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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편입니다 ㅎㅎㅎ 이번편은 엄청난 스압이니 주의하세요.
15. 재회하는 두 영웅
이렇게 되자 결국 안토니우스는 1월이 지나고 2월이 지나갈 때까지도 출항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됩니다. 어떻게든 출항하려고 해도 폭풍우라는 자연의 방벽이 가로막았고 그렇지 않을때면 어김없이 폼페이우스의 함대에 막혔죠.
이제 드디어 바라던 대로 폼페이우스와 대결할 수 있게 된 카이사르지만 지금은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안토니우스의 2진이 합류하지 않아 1만5천의 병력밖에 없는 상황. 아무리 싸웠다 하면 이기는 무적의 부대라고 해도 4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정면대결은 삼가할 수 밖에 없었죠.
폼페이우스 또한 군대의 사기가 형편없이 떨어져 있는데다 카이사르가 먼저 도착해서 진지를 구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격하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책과 감시탑, 수 많은 장애물로 철저히 방어되는 로마군 진지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폼페이우스가 야만인 부족장들이나 할 법한 진지로 돌격하는 짓을 할 리도 없었고 게다가 카이사르의 부대는 한명한명이 최고의 공병이나 마찬가지라 이 진영 설치마저도 당대에 따라올 부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인 만큼 쳐들어가는 쪽이 무조건 불리했습니다. 게다가 두 진영의 중간에는 압수스 강이 흐르고 있어 쳐들어가려면 먼저 도강을 해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먼저 공격한다는 건 카이사르든 폼페이우스든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한편 아드리아해에서는 폼페이우스의 함대가 점점 더 맹위를 떨쳐서 카이사르가 건너온 후 2달이 다 되도록 안토니우스의 제 2진은 도해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서서히 날이 풀리면 불리한 것은 보급이 단절된 카이사르였습니다. 애가 닳은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도해를 감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도해에 나섭니다. 순풍은 커녕 역풍이었는데도 안토니우스는 일단 출항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배를 띄웁니다.
카이사르는 당초 자신이 점령한 아폴로니아로 상륙할 것을 명했었는데 역풍을 힘차게 받은 안토니우스의 선단은 그리스 북쪽 해안으로 계속 떠밀려가 오히려 폼페이우스 측 진영의 뒷편인 디라키움 근처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둘 모두 안토니우스의 선단이 북쪽으로 떠내려가는 걸 목격했고 바로 그 뒤를 폼페이우스의 선단이 추격하는 것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강한 남풍을 받은 양측의 선단은 모두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손가락만 빨며 기도만 할 뿐, 서로 진영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죠.
결과적으로 머릿속에 '상륙' 이 두 글자밖에 없던 안토니우스는 꼬리에 추격선들을 단 상태에서 집념으로 상륙을 성공시킵니다.
안토니우스의 2진은 상륙하자마자 리수스를 점거하고 카이사르에게 상륙 소식을 전합니다. 이 사실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곧바로 진지를 거두고 행동을 개시합니다. 한쪽은 각개격파를 위해 움직이고 한쪽은 합류를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동시에 진지를 거두고 떠난 두 사람 중 상대적으로 안토니우스와의 거리가 짧았던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쪽으로 먼저 이동하여 매복작전을 펼쳤지만 이 사실을 안 안토니우스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카이사르 쪽으로 전령을 보냅니다. 카이사르는 북동쪽으로 빙 돌아가는 강행군을 감행했고 결국 폼페이우스 군은 이 카이사르의 본대를 놓쳐버립니다.
합류 성공. 3만의 카이사르 정예병력이 드디어 3개월 만에 다시 집결하게 됩니다.
이제 카이사르는 드디어 전면적인 공세를 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엔 폼페이우스가 디라키움 남쪽 제누수스 강 어귀에 진을 치고 카이사르군을 기다립니다. 이제 카이사르가 기다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합류하여 군의 사기도 한껏 오르자 카이사르는 진영에서 나와 폼페이우스 진영 앞에서 전투대열을 형성하고 폼페이우스를 도발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폼페이우스는 진영을 사수하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자 카이사르는 조기 종결을 위해 그리스로 넘어왔건만 다시 내전의 장기화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봄이 되어 날씨도 풀리자 이제 모든 함대를 아드리아 해에 집중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카이사르 군에 대한 보급을 완벽히 차단해 버립니다.
