서 좀 쉬는데 자지도 아니하고 아직 말똥말똥한데 갑자기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자유의 여신상처럼 예수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손을 높이 드시고 제 앞에 섰는데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자마자 전혀 모르는데 입에서 방언이 나와요. 막 방언으로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래서 그 환상이 사라지자마자 주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내가 주님께 헌신해야 되겠다. 그 결정을 하고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결정적일 때 주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음성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든지 예언을 통해서 음성으로 말씀하든지 음성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절로 3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이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면 예배하고 있을 때 성령이 말씀했다. 성령은 영인데 영으로 말씀한건 못 알아 듣잖아요. 그중에 있는 어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 이 음성으로 수차 들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고 처참한 상황입니다. 지금 제가 돌이켜 보면 아주 몸서리칩니다. 완전히 가난이 철철 흐르고 먹고 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하는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일어나서 손을 팔을 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팔을 펴니까 천막 안을 빙 뛰면서 돌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시키는데로 천막 안을 도니까 뭐라고 말씀 하냐면 장차 네가 온 천하만국에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털썩 주저앉아서 돌아도 보통 돌지 않았다. 지금 사흘에 죽 한 그릇도 못 먹는 처지에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 내가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말을 하느냐.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데 그 다음 이후로 또 기도하면 네가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라. 장차 영어로써 설교할 기회가 많이 올 터이니 외국어 습득을 많이 해놓아야 하니까 장차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라. 그래서 무엇 때문에 영어를 공부해야 됩니까? 한국말로도 몇 사람 앉혀 놓고 내가 설교하는데 내가 무슨 영어로써 설교를 한단 말입니까? 아니라. 너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영어로 설교할 것이니 준비하라. 그래서 이것 내가 아무래도 정신이 좀 잘못되어 가는가 보다. 너무 가난하고 어렵고 영양실조가 되니까 정신이 잘못 되서 이런 소리 하는가 보다. 그래도 행여나 싶어서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어요. 열심히 영어 성경을 읽고 외우고 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천막교회를 시작한 1958년인데 1970년대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저를 부르셔서 지금까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고 이것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선지자를 통해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음성이 다 주 성령이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마음속에 새겨 놓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묵시를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마음에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로 26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마음에 지시가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것이다. 저렇게 할 것이다. 그러면 기도하는데 누가 말도 안했는데 마음에 그런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지시를 통해서 말씀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게 와서 그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이 병자 위해 기도하고 난 다음에 이런 병이 나았다. 저런 병이 나았다. 그것 무엇을 보고 그렇게 합니까?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마음에 지시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마음에 하나님이 그런 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시를 주시는 것이 꼭 내 상관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과 같이 마음에 명령이 떨어지면 분명히 알아요. 아.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 분명히 알아서 그 지시를 따라 병 나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고 내 믿음대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데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인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이나 마음에 지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마음의 소원을 통하여
둘째로는 이제 가장 일반적인 성령님의 인도신데 마음의 소원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보통 사람들은 주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께서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소원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일에 대해서 뜨겁게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마음속에 일어나서 아무리 기도해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 소원과 함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동반할 때 하나님이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내 생각이나 마귀의 생각은 마음에 넘치는 평안을 안줍니다. 소원이 와도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칩니다. 생각 밖의 일이 마음속에 소원 되더라도 마음이 평안해요. 제가 미국 선교를 시작했을 때 미국에 많은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주의 종을 미국까지 보낼 수가 없어서 미국에서 주의 종을 양성했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어요. 그래서 하루 박여호수아 목사님과 그 사모님 권사님과 함께 조그마한 LA 해안이 떨어진 섬에 가서 하루 종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이것이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 주시옵소서. 굉장히 마음이 뜨거워지고 소원이 일어나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와요. 안하려고 하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지고 하겠다고 하면 마음이 기뻐지고 평안해지고 소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주님, 저는 이곳에 돈도 없고 신학교를 세울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이면 주님이 기적을 행해줘야 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그래요. 그래서 섬에서 나와서 조그마한 집회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한 집사님이 내가 지금 안 쓰는 집이 있으니까 그 집을 신학교 세울 때까지 써 주십시오. 그래서 가보니까 방이 한 5개 되고 집이 괜찮더라구요. 그래서 또 기도하니까 마음에 소원이 그대로 있고 기쁨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가 받아서 거기서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오늘 미국의 베데스다신학대학이 된 것입니다. 보통 마음에 소원이 뜨거워지고 소원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 뜨거워지고 소원과 함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뜨거운 소원이 오고 평안과 기쁨이 오더라도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로 왔는지 사탄이 말하는지 분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소원은 말씀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동반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탄이 갖다 주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고 기쁨이 없으며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별하는 것을 꼭 해야 될 것입니다.
