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인 이훈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역시 기아자동차 시절 최고의 수비수 이훈재라는 호칭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다르게 불러야 할 것 같다. 상무 농구단을 아마농구 최고의 반열에 올리며 2005년도를 상무의 해로 만든 지도자, 명장 이훈재 감독으로 말이다.
“우승소감이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뭐, 기분 좋죠. 저 혼자 잘했다기보다는 우리 선수들이 잘해줘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평가해요. 사실 제가 감독이라고 온 지 1년 4개월밖에 안됐는데 우승을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제 부족한 면을 선수들이 잘 커버해 줘서 이룬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대회가 끝난 12월의 어느 날, 성남에 위치한 국군체육부대 체육관에서 만난 이훈재 감독의 첫 마디였다.
선수 시절 명 수비수로도 이름난 그는 여자농구 금호생명의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로서 첫 걸음을 뗐다. 그를 지도자로 입문시킨 신동찬 감독이 사퇴하고 김태일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변화 속에서 흔들리는 여자 선수들을 다독였고, 김태일 감독과 함께 팀의 창단 첫 우승이라는 대어를 낚았다. 이른바 여탕에서 어느 정도 지도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던 것. 하지만 그는 2004년 9월 서동철 감독의 삼성행으로 공석이 된 상무 농구단 감독으로 부임하며 또 다른 변화를 가졌다.
“사실 금호에서 여기로 온다고 했을 때 아내가 반대했어요. 아무래도 프로구단이 금전적으로 더 안정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남자팀에서 또 감독으로서 제 농구를 펼쳐보고 싶다는 욕심을 아내에게 설명하니 곧장 이해를 해줬죠.”
하지만 그는 데뷔와 동시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첫 지휘봉을 잡은 전국체전과 농구대잔치에서 예상치 못한 부진을 보였던 것. 특히 2004 농구대잔치에서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을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해 이래저래 모양새가 좋지 않은 첫 해를 보내야 했다. 또 한 차례 시련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런 난관들을 헤쳐나가야 할지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선수들 역시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을 찾았다. 말 그대로 선수들이나 그나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아마농구란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가는 1년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4년은 결코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다.
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
2004년 겨울 동계훈련부터 차근차근 팀을 만들어간 이훈재 감독은 선수들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가 훈련 기간 중 선수들에게 가장 많이 말한 것이 바로 ‘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였다.
“선수들이 운동을 할 때 보면 자신이 웨이트 트레이닝할 때 얼마만큼의 무게를 들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아요. 그냥 무의식적으로 시키면 들고, 아니면 대충한다는 거죠. 그만큼 자기 자신한테 무관심하다는 뜻이죠.”
선수의 모든 것을 파악해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이 감독의 노력은 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선수들 모두가 이러한 이 감독의 말에 자신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운동 시간은 다른 분위기로 변모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인 움직임과 훈련으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마인드와 훈련을 바탕으로 그는 선수들을 데리고 나가는 대회마다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국가대표팀을 대신해 참가한 동아시아 대회에서는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전 세계 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군인농구선수권대회(CISM)에서는 5위에 입상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울산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와 2005 농구대잔치에서는 각각 중앙대와 고려대 등 대학 강호들을 물리치며 명실공히 팀을 아마농구의 최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이번 농구대잔치에서는 지난해 지도자로서 잘못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되도록 흥분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벤치를 지켰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1년 새 달라진 점 같아요. 그런 면에서 아직까지 많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선수들과 점호를 같이 받는 감독님
돈암동이 집인 그는 매일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와 6시 30분에 선수들과 같이 점호를 받는다. 새벽에 나오다 보니 세수하고 머리 감는 것까지는 안 되고 이나 닦고 털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이 고작이라고.
현재 그는 부인과 6살짜리 딸, 그리고 2살짜리 아들을 둔 아버지다. 이번 대잔치가 끝나고 혹시나 가족여행을 다녀왔느냐고 물으니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해외여행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그래도 휴가 기간에 딸을 유치원에 등하교 시키고 집에서 아들과 놀아주면서 모처럼 아버지 노릇을 했다고 자랑이다. 주말에는 가까운 교외에 드라이브도 갔다 왔단다.
“이곳은 프로팀에 비해서는 그래도 출퇴근이 일정해서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어요. 그래서 아내도 좋아하더라고요. 대회가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 일과 시간 이후는 가족과 보내니까요.”
그는 현재 경원대 대학원에서 사회체육학을 전공 중이다. 2학기를 다니고 있는 중. 여기에 덧붙여 군무원이다 보니 학비를 싸게 다니고 있다는 장점도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밖에 매주 월, 수요일에는 부대에 외국인 장교가 와서 영어 공부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발전을 위한 자기 투자인 셈.
흔히들 상무 감독은 프로팀 사령탑으로의 등용문으로 꼽힌다. KTF의 추일승 감독이 그랬고, 삼성의 서동철 코치가 그랬다. 팀을 정상권에 올려놓은 이훈재 감독에게 프로팀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은 ‘아직 멀었다’였다.
“아직은 변화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사실 경기를 치르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 당황한 적도 많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직 이곳에서 배워야 할 게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06년에는 개인적으로 좀 더 성숙한 한 해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농구 공부도 많이 하고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지도자. 그래서 하나라도 더 알고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것의 그의 소망이었다.
Profile
1967년 1월 14일생
출신교:남산초-양정중-양정고-성균관대
89년 기아자동차 입단
98년 동양 오리온스
99년 동양 오리온스 플레잉 코치
2001년 동양 선수 은퇴
2001년 금호생명 코치
2004년 상무 농구단 감독 부임
글/ 박상혁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출처 : 점프볼 http://www.jumpball.co.kr/
첫댓글 오랜만에 얼굴 보네요..맨투맨 수비의 극강이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ㅎㅎ
오오~ 반가운 얼굴이네요. 상무팀 감독을 맡고 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