폼페이우스를 전장으로 끌어들이기 쉽지 않음을 느낀 카이사르는 다른 방법을 강구합니다. 앞서 말한 폼페이우스의 약점을 다시 한 번 찌르기로 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곧 진영을 걷고 우회로를 이용하여 디라키움으로 진격합니다. 이 사실을 안 폼페이우스 역시 진영을 거두고 허겁지겁 카이사르를 쫒아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이미 한 발 앞서 디라키움 앞에 도착하여 진영까지 설치한 후였죠.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이번에도 행군이 늦어 한 발 늦게 도착, 결국 육지에서의 보급로는 끊기게 되고 맙니다. 이렇게 보면 폼페이우스군의 행군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사실 폼페이우스 부대의 행군이 느린 편은 아니었습니다. 6만의 대군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빠른 편이었죠. 하지만 카이사르군의 행군속도가 단지 심하게 빨랐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카이사르는 진영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만약 보급로를 탈환하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진영에서 나온다면 그 때 전투를 걸어 승부를 볼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이번에도 폼페이우스는 말려들지 않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해안가에 진영을 설치하고 여봐라는 듯이 배로 디라키움과 진영 사이를 왕복하며 느긋하게 보급품을 수송하여 계속 싫어다 나릅니다. 배가 한 척도 없는 카이사르는 두 눈 뻔히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카이사르는 또 한가지 수를 두게 됩니다. 이 한 수로 인해 디라키움 앞에서 로마 전쟁사 사상 최대의 뻘짓, 위대한 삽질이 펼쳐지게 됩니다.
17. 디라키움 공방전 - 1
폼페이우스 군은 6만의 대군이기 때문에 배로 보급을 부리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 군량의 외부조달을 차단함과 동시에 기병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폼페이우스군의 기동력을 저하시키고자 해안선에 늘어서 있는 폼페이우스 군 진영을 포위하여 가두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되면 폼페이우스군을 해상보급에만 의존하도록 몰아갈 수 있고 자신의 군대는 외부로 돌아다니며 식량을 털어오기 용이하게 되죠. 하지만 병사의 수가 적으니 병력으로 포위는 불가능. 해서 생각해낸게 방벽을 줄줄이 쌓아서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두 군대는 신나는 삽질 경쟁에 들어가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을 가능한 한 좁은 땅에 가두기 위해 방벽을 건설하고, 폼페이우스는 거기에 맞서 가능한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맞은편에 대응방벽을 건설하고 이렇게 어찌어찌 하다보니 결국 양측의 방벽은 서로 마주보고 경쟁하며 무려 26km나 뻗어가게 됩니다.
폼페이우스 쪽은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23km의 비교적 짧은 방벽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카이사르측 방벽은 26km에 달하여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이 엷게 분산되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포위하는 기형적인 형태의 포위전은 이미 갈리아에서 알레시아 공방전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카이사르에게는 어느 정도 자신 있는 방법이었지만....이번 상대는 그때보다 수는 훨씬 적어도 지휘관이 폼페이우스 였습니다.
이렇게 대치하여 시간을 끌게 되자 먼저 식량이 동이 난 건 역시 카이사르 쪽이었습니다. 원래 로마군은 밀과 채소,스프를 주식으로 했는데 카이사르 군은 보리와 고기까지 총동원하여 버티게 되죠. 하지만 카이사르군은 역시 정예부대답게 사기가 전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라' 라는 신종 빵까지 고안해 내죠. 일종의 나무 뿌리인 이것을 캐내어 가루로 빻고 반죽하여 구웠더니 빵이 된 것인데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밀빵을 던지며 조롱해오면 카이사르군은 이 '칼라' 로 만든 빵을 던져 응수하곤 했습니다.
이 '칼라' 로 만든 빵은 폼페이우스의 눈에도 띄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때는 5월에 접어들어 점점 수확기가 다가오게 되죠. 카이사르 군은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밖에서 밀을 수확하여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초조해진 건 폼페이우스였습니다. 디라키움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해상보급으로 사람먹이는 부족하지 않았지만 역시 문제는 말 먹이였습니다. 마초는 부피도 큰데다 장시간 보관이 용이하지 않아 배로 부리는데 한계가 있었죠.