3. 주위환경을 통하여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주위 환경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특별 계시도 마음에 소원도 받지 않았는데 환경이 나를 몰아넣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인도를 해줘요. 올데 갈데가 없는데 그 길밖에 갈데가 없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여의도로 나올 때 참으로 서대문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했었습니다. 교인들은 가난하고 헌금은 정말 적게 나와서 여유자금이라고는 백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경에서 더 이상 교통 체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교회 예배를 봐서는 안 되겠다고 예배 중지하라고 합니다. 서대문에서 한 만명이 예배를 드리니 교통이 하루 종일 마비가 되고 전 서울 시내가 교통마비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돈이 없고 교회를 지어 나가려면 막대한 금액이 드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우리 장로님들이 어떤 장로님들은 교회를 저 현저동 산에 올라가서 판자촌을 얼마 사가지고서 그리 천막을 치고 옮기자는 그런 장로님도 계셨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부하고 싸우더라도 이곳에 있자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들은 교회를 쪼개자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의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 길을 열어 달라고 할 때 마침 그때에 서울시 김현옥 시장이 여의도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여의도에 먼지를 날리고 여의도를 개발해서 여기에 특별한 시로 만든다고 그렇게 발표를 하고 불도저에 연기를 날리고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꿈도 못 꾸었어요. 그런데 모든 환경이 자꾸 여의도로 가도록 그렇게 인도를 했습니다. 우리 장로님 한분이 서울시 부시장으로 있었던 차일석 장로님의 어머니 김사라 권사를 잘 아니까 김사라 권사를 통해서 부시장인 차시장을 통해서 시장을 좀 만나 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길을 다 열어 주어서 제가 김현옥 시장을 만났습니다. 만나서 아무래도 우리 교회가 여의도로 갈테니까 나를 좀 도와주시겠냐고 그리고 돈이 현재 없으니까 외상으로 사겠다고 하니까 저보고 얼마나 필요하냐고 그래요. 한 3천평 그러니까 에~ 3천평? 10만평 가져가세요. 10만평... 나는 10만평은 꿈도 못 꾸고 돈도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3만평 가져 3만평... 아이 3만평도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만평 가져. 만평도 못합니다. 그때는 여의도에 아무도 안 나오려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3천평 그러면 좋다. 미리 내주고 건축 허가를 줄 테니까 돈은 되는 데로 갚아라. 그런데 제가 교회에 와서 여의도로 나가자고 하니까 와~ 반대가 보통 아니에요. 그 비가 오면 물이 덮이는데 틀림없이 거기에 둑을 쌓아도 여의도는 비가 오면 결국에 물에 덮인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자동차도 없고 전기, 수도, 난방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 나가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절대로 안 된다. 그래서 굉장히 고심 참판하고 있는데 우리 권사님 한분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가지고 내게 찾아 왔어요. 목사님, 긴급히 말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가 무너질 꿈을 꾸었습니다. 뭐라구요? 내가 보통 이런 꿈을 안 꾸는데 교회가 무너질 꿈을 꾸었는데 왜 꿈에 보니까 우리 서대문순복음교회에서 왕벌이 윙하고 교회에서 떠납디다. 날아가서 날아가는데 어디로 날아가는가 따라가 보니까 여의도 저 모래사장에 와서 떡 붙으니까 작은 벌들이 전부 집단으로 와서 그 주위에 큰 벌집을 짓습디다. 이게 교회 무너질 징조가 아닙니까? 교회 왕벌이 떠나가 버리니까 큰일 안 났습니까? 아이 권사님 내가 정말 고심 참판 하는데 하나님이 대답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왕벌은 바로 나를 보고 말하고 그 꿀벌들은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의도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환경이 그렇게 몰아주어서 여의도로 나왔는데 고생은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교회를 짓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실 때 미리 예비해 놓고 그리로 오라고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예비하신 손길입니다.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데 주님이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국민일보를 세운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국민일보를 시작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마음에 있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참 막연해요. 마음에는 자꾸 국민일보를 시작하라. 그때 마침 정부가 일반시민들도 신문을 시작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기 때문에 국민일보를 시작하라고 자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데 돈이 있습니까? 땅이 있습니까? 캄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님이 이끌어 주시옵소서.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갈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끌어 주시옵소서. 기도하고 하루 실업인들 모임에서 제가 그 설교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시작하라고 하는데 복음 중심으로 하는 신문을 시작하라고 하는데 자꾸 마음속에 소원은 주시지만 돈도 없고 나는 나올 장소도 없는데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내가 기도를 어떻게 하냐면 국민일보를 시작하기 위해서 빌딩을 짓는데 우리 교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땅을 주면하고 안 그러면 안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조건을 세웠습니다. 안하려고 떼를 쓴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까이에 땅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니까 신원 박성철 장로님이 나를 찾아서 우리 교회 장로님도 아닌 것입니다. 성결교회 장로님이신 것입니다. 신원 박성철 장로님이 그 집회에 왔다가 말을 듣고 나를 찾아서 목사님, 바로 교회 저 건너편에 건축하다가 망한 회사에 땅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바로 우리 국민일보 그 자리에 어느 회사가 망해 가지고서 땅을 파다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놓았습니다. 그것을 내가 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말을 들으니까 내 마음이 뭉클하고 하나님 성령이 감동에 네 땅을 내놓으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장로님,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돈이 없어요. 그 땅이 한두푼도 아니고 굉장히 비싼 땅인데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목사님, 주님이 말씀하시면 주님이 도와 주실터이니 돈은 한꺼번에 주지 않아도 좋고 시나브로 생기는데로 내십시오. 세상에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어요. 그 비싼 땅을 돈도 일시불 지불하지 않고 생기는데로 돈을 주면서 신문사를 시작하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 안하겠다고 말을 못 할 것이고 하나님 어찌할 거니까 그러니까 봐라. 내가 네 말 한대로 교회로 걸어가는 거리에 땅을 주지 않았느냐? 그러면 믿음으로 하라! 그래서 믿음이 생겨서 그 땅을 개발해서 건물을 짓는데 정말 지금도 박성철 회장을 보면 제가 미안한 것은 정말 돈을 너무나 조금씩 조금씩 몇 년을 걸쳐서 줬기 때문에 아주 안 준 것과 같습니다. 그냥 공짜로 하나님께 드린 것과 같은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내가 항상 지금도 장로님만 보면 마음에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의 일생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길로 가도록 예비를 해놓은 것입니다. 그 예비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기도하면.. 나타나면 그 예비한 것이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그리로 들어가면 나머지 일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4.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
