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캔들*
이미영
노을을 가라앉힌 바다가 해변을 기웃거린다
모아이처럼 서있던 나는
화약을 잉태한 채
밤하늘이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셋, 둘, 하나! 일제히 쏘아올린 불꽃들
그림자도 없이 눈부시게 하얀 폭죽이 흘러내린다
서로를 물어뜯으며 어둠의 속살에 새겨지는 불꽃 문신들
쏟아져 내리는 너의 웃음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날아다니는 공중제비, 부딪히고 깨지는 환상통
나는 혼자 남겨진 채 낮에 있었던 서글픈 이유를 지워버린다
라이터를 넘겨받은 사람의 눈은 총구를 닮았다
또다시 암흑을 향해 날아가는 탄환
어떤 격발이 어떤 생각을 쏘아 올릴 때마다
망원경처럼 동그래지는 눈
나는 방아쇠의 힘으로 버틴다
폭약이 열심히 꽃잎을 상상하는 중이다
맨드라미, 시클라멘, 달리아……
어둠을 용접하느라 화려하게 찢어지는 꽃잎들
화약가루에 짓뭉개진 꽃잎 냄새가 중심을 잃고
블랙홀의 바다로 떠내려간다
바다는 오늘 밤이 부어준 향기에 취할 것이다
멀리서부터, 세이렌의 노래가 다가온다
너를 위한, 아니 나를 위한 기념일 축하 노래처럼
*로만 캔들: 원통 속에 화약을 넣고 터뜨리는 불꽃놀이
웹진 『시인광장』 2020년 9월호 발표
이미영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2019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 등단. 안정복문학상 은상 수상.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수상. 2020년 경기문화재단 문학-유망, 우수작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