이 시기에 폼페이우스가 가장 믿고 있던 전력은 기병이었습니다. 보병전력은 자신이 불리하다 판단했지만 이 기병전력은 카이사르군에 비해 수에서 7배나 압도하고 있었죠. 아무리 카이사르의 기병대가 용맹한 갈리아족,게르만족 출신에다 숱한 전투감각을 익혔다곤 해도 이 7배의 비대칭 전력이라면 기병만큼은 자신이 유리하다 판단하고 있었죠. 폼페이우스로서는 어떻게든 이 기병 전력을 보존해야 했습니다. 결국 무슨 수를 써서든 목초지로 나가서 말의 배를 불려야 할 판인데 방벽으로 포위되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
폼페이우스는 과감한 한 수를 둡니다.
18. 디라키움 공방전 - 2
지금까지 두달이 넘도록 대치만 하고 있던 상황. 먼저 공세를 펴는 쪽이 불리했지만 기병력의 약화가 더 큰 손해라고 판단한 폼페이우스가 먼저 공세를 취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은근히 디라키움 시내에 카이사르쪽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립니다. 이 소문의 유혹은 너무 커서 결국 카이사르는 포위망의 지휘를 잠시 부관인 안토니우스와 술라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수의 부대를 이끌고 디라키움 시로 향합니다. 하지만 디라키움에서는 도리어 싸움을 걸어왔고 카이사르는 여기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비로소 소문이 함정임을 알아챈 이때, 폼페이우스는 병력을 전면적으로 모두 출동시켜 카이사르군의 포위망을 세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두드립니다.
격렬한 싸움이 하루 종일 펼쳐집니다. 한 쪽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한 쪽은 필사적으로 뚫으려 하는 격전이 계속됩니다. 드디어 날이 저물 무렵, 카이사르의 군대는 결국 폼페이우스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과연 카이사르의 전사들답게 최고사령관도 없이 폼페이우스의 파상공세를 막아낸 것입니다. 폼페이우스로서는 여태껏 말로만 듣고 얼핏 가늠해봤던 카이사르군의 힘을 직접 피부로 실감하게 된 첫 전투였죠.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은 2천명이 사망했고 카이사르군은 사망자는 거의 없고 대신 부상자가 많이 나옵니다. 거의 모든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고 4명의 백인대장이 한쪽 눈을 잃었는데 이 중 한 백인대장의 방패에는 무려 화살구멍이 120개나 뚫려 있었다고 합니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카이사르는 이날만큼은 너무 기뻐서 병사들의 급료도 올려주고 보너스까지 팍팍 뿌립니다. 반면 폼페이우스 진영은 카이사르군의 힘을 절감하며 사기가 떨어졌죠.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낙심하지 않고 또 다시 기회를 기다립니다. 폼페이우스는 군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는 곧바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때마침 카이사르군의 탈영병으로부터 남쪽 포위망의 방어가 느슨한 편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폼페이우스는 이 정보를 당장 활용하기로 결심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새벽에 몰래 자신의 병력의 3분의 2에 달하는 60개 대대 병력을 모조리 남쪽 방벽으로 이동시킵니다. 그리고 우세한 해군력을 활용, 병력을 나눠 배에 태워 측면과 후방에서의 상륙작전까지 감행하죠.
카이사르군 보초가 폼페이우스 군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세 방면에서 적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 이 남쪽방벽을 맡고 있던 9군단 병사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졌고 이 9군단 병사들을 지원하러 군단장 마르첼루스가 몇 개 대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여전히 중과부적, 결국 카이사르가 직접 안토니우스와 1개 군단을 이끌고 서둘러 달려와 겨우 버티게 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겨우 폼페이우스 군을 격퇴하고 남쪽방벽을 보수하고 참호를 파기 시작하는 사이, 폼페이우스는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병력을 물려 방향을 전환하여 북부와 중앙의 모든 방벽을 전면적으로 들이칩니다.