그리고 네 번째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다가 마음속에 말씀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있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8장 19절로 20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여기에 보면 신접한 자 점쟁이들 무당들이 온갖 지절거리며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신접한 자들이 말하는 것이 성경에 일치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사탄이 하는 것이니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의 말씀에 비춰봐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어느 것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인지 아느냐. 하나님 말씀이 올 때 마음에 깊이 감동이 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헬라어로 하나님 말씀으로 로고스라는 말씀이 있고 레마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록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다 준 똑같은 성경말씀 이것은 로고스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로고스를 읽다가 성령이 감동을 해서 마음이 찡해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할 때는 그 로고스가 레마로 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들음이란 레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레마가 오면 마음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냥 로고스는 읽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그것이 마음에 깊이 감동이 되고 마음이 찡해지면 하나님이 나보고 말씀하시는 것이 레마가 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그냥 눈감고 손가락으로 콱 집어서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던지 듣던지 하다가 마음이 찡해지고 코등이 씽긋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설교를 들어도 설교 전체가 다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설교를 듣다가 어느 구절이 내 마음속에 부딪힙니다. 어느 말씀을 하실 때 어느 예화를 들을 때 내 마음에 확 부딪히면서 저것 날보고 하는 말이다. 그때는 로고스가 아니라 레마인 것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들으면 그것 참 좋은 말씀이다. 내가 못 깨달은 것 깨달았네. 그것은 로고스인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그것이 로고스가 되는 것입니다.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레마인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 체험을 한 것입니다. 밤바다 배를 타고 가는데 예수님이 캄캄한데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다 유령이라고 고함을 치고 배에 머리를 숙이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무조건하고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수를 건너갔는데 나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믿음으로 걸어가자! 구약성경에 홍해수가 갈라졌지 않느냐? 그러고 나갔더라면 죽었을 것입니다. 주시어든 나로 물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이 오라! 그것은 베드로 보고 말한 말인 것입니다. 거기에 다른 제자들보고 오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물위로 걸은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다가 베드로가 물위로 걸은 사건을 읽고 난 다음에 그들이 다 감동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베드로도 예수님에게 기도를 하고 물위로 걷는데 우리도 물위로 못 걸을 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한번 기적을 체험하자. 그리고 합심을 하고 보트를 타고 호수 가운데 가서 예수 이름으로 걷습니다 하고 물에 뛰어 들어갔다가 다 빠져 죽었데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직접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로고스를 가지고서 사건을 가지고서 자기에게 적응해서 사용하다가 그런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마음속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면 레마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방탕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합니다. 십대에 동거를 하여 사생아를 낳았고, 이교도에 물들기도 한 그를 위해서 어머니 모니카가 밤이나 낮이나 울면서 금식하며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정원을 거닐다가 어린애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펴서 읽어라! 펴서 읽어라!” 꼭 자기를 보고 하는 말 같아서 그 자리에서 성경을 쫙 폈는데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 말씀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말씀이 그냥 마음에 뜨거운 윤도로써 마음을 지지는 것처럼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옛날에도 그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했으나 아무 감동이 없었는데 그날 펼쳐봐라! 펼쳐봐라!는 애들의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치니까 이 로마서를 읽고 마음에 깊이 감동이 되고 크게 충격을 받고 그 길로 변화되어서 그는 역사상 위대한 성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에 크게 감동되어 이후 그의 신앙과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기도의 용사인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이리저리 살피면서 책을 빼보는데 한 책의 제목이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콱 맑아지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했으니 주님께서 이를 다 이루었으니 내가 할 일은 없지 않느냐? 내가 할 일은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전달만 하면 될 일이지 내가 무슨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것이 레마로 다가와서 굉장히 마음에 충격을 받고 그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그 뜻대로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중국인 외지 선교사로 가서 중국을 복음화 하는 위대한 선구자가 되고 하늘나라 말씀을 증거 하는 주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때로 우리 마음에 감동으로 주시는 말씀 레마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레마가 오면 그것을 그냥 버리지 마시고 마음에 깊이 받아들여서 여러분 은혜를 받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했습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리트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꼭 같은 보혜사로써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곁에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셔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셨고 다 이루어 놓으셨고 성령님은 다 이루어 놓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가지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살기를 간구할 때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별계시, 마음에 소원, 주위 환경,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 레마를 통해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러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다 와 계셔도 성령을 인정하지도 아니하고 환영하지도 아니하고 무시하고 성령을 예비하지 아니하면 성령이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불순종하는 자식이 집에 있으면 부모가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듣잖아요. 귀뚱으로 듣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섬기고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간구하면 주님이 이 여러 가지 중에 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속에 혹은 꿈을 통하여 혹은 환상을 통하여 혹은 음성을 통하여 묵시를 통하여 마음의 소원을 통하여 또 레마를 통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마음에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의 결과로 마음속에 전에 없던 믿음이 마음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주 사람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미쳤다고 말하고 정신없는 짓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 믿음이 하나님 성령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나가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오늘날 이와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어서 나가는 사람들이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레마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자매님 한분이 와서 내게 이야기 하는 것 들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서 하나님께 사업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에 레마를 주시더랍니다. 저 멕시코에 가면 선인장이 있는데 그 특별한 선인장을 개발하면 아주 굉장히 좋은 약이 된다. 그 선인장을 개발해 보아라. 그래서 그 말을 하니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그는 큰 신념을 갖고 멕시코로 건너가서 그 선인장을 찾아보니 과연 그 선인장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선인장을 한국에 가져와서 화학자들에게 보이니 분석을 해보니까 정말 특별한 약의 효과가 있어서 지금 큰 제약회사를 설립하고 그 약을 생산하고 있다고 나에게 와서 기도 받으러 왔었습니다.
