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ing These stories may make you think it's easy to conquer the world or found a great empire, since it happens so often in the history of the world. And in fact it wasnt'very difficult in earlier times. Why was that?
당신은 당시에 신문이나 우편제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며칠이나 여행해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계곡이나 숲 속 마을에서 땅을 경작하며 살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먼 곳은 이웃부족들이 사는 곳이었다.그리고 대개의 경우 이웃 부족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진 수를 다 써가며 서로를 괴롭혔다. 예컨대 이웃 부족의 가축을 목초지에서 몰아내는가 하면 심지어 상대방 농가에 불을 지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웃 부족들끼리의 약탈과 복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Imagine what it must have been like to have no newspapers and no post. Most people didn't even know what was happening in places just a few days'journey from where they lived. They stayed in their valleys and forests and tilled the land, and their knowledge of the world ended where the neighbouring tribes began. Towards these they were generally unfriendly, if not openly hostile. Each tribe harmed the other the other in whatever way it could, raiding cattle and setting fire to farmsteads. There was a constant tit-for -tat of stealing feuding and fighting.
사람들은 자신들의 좁은 영역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저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수천 명의 낯선 무리가 계곡이나 숲 지역으로 쳐들어오면 이들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낯선 무리가 자신들의 적을 학살하면 그저 즐거워할 뿐 다음 차례는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낯선 무리가 자신들을 죽이는 대신 합류할 것만 강요하는 경우에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리는 점점 더 커졌고, 개별 부족으로서는 아무리 용맹을 부린다 해도 그런 무리를 감당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랍인의 정복 전쟁 때도 그랬고 지금부터 얘기할 프랑크 족의 유명한 왕 카롤루스 대제 때도 마찬가지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라틴어 이름이며 샤를마뉴 대제라고도 불린다.)
All they heard of a world beyond their own small realm were rumours and hearsay. If an army of several thousand men happened to turn up in a balley or clearing , there was little anyone could do. The neighbours thought themselved lucky if theire enemies were slaughtered, and it didn't occur to them