8년간 숱한 전장을 누볐던 무적의 카이사르 전사들이 처음으로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용맹한 게르만 기병들도 등을 보이며 달아났고 카이사르가 직접 기수에게서 깃발을 뺏어들고 병사들을 지휘하기까지 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폼페이우스의 디라키움 돌파로 카이사르는 중무장 보병 1000명과 기병 200기를 잃었습니다. 병사의 손실은 카이사르의 생각보다 적었지만 지휘관급의 손실이 컸습니다. 대대장 5명과 백인대장 32명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죠. 지휘관들이 끝까지 도망가는 병사들을 독려하다 죽었고 병사들은 대부분 도주한 것입니다. 이 결과는 카이사르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카이사르는 이 싸움에서 하마터면 부대가 궤멸될 뻔했지만 역시 최고의 전사들만 모인 부대답게 질서정연하고 빠른 퇴각으로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전력보존에 성공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그리스 중부로 남하합니다. 그리고 지휘관을 버리고 달아난 병사들을 질책하는 연설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패배의 책임은 너희들 탓이다. 나는 전투에 유리한 지형을 너희들에게 주었고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다. 오늘의 패배의 책임은 오판과 우발적인 잘못을 저지른 너희들에게 있다. 하지만 너희들이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면 역전따윈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음 전투를 지켜보겠다."
보통 전투에 패배한 지휘관은 패배를 자신의 지휘부족 탓으로 돌리고 병사들을 다독이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모두 이 말에 수긍하고 수치심을 느껴 다음 전투에서 반드시 만회할 것을 소리높여 맹세합니다. 카이사르는 8년 동안 동고동락한 자신의 병사들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사기를 끌어올린 것입니다. 지휘관과 병사들 모두 범상하지 않았다면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죠.
카이사르는 포위를 풀고 일단 퇴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전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든 도주의 치욕을 만회하려고 투지를 불태울 정도였죠. 비록 퇴각하는 중이지만 카이사르의 전사들은 여전히 싸우기만 하면 자신들이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느꼈을 겁니다. 애초부터 가장 원했던 단 한 번의 전투로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회전을 바랬던 카이사르는 이번에야말로 폼페이우스가 회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카이사르의 예상대로 폼페이우스 군의 지휘부는 흥분하여 온통 카이사르와의 일대결전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몇몇은 폼페이우스에게 겁쟁이라며 비난하기까지 했죠. 카이사르의 전사들 또한 무적이 아니라는게 입증된 지금, 두배가 많은 병력수에 자신감이 붙은 원로원 의원들과 중견급 지휘관들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까지 떠들어대는 수준이었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폼페이우스는 흥분한 이들을 휘어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기호지세를 탄 마당에 또 다시 장기전으로 몰고 간다면 병사들의 사기 또한 형편없이 떨어질 것은 뻔했죠. 그리고 7:1이나 앞서는 기병전력에 자신감이 있던 폼페이우스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일대 회전을 결심합니다. 디라키움에서 철수하는 카이사르군을 쫓은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중부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카이사르군을 맞닥뜨리게 되고 곧 두 군대는 마주보며 진영을 설치합니다.
두 영웅의 운명의 갈림길이자 로마공화정을 폐지시킬 것이냐 존속시킬 것이냐를 결정짓는 운명의 대회전, 파르살루스 회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9. 결전! 파르살루스
이때 카이사르군의 전력은 보병이 2만2천, 기병이 1천기였고 폼페이우스 군은 보병이 4만7천, 기병은 무려 7천기에 달했습니다.
폼페이우스군이 드디어 평야에 진을 치기 시작하자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일장연설을 합니다.
"전우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때가 드디어 찾아왔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은가? 때가 왔다. 이제는 굶주림과 싸우는게 아니라 인간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출동명령을 내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가 대열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양군은 에니페우스 강을 측면에 두고 전열을 꾸렸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3만6천의 병력으로 15만 병력의 페르시아군을 완파한 이수스 회전과 흡사하게 진영을 설치합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5천 기병의 선두에서 달리며 직접 기병대를 지휘하여 적진의 좌익을 돌파하고 본대를 배후에서 들이쳐 반으로 쪼갠 후 곧바로 우회하여 우익까지 박살내는 전법을 썼는데 전투 결과, 페르시아군은 5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고 알렉산드로스군은 전사자가 겨우 200을 헤아릴 정도였죠.