<결론>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생활에 하나님이 레마를 통해서 혹은 꿈과 환상과 믿음을 통해서 마음속에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므로 담대하게 믿으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못 믿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산들에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 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이 땅에 행인과 나그네 같이 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자동차도 요사이 계기판에 갈 길을 밝히 보여주는 이 시대에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인도해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어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레마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기도하오니 보혜사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혹은 꿈을 통하여 혹은 환상을 통하여 혹은 음성을 통해서 혹은 지시를 통해서 혹은 마음에 소원을 통해서 혹은 성경의 레마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서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도전에 응전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양자의 영으로 오신 성령
로마서 8:14-18 / 이종철 목사
아바 아버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특징짓는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개역한글 판으로 검색해보면 무려 117번이나 ‘아버지’란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주님’ ‘하나님’ ‘여호와’ ‘거룩하신 분’ 등의 호칭들을 사용하고 있던데 비해서 예수님의 ‘아버지’란 호칭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고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친밀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시작합니다. 그런데 헬라 어 원문을 보면 그 순서가 다릅니다. “아버지여, 우리, 하늘에 계신”의 순서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아버지여”를 부르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듯이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사실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우리 모든 기도는 응답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소원을 모르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녀들의 간절한 소원, 그것이 합당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당한 소원일지라도, 부모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모이고, 사랑하는 자녀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방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중언부언 하는 기도는 말이 많은 기도입니다. 그래야 자기들의 신이 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을 설득하기 위해서 온갖 아첨을 해야 되고 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신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멉니다. 고대 바벨론의 기록을 보면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를 때 얼마나 장황했는지 모릅니다. “하늘과 땅의 왕이신 ‘샤마스’여, 공평과 정의의 주이시며, 아누나키의 주이시요, 이기기의 주이시여, 약속을 폐하지 않으시며, 명령을 변하지 않으시는 주이시여!” 이것이 곧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집니까? 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한 사이면 서론이 필요 없습니다. 자녀가 아버지한테 무언가 부탁하러 가서 “아빠, 나 이것 좀 사줘?” 하거나 “아빠~~” 하면 됐지, “연봉이 많으시고, 잘 생기시고, 남자다운 기상과 대범함을 지니신 우리 아버지시여!” 하고 나오면 되겠습니까? 당장 “얘가 미쳤나 할 것입니다.” 기도란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버지’로 마칩니다. 그냥 다른 말없이 ‘아버지, 아버지’ 하고 울며 내려와도 족합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것도 ‘저분이 나의 아버지시고,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끼는 순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다가오는 순간이 기도의 절정입니다. 이 이상의 기도는 불필요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이 광대한 우주에는 수십조, 수백조 개의 별이 있고 지구는 별에도 들지 못하고 작은 행성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지구조차도 인간이 살기에 얼마나 광대한 땅덩어리입니까? 그런 우주를 만드신 분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구약 시대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두려운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거룩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죽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출33:20-23).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고 온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빛마저 바라볼 수 없어 모세가 수건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뵈옵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하며 절망적인 탄식을 했습니다. 그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지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겨우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이제 ‘아버지’라 부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심지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는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이 단어를 ‘아도나이’ 곧 ‘나의 주님’으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는 법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자음만 표기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자음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음가는 ‘야훼’가 맞습니다. ‘할렐루/야’(야훼를 찬양하라)의 발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과 순복음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야훼’ 또는 ‘야웨’라고 제대로 발음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란 호칭도 성이 안 차셨던지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셨습니다. 아바는 우리말로 ‘아빠’ 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 ‘엄마’란 단어가 좀체 우리 입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님 어머님’ 하고 부르는 것이 어른답지만 친밀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감히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15절 말씀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 또한 하나님을 ‘아바’라 부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우주를 만드신 신이 바로 우리 ‘아빠’입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요, 죄인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양자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원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핏줄을 중시하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야 좀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양자를 삼고 그 양자에게 모든 권세를 물려 주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양자됨과 그 양자의 권세가 어떠한지는 카이사르(시저)와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가까운 친척을 양아들로 삼고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 파에 의해서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이 평지풍파를 일으켰습니다. 매우 낯 설은 인물이 그의 양아들로 지목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1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처음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이 공개되었을 때 로마 시민의 대다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지만 정통 귀족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별 직책도 없는 18세의 풋내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카이사르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 재산도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얼마 되지 남지 않을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역사가들은 옥타비아누스가 받은 가장 큰 유산을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그 성을 물려받은 것이라 분석합니다. 옥바티아누스는 양 아버지 카이사르라는 이름의 후광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결국 로마 최초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무명의 옥타비아누스를 일약 황제의 자리에 올린 것입니다.
우리 또한 무명한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들의 믿음이나 신념입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거룩한 착각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증거하십니다.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증인입니다. 성령님을 오늘 말씀에서는 ‘양자의 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낙인을 찍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의 시간입니다. 15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말씀합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큰소리로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속으로나 아니면 나지막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마도 예배를 드리는 도중 성령충만함이 극에 달했을 때 발하는 절정의 외침일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 중에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흘러넘칠 때 내지르는 찬양입니다. 우리 예배가 바로 그런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예배의 부름의 말로 곧잘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한글개역판 성경의 번역이 자칫 잘못된 적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 말 어감으로는 무언가 신령스럽고 경건한 예배, 우리의 진심을 담은 예배란 뉘앙스를 풍깁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신령’은 ‘성령’이고 ‘진정’은 ‘진리’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로 제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입니다. 진리 되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경건한 옷차림이나 침묵이나 그런 말투에 있지 않습니다. 조용하든 시끄럽든, 화음이 아름답든 거칠든, 설교가 유려하든 투박하든, 수가 많든 적든 상관없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진짜 예배입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크리스탈로 장식된 예배당도, 호화로운 파이프 오르간도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찬양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배에 성령의 임재가 있을 때 우리 영이 삽니다. 우리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영적 예배에서 나옵니다. 이런 성령님의 존재가 바롷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종의 영과 양자의 영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들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종과 아들의 차이를 아십니까? 종의 기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종은 잘못하면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하나만 잘못하면 죄인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종은 일을 하다가 실수나 잘못을 범하면 벌을 받거나 쫓겨납니다. 심할 경우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은 실수해도 심지어 수백억을 말아 먹어도 벌을 받거나 쫓겨나지 않습니다. 단지 부모님께 미안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그 죄는 믿기 전과는 무게가 다릅니다. 믿기 전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전히 엄한 주인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버지입니까? 부모와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부모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본인도 괴로울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도 안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자녀는 또한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습니다. 유산은 뛰어난 종이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된 자가 받습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신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엇을 상속 받습니까? 장차 이 땅 위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왕 같이 고귀한 존재들이 되어 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또한 상속받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함과 능력이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상속의 효력은 죽은 다음에 발생하지만 이미 그 권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영향을 미칩니다. 사장님의 아들은 말단 사원의 자리에 있을망정 권세가 있습니다. 누구든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 천국을 소유한 자로서 삽니다. 미래에 주어질 것이지만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23절에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이미 장차 이루어질 것들을 성령 안에서 미리 맛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를 먹으면서 우리는 이후 있게 될 풍성한 열매와 수확을 기대합니다. 성령님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며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행사하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되었습니다.
양자는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에서는 ‘함께’(헬라어로 ‘쉰’)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16절, 성령이 ‘함께’ 증거한다, 17절,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한 가족이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가족은 영광도 고난도 함께 누립니다.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모든 가족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사실 함께 고난을 당해야 권세나 영광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함께 고난을 겪었다는 것처럼 큰 권세가 없습니다.
중국 고사 성어에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나라의 재상 강태공은 재상으로 발탁되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만 파고 있던 무능력한 남편이었습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강에서 낚시를 했는데 낚시 바늘이 없는 낚시를 했다고 합니다. 세월을 낚았다나요? 그러니 집안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강태공의 부인이 살림살이를 꾸려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아내 마씨는 남편을 버리고 그 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이 재상으로 등용이 되었고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제 제후가 되어 부임하는 행차 앞에 강태공을 버렸던 부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부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강태공이 그릇에 담긴 물을 땅에 쏟더니 부인에게 그 물을 주워 담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내로 맞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는 부인을 향하여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한 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오” 하고는 외면하고 지나쳐 버렸다고 합니다.
강태공의 행위도 몰인정하였지만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지 않았던 부인도 영광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고난을 함께 하는 사람만이 영광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에서 수고하고 있는 여러분의 노고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저도 기억할 것입니다.
고생한 만큼 권리도 생깁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지 않은 자에게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마저도 내어놓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신이나 수고만큼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것입니다.
고난을 우리 의지로만 견뎌야 한다면 우리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려울 때 힘주시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낙담하여 있을 때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맛보게”(8:23) 하심으로 다시 힘을 내어 전진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유혹이 들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십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이 성령님 의지하여 매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로마서 8:14-17 / 김홍규 목사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18세기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써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어느 날 공원의 벤치 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공원 주변을 순찰하고 있던 경찰이 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뜨내기 부랑아(vagrant)인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슬픈 표정을 띠면서 반문했습니다. "나 역시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좋겠오!"--"I wish I knew who I am!"