폼페이우스는 양날개에 기병을 배치하는 통상적인 로마식 진형을 따르지 않고 마치 알렉산드로스처럼 기병 7천기를 전부 한쪽 측면에 배치합니다. 카이사르군이 아무리 역전의 용사들이라 해도 무려 4만7천에 달하는 중무장 보병들이 방어대형을 굳힌다면 이 단단한 진형을 일시에 허물어뜨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고 그 사이 7천의 기병이 한 덩어리로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돌파하여 배후에서 들이친다면 아무리 카이사르군이라도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죠.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이 7천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카이사르군을 잘 알고 있는 카이사르군의 전 부관 라비에누스를 기용합니다. 적의 주력을 무너뜨리는 순간 전투는 끝나는 법, 폼페이우스는 4만7천의 중무장 보병이 버티고 있는 사이 기병으로 배후를 들이쳐 카이사르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대의 진형을 허물어뜨리기만 하면 그 순간 전투는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카이사르는 자신이 보유한 중무장 보병들의 우월한 기동성과 경험을 믿고 자신의 보병들에게 폼페이우스 군 보병대를 좌우와 정면 세 방향에서 동시에 들이칠 것을 주문합니다. 보병의 전투력과 전술운용능력이 강할 경우 이 보병만으로도 적을 삼면에서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과거 스키피오가 포에니 전쟁에서 수 차례 보여준 적이 있죠. 하지만 카이사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상대할 대책도 마련합니다.
카이사르는 우선 젊고 민첩한 경무장 보병 400명을 따로 빼서 기병1천기와 혼합시켜 1400명의 보기병 혼성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경무장 보병들을 기병 뒤에 올라타거나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기병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있게 만들었죠.
그리고 40대의 노련한 고참병들 2천명을 따로 빼 별동대를 만듭니다. 한명한명이 모두 역전의 용사들인 이 2천명의 별동대와 1천4백의 보기병 혼성부대가 폼페이우스의 주력인 기병을 무력화시킬 비밀병기였습니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전투개시를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카이사르의 돌격명령이 떨어지며 회전이 시작됩니다. 함성을 지르며 아귀처럼 달려가는 카이사르군의 보병대와 달리 폼페이우스군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양군 사이에는 대략 200여 미터의 거리가 벌려져 있었는데 이 거리를 뛰어가면 자연히 어느정도 지칠 것이고 진형도 약간은 흐트러질 것이라고 내다본 폼페이우스는 보병대에게 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군은 폼페이우스군이 움직이지 않자 곧바로 적의 의도를 간파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거짓말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리며 진형을 다시 정돈합니다.
카이사르군이 거의 폼페이우스군에 이를 때쯤 이미 카이사르군은 전열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숨도 헐떡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질서정연한 대형을 이루며 일시에 돌격해 들어갑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군은 이 돌격을 잘 견뎌냈습니다. 어쨌든 병력의 수에서 우세한데다 방어를 굳히라는 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개전 초반 버티기에 성공합니다.
폼페이우스는 드디어 결판을 낼 때가 왔다고 판단하며 좌익의 기병 7천기에 총출동을 명령합니다. 중무장 보병대가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버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기병이 카이사르의 우익을 돌파하여 배후를 들이치는데 성공한다면 그 순간, 전투는 끝날 것이라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이 시점에서 승리를 확신합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가 카이사르의 우익과 맞닥뜨리려는 찰나, 카이사르군의 우익에 포진해 있던 1천4백의 보기병 혼성부대가 옆으로 피해버립니다. 폼페이우스군의 기병대장 라비에누스는 처음에는 의아해 하지만 어차피 카이사르 본대의 배후를 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기병의 방해가 없어지자 기뻐하며 기병대를 우회시킵니다. 그런데 이 기병대가 우회하려는 그 순간, 기병이 도움닫기를 할 시간을 채 얻기도 전에 카이사르군 2천 별동대가 갑자기 등장하여 라비에누스의 기병대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옆으로 피했던 카이사르군의 1천4백의 보기병 혼성부대가 배후를 차단하며 압박해 들어옵니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변해 폼페이우스의 기병들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 뿐이었고 이 7천기병은 결국 카이사르 별동대의 인간 울타리를 뚫지 못하고 격퇴되어 버립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본 폼페이우스는 그 순간 자신이 패배했음을 직감합니다. 아직 병력의 수는 더 많았지만 주력이 무력화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은 없었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절망하여 전장을 떠나버립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지휘관이 되어 30대에 로마군 총사령관이 되고 40대에 지중해 전체를 평정하고 로마공화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불패의 장군 폼페이우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습니다.
이후 전투의 양상은 일방적으로 전개됩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처리한 이 1천4명의 보기병 혼성부대와 2천명의 별동대가 모두 폼페이우스군의 좌익을 두들기기 시작했고 좌익이 무너지자 그 다음부턴 시간문제였습니다. 중앙과 우익의 중무장 보병은 끝까지 분전했지만 결국 포위당하여 항복합니다.