지구 위에 인간이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 세 질문이 너무나 본질적이기에 철학적 혹은 종교적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바로 이 세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씨름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질문, 즉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기원전 6세기 경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인 키루스(Cyrus, ?―529? B.C.)가 태어났을 때 그의 할아버지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손자가 장차 자라나서 자기 왕국에 큰 위협이 되리라는 불길한 생각에서 하인에게 이 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하인은 아이가 불쌍해서 죽이지 않고 산기슭에 사는 시골뜨기 목동 부부(a peasant shepherd couple)에게 몰래 주어버렸습니다. 이 부부는 키루스를 친아들처럼 길렀고 키루스 역시 자기가 왕손(王孫)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시골뜨기로만 알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키루스가 드디어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의 출생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며 자기야말로 페르시아 왕국 전체를 상속받게 될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 때로부터 시골뜨기 키루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제 키루스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누군가를 바로 안다는 사실이 이와 같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알 때 여러분의 운명이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본문 14절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영의 인도함을 받고 다 그리스도인들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영의 인도함을 받고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다 하나님의 아들, 딸,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누구 집에 방문해서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 "가족처럼 대해주었다"라는 말을 합니다. 가족처럼 친밀하고 흉허물없이 대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가족 사이에는 눈치를 보거나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함과 친밀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편하고 다정스러운 마음으로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족처럼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세 가지 하나님의 자녀된 특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우리는 양자(養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우리는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종의 영'과 '양자의 영'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권세에 눌려 살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 아무리 친근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 아래에서만 그렇게 됩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 있어서 종은 주인의 소유물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에 어떤 권리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종은 언제나 두려운 마음 하나로 주인에게 순종하는 길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율법 아래에서 종과 같이 억눌려 살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양자'(ADOPTED CHILDREN), 즉 '양아들,' '양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양자' 개념을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양자 삼을 때 양자되는 사람은 아무 주도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양자 삼는 사람이 전적인 선택의 자유와 주권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양아버지 삼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허물 많고 자격 없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양자 삼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롬 5: 8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한 요 15: 16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지금의 민법과 똑같이 고대 로마법은 '친자'(biological son)와 '양자'(adopted son)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았습니다. 일단 양자가 되면 친자가 누릴 모든 특권을 하나도 남김 없이 누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양친이 살아 있는 동안에 친자식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양친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유산을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양자가 된 다음부터 친자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똑같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양자가 친자가 누릴 특권을 하나도 차이 없이 똑같이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15절 후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바'(Abba)라는 말은 본래 아람어(Aramaic)로서 직역하면 '아빠'(daddy)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막 14: 36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바 아버지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장벽도 없이 극도로 친밀감이 있다는 사실을 이 기도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갈 4: 6에서 바울은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자식이 아버지를 친근감 있게 '아빠'라고 부르면서 품에 안기듯이 이제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나갈 수 있게 된 양자의 특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후사(後嗣)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 우리가 누리게 될 최대의 축복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후사(heirs), 즉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양자가 되면 친자가 누릴 특권을 그대로 누리게 되는데, 이것은 특히 유산 문제에 있어서 분명해집니다. 친자식과 똑같이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특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 전반부에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려야 할 상속자로서의 특권을 우리도 똑같이 갖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즉 '아빠!'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도 같은 가족 관계를 맺게 되어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롬 8: 29은 우리가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된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더불어 한 형제 자매가 되었으므로, 예수님은 '대가족 중에서 맏아들'(the firstborn within a large family)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셨다고 까지 말씀합니다. 어쨌든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친아들인 예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유산 상속을 이제는 예수님과 한 형제 자매가 되었고,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헤디 그린(Heddy Green)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 헤디 그린은 백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헤디 그린은 그 엄청난 재산을 누가 물려받을지 아무런 유언장도 남겨 놓지 않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서 차가운 오트밀을 먹어야만 했고, 다 낡아빠진 옷을 걸치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연료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겨울에도 온 자녀들과 더불어 차가운 방에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누가 유산으로 상속받을지 아무런 언급도 해놓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무도 땡전(dime) 한 푼 물려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헤디 그린은 철저히 인색하게, 주먹을 꼭 쥔 채 세상을 하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늘의 엄청난 보화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하늘 재산을 상속받게 될 유언장(will)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바로 옆에다가 우리의 이름도 똑같이 기록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상속받을 수 있는 모든 하늘 유산을 똑같이 물려받을 상속자! 이보다 더 큰 영광과 축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과 똑같이 하늘 유산을 상속받을 후계자임을 한 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③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가족의 가장 큰 특징은 공동성(solidarity)입니다.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의 기쁨은 가족 전체의 기쁨이 되며, 누군가의 슬픔은 전체의 슬픔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족 간의 유대 관계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옛날 조선 시대에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릴 경우, 3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삼대가 모조리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단지 아들이요, 손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지요. 오늘날도 아버지가 실직을 하면 아버지의 실직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온 가족들이 함께 받아야만 합니다.