폼페이우스 군은 전사자 6천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투항하거나 도주하였으며 카이사르군의 전사자는 고작 20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0. 위대한 별이 지다
전장을 떠난 폼페이우스는 남동쪽의 이집트를 향해 도주합니다.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는 폼페이우스의 후원 덕분에 왕위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집트에는 폼페이우스가 과거에 이집트에 파견해 놓은 병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망명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의 잔당들을 해소하려면 폼페이우스의 신병을 확보하는게 관건이라 판단하고 폼페이우스를 쫓습니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로 진군할 때에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를 치러 간다" 고 했고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이러 그리스로 건너갈 때에는 폼페이우스군이 오합지졸임을 강조하기 위해 "군대가 없는 지휘관을 치러 간다" 라고 호언했었는데 이젠 진짜로 군대가 없는 지휘관을 쫓는 격이 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로서는 여유가 있었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구슬려 폼페이우스파 전체를 자신쪽으로 끌어들이고 원로원을 제압하여 로마공화국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통치할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유일하게 군사적으로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만 자신 쪽으로 끌어들인다면 귀찮은 일은 모두 해결되는 셈이었죠.
하지만 카이사르의 계획은 약간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도착하기 나흘 전 먼저 이집트에 도착했는데 항구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마중나온 옛 부하 셉티무스를 보고 안심하여 파라오에게 먼저 모시고 가겠다는 말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몇 명의 부하만 대동한 채 갤리선에서 내려 작은배를 타고 항구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 셉티무스라는 백인대장은 이미 이집트에 정착하고 파라오의 측근이 되어 예전의 충성심이라곤 남아있지 않은 인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배은망덕한 파라오는 전투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를 더 이상 은인이 아닌 귀찮은 망명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전의 승리자인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열한 수단을 강구합니다. 바로 폼페이우스를 죽이기로 결정한 겁니다.
셉티무스는 아무 의심없이 다가오는 폼페이우스를 포옹하는 척하며 칼로 찔렀고 폼페이우스는 결국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간 몇몇 병사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죠.
기원전 48년 9월 28일,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이렇게 비참하게 비명에 갑니다.
나흘 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한 항아리가 전해집니다. 이 향유 항아리에 담긴 폼페이우스의 목을 본 카이사르는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한때는 친구였고 사위였으며 같이 로마의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정치적 동료이자 자신의 유일한 맞수였던 위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하자 감정이 격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21. 위대한 1인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는 로마공화국의 현직 집정관이었습니다. 이 해의 로마공화국의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이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서 로마시민을, 특히 로마의 전직집정관을 살해한 파라오 일당의 행위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카이사르는 파라오의 누이이자 이집트의 공동통치자였던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데 결국 파라오를 몰아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로 세우게 됩니다. 그 후에 소아시아 지역의 분란을 잠재우고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소탕하고 로마의 패권을 재확립하는 등 일련의 일을 모두 마친 후 수도 로마로 개선합니다.
카이사르가 54세 되던 해, 카이사르는 화려한 개선 퍼레이드를 벌이는데 이때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이 외친 구호는 이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카이사르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건 너무하지 않냐고 항의하는 시늉을 하여 수도 시민들을 한바탕 크게 웃게 만듭니다. 하지만 '대머리' 라는 말만은 마음에 걸렸는지 이후에는 항상 월계관을 쓰고 다닙니다. 그리고 앞머리가 후퇴하여 넓어진 이마를 감추려는 하찮은 이유로 쓰기 시작한 이 월계관이 나중에는 로마황제의 상징이 되죠 ㅋㅋ
영광으로 가득찬 54세의 한 해를 보내고 로마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달력을 개조하고 통화를 개혁하고 시민권 제도를 개선하는 등 평민들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국가를 개조합니다. 명실상부 최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장군이자 인기마저 과거의 폼페이우스를 초월한 카이사르는 지금 이 시점,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단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22. 비극, 그 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고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원로원 회의장에는 무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 또한 당연히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부관 안토니우스도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갈 때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자 오랫동안 카이사르의 밑에서 군단장을 지낸 의원인 트레보니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말을 걸었고 둘은 자연스레 카이사르와 떨어졌습니다.