가족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영욕(榮辱)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 가족의 운명 공동성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면 우리 역시 고난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면 우리 역시 영광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문 17절 후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나라의 공동 상속자가 된 우리들은 마땅히 그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식을 갖고 살자.>
이제 저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말씀드림으로서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어떤 돈많은 부자가 있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아직도 젖먹이일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유모를 구해서 어린 아들을 어머니 대신 키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는 나이 열 살 되던 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남겨 놓은 막대한 재산을 공개 경매(public auction)해서 처분하도록 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경매를 시작할 때 반드시 자기 아들의 사진부터 먼저 경매하도록 유언장에 적어 놓았습니다. 드디어 경매가 있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날 부자의 어린 아들을 길러준 유모도 나왔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사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주인과 특히 자기가 맡아서 키웠던 주인의 아들이 그리워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귀금속과 가구 등을 비롯해서 값어치 나가는 재산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매인은 "세상을 떠난 주인은 다른 재산에 대한 경매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의 외아들 사진 액자(framed photograph)부터 먼저 경매하라고 유언을 해놓았습니다. 자,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20불로 이 사진을 사기 원하시는 분은 이 앞으로 나오십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 때 어떤 남자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헤이, 그 따위 쓰레기 같은 것은 빨리 치우고 오리엔탈 양탄자나 빨리 한 번 봅시다." 그 때 경매인은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유언장에는 분명히 주인 아들의 사진부터 먼저 경매한 뒤 다른 재산을 처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하녀는 자기 손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20 달러가 있습니다. 제가 이 사진에 20 달러를 걸겠습니다." 아무도 그 이상의 값을 부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진은 하녀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길렀던 주인 아들의 사진을 자기가 간직하게 되자 이 하녀는 뛸 듯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하녀가 주인 아들의 사진을 20 달러를 주고 사자마자 경매인은 다음과 같은 주인의 유언 내용을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재산을 내 아들을 정말로 사랑해서 아들의 사진을 간직하는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I give and bequeath all my possessions to the person who cares enough for my son to cherish this photograph." 하녀는 주인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 하나 때문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녀가 주인과 주인 아들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엄청난 유산 상속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이 우리 인생의 참주인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때 놀라운 유산들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엄청난 하늘 유산을 물려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벧후 2: 9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주신 마음
로마서 8:15 / 문기태 목사
많은 사람들이 예측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를 전망하며 불안해합니다. 우리 귀에 들리는 소식마다 어두운 것으로 가득차서 두려움에 잔뜩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착잡해 집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또는 '더 열심히 살것을..'하며 후회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들의 잘못과 실수를 일일이 떠 올리며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이제 새 해가 되면 진짜 잘 해야지. 나쁜 습관은 꼭 끊어 버려야지." 하고 결심을 굳게 가져보지만 어느새 일년은 빠르게 지나가고 변한 것은 별로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며 더 허탈해하고 불행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밝은 미래를 향하여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불행한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두려움과 큰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2000년도가 어느새 다 기울어가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한해를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름다울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제목을 잡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슴드린다면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주시지 않은 마음"이라는 제목이 맞을 것입니다.
새번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개역은 마음이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은 영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마음이 밝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의 세계는 영적인 영향으로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과 사단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무엇이 있습니까? 욕심, 사랑, 미움, 기쁨, 원망, 감사.... 여러분 그것들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아마도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것들의 시작과 근원은 두 군데일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일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단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과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1.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마음 - 두려움
물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은 갖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것보다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자세를 갖도록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두려움은 사단에게서 찾아옵니다. 두려움은 강력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만드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어른을 겁에 질린 어린애 같이 만들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비겁하게 만들고 죄에 굴복하게도 만듭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문제와 환경만을 바라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여 불안하게 하며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또한 두려움은 실패를 생각하게 하여 우리로 아무 것도 시도하지 못하도록 유도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울부짖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여러 질병과 근심을 유발시킵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쫓아내지 않으면 두려움이 믿음을 쫓아낼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두려움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며 하나님이 주신 영은 그와는 다른 양자의 영입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람들과 링컨대통령이 서로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청년이 "이제 미국이 끝장나는게 아니겠습니까?"라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링컨은 청년의 손을 잡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청년시절,덕망높은 노인과 가을밤을 바라보았는데 그때 무수한 별똥이 떨어져 내려 두려워했더니 노인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 무수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데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게나 하고"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속여 불안하고 두렵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한 밤의 풍랑속에서 두려워 울부짖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내니 두려워말라" 하시며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다가가셔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안심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항상 높은 데서 빛나는 새벽별같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
1) 능력의 마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능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맡겨도 자신없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주 능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감으로 넘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신만만도 아니고 자신 없음도 아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실패했고 연약하지만 능력을 주시는 주님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능히 할 수 있다.'고 여기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본래 대단한 능력이 있었습니까? 몇 사람에게도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실패하여 거역하고 대드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도망간 사람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나타나셔서 소명을 주실 때도 온갖 핑계를 다 동원하여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와 함께 하자 그 어려운 상황에서 무사히 그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출애굽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용기도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지난 한 해 돌아볼 때에 정말 대단한 능력을 경험하는 시간들이지 않았습니까? 저를 여러분이 알다시피 본래
소심하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감동주셔서 이 큰 예배당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고생을 감수하고 인내하여 도중에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많은 헌금을 하게 하시며 몸으로 수고하게 하시며 기도로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큰 일을 해내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능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순종했고 그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여 성취를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님을 힘입어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말 주변도 없고 복음을 명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력도 없고 재주가 뛰어나지 못해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세계를 주님께로 이끄는 뛰어난 지도자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마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사단은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게 만들지만 성령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보게 역사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며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수고를 나누어 주게 만듭니다.
헌신적으로 농아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있었다.이 교사는 늘 어떻게하면 잘 듣지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까 연구하며 지냈습니다.그러던 중 한 농아 여학생을 만나 사랑 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습니다.열 살 아래인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던 이 교사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기 위해 보청기를 연구하다가 이것을 발전시켜 인류 최초로 전화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이 헌신적인 교사가 바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입니다.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가 사랑할 때 엄청난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누군가가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이 솟아납니까?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고 그를 위해 여러분이 기꺼이 손해를 보아도 억울하지 않게 생각됩니까? 여러분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이 밉지 않고 오히려 다가가 감사 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납니까? 기뻐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여러분안에서 여러분을 지배하는 중입니다. 그 마음이 식어지지 않도록 넘치게 하십시오.