카이사르가 혼자가 되자 비극은 일어났습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갔다가 카이사르에게 용서를 받고 다시 원로원직에 복귀한 의원들이 일제히 카이사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광란에 빠진 의원들이 단검으로 마구 찌른 결과, 카이사르는 총 23군데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습니다.
다른 의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멍하니 있는 사이 이미 일은 끝났고 카이사르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은 그 자리는 공교롭게도 폼페이우스의 석상이 내려다 보는 자리였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들은 거리로 나가 '폭군이 죽었다!' , '자유는 회복되었다!' 라고 외쳤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을 바랐던 건 사실 원로원이나 귀족계급에만 몰려 있었고 평민들은 민중파의 지도자인 카이사르를 사랑하고 있었죠.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군중들은 그의 유해를 태우는 불길을 보면서 새삼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이 분노는 폭동이 되어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졌는데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겁에 질려 로마에서 달아나 버립니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갑자기 세찬 비가 쏟아져 카이사르의 유해를 쓸어가버렸습니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운 재는 그대로 빗물에 씻겨내려가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 강으로 스며듭니다.
이후의 로마는 또 다시 내전에 접어들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부관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결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이미 18살인 옥타비아누스를 지목해 놓고 있었죠. 당시 이 18살의 병약한 어린 청년을 주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카이사르는 이미 이 청년의 자질을 꿰뚫어 보았고 자신의 후계자로 미리 점찍어 두었었죠.
카이사르는 비록 자신이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결국 꿈은 이룬 셈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미 부패한 원로원은 통치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고 시민권자의 수가 400만이 넘어가 거대해진 나라에서 투표로 공직자를 선출하는 건 이제 비현실적이었을 뿐더러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몇일 동안이나 회의를 거듭할 뿐 빠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원로원 체제를 타파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로마공화정을 폐지하고 로마제국의 정치체제를 제정으로 바꾸려 한 것이죠.
이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35세가 되었을 때, 그의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Juilius Caesar Augustus)" 가 됩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로마제국 사상 최고의 정치적 천재이자 지중해 세계 전체에 로마에 의한 평화를 확립,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에 의한 평화)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는 로마제국 초대 황제의 이름입니다.
Civilization IV - Baba Yetu (piano).s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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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 초 스압이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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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
역시최고입니다! 너무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고대???? 급이다보니까 지휘관의 한수 한수가 중요한거같네요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장이나 폼페이우스쪽에서 날카롭게 뚫고 본진을 휘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내요... 숫자가 1-7이었으면 별동대에 인원을 더 투자해서 뚫은 활로를 통해 각개격파쪽으로 갔으면 어땟을런지....
고대전은 확실히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를 가르는 비중이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라비에누스가 마지막에 카이사르군의 별동대를 돌파했다면 승패는 또 달라졌겠죠.
양질의 자료!!!! 최고입니다^^
감사합니다 ^^
매번 정말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재밌는 역사이야기 부탁드립니다!!!
ㅋㅋㅋㅋㅋ 알겠습니다.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항상 잘읽고가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역시 최고bbb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섬멸하고 통일하는 과정도 참 드라마틱하죠 이미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고 ㅎㅎ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의 통일 과정도 써주시면 안될런지...^^ 기대해봅니다 ㅎ
그건 뭐랄까.....전략전술이 후달리는 애들끼리 막싸움이라 제가 재미가 없어서 못 쓰겠어요 ㅜㅜ 대신 다른 거 생각중입니다 ㅎㅎ ^^
햐 ㅎㅎㅎ 잘읽었습니다. ㅎㅎㅎ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ㅋㅋ
으잌ㅋㅋ 감사합니다 ^^ ㅎㅎ 필력이라니요. 그냥 막 쓰는 겁니다.
매번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매번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
팬입니다 ^^ 잘 읽엇습니다.
으잌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
잘읽었습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 ㅋㅋㅋ
여친의 만남보다 더 기대되는 글 잘 봤습니다 ^^
으잌ㅋㅋㅋ 과분한 찬사 감사합니다 ^^ ㅎㅎ
잘 읽었습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3편 모두 정말 잘 읽었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 이후로 다시한번 느껴지는 감동과 재미네요~ :)
으잌ㅋㅋ 과찬입니다 ^^ 감사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엄청나네요.
감사합니다 ㅋㅋ 오랜만에 뵙네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