3) 근신하는 마음
근신하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하여 벌을 받는 모습을 떠 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근신은 다른 의미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근신이란 자기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잘 절제하여 삶에 균형을 이루고 자기를 발전시켜 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건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귀에게 패배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영적 훈련을 받지 않느냐?고 물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믿음생활에 전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을 빼앗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관심사를 세상만을 향하게 하고 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렇다고 체념하고 그대로 주저 앉으면 안됩니다. 주를 위해 우리가 기도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따로 떼어 놓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온 힘을 다해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에 마귀에게 삼켜 버릴 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감격도 사라지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사단의 종으로 탈바꿈하여 비참한 인생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능동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애써 경건한 생활을 하고 영적인 싸움을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 근신하여 깨어 있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가다가도 절제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나가다가도 깨닫고 절제하게 하십니다. 안일함과 게으름에 사로잡혀 사명을 외면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미움과 시기에 사로잡혀 죄를 짓다가도 깨닫고 회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면 그리고 강하게 역사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라는 껍질속으로 숨던 사람이 변하여 담대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며 유능한 사람이 됩니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 비판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해를 많이 끼치던 사람이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무기력하게 죄에 굴복하고 무능하던 사람이 절제하고 자기를 주께 굴복시키며 주님께 유익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마음이 충만하여 복음에 유익한 사람들이 되기 바랍니다.
소망으로 누리는 생명
로마서 8:14-39 / 이병일 목사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많은 부분이 로마서에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신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칼빈의 “기독교강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교회의 교리적 체계를 설명하는 조직신학적 대작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책들은 무시간적인 교리로 절대화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로마서만 보더라도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당면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로마서를 편지형태로 써 보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8장은 형식적으로도 로마서의 중간에 있으며,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을 가르는 중심이 됩니다.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교회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의 생각을 내세워 갈등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전반부는 주로 율법과 혈통에 의한 의를 자랑하며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폄하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믿음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혈통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후반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남용하여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칫 방탕함으로 흐를 수 있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그의 뜻을 세상에 펼치셨기 때문에 그 뿌리가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었던 죄인들의 암울한 상태에 대해 언급한 지금까지의 논조를 변화시켜 이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 성취로 말미암아 이루신 하느님의 의를 전가받았기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환난과 곤고를 당할 수밖에 없으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장래의 영광과 승리를 확실히 보장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에 찬 바울의 외침이 독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본문은 예정(선택)과 성화,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관한 교리의 확립을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각으로 본문을 바라보면, 현재 한국 개신교의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교리 아래에서 믿음이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변화 혹은 의존이라는 개인적이고 탈역사적인 신앙관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로도 사용됩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존재양식 중에서 믿음만을 강조하여 왜곡되었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믿음만’이 아니라 ‘소망과 사랑으로도’ 구원을 얻음을 말함으로써 더 적극적인 신앙의 실천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소망은 만사가 형통하리라는 막연한 육감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행한 일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성취하려는 하느님의 의지와 능력을 완전히 보증해 준다는 깊은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공동체에게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이 아무리 가혹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 편이라는 것,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리라는 것, 하나님이 예정된 계획안에서 그들을 돌보리라는 것을 굳게 믿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3주 동안 하느님의 영, 성령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그 사람은 하느님의 공동상속자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의 고통만으로도 힘겹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감당한다는 것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맡기고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고통은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고, 예수님을 함께 따르는 동료들과 당연히 나누어야 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만 하게 되기 때문에 삶에 그리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고난의 실태를 들추어 보게 하는 것과, 없는 고난을 상상하여 눈물 흘리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고난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여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세상을 달관한 양 행동하는 것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구원해 주기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같이 신음하고 있으며, 게다가 해산의 고통까지도 함께 겪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습니다(20절). 여기에서 허무는 “헛된 것, 잘못된 종교, 거짓 사상”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들의 잘못된 종교와 거짓 사상에 의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사상은 바울 시대에는 황제숭배와 군사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pax Rommana)인데,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모두가 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상을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적 물신숭배, 힘의 원리에 입각한 세계지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성으로 포장된 “편리함”입니다. 우리는 생활의 편리함을 위해서 많은 돈을 할애합니다. 돈을 들인다는 것은 자원을 사용한다는 것이고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며 고통을 떠안고 있습니다.
이제 피조물들이 세상을 구원할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19절).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때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라고 표현하듯이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은 ‘목을 뽑아 바라보다’는 뜻으로 학수고대(鶴首苦待; 학의 머리처럼 길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기다리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우연히 희랍어의 άποκαραδοκία도 머리(καρα)와 주시하다(δοκεύω)로 된 합성어로서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간절히 구원을 기다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음식물 쓰레기 없애는 일과 종이의 재활용입니다. 이 둘은 우리 교회에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봉사부에서 더욱 관심을 가지면서 줄여가고 있습니다. 미래의 뚱뚱한 인간들이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의 재활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중에 가끔 쓰레기통을 정리하다 보면 종이가 나오면 바로 꺼내서 폐지함에 넣습니다. 작은 종이 쪼가리라도 분리하여 재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잘못된 종교, 거짓 사상”에 굴복하여 신음하고 있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 소망으로 우리는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얻은 것처럼 소망으로도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 소망은 미래적인 것에 대한 기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과거에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시간적 역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인하여 믿음의 현실성이나 실천력이 약화되고 믿음이 단지 심리적 변화나 의존적 지향을 뜻하는 것처럼 오해된 데 대하여 믿음의 온전한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랄 때에, 자녀들에 대한 꿈이나 자기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그 바람이나 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 꿈의 목적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된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선이어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과 하느님의 뜻을 나누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소원의 성취는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현실을 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이유-근거는 우리 모두가 협력하여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간절히 바랄 때에 오늘도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며 탄식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사람만의 구원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이 정당한 생명권을 누리며 살게 되는 해방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한 마음의 탄식과 몸의 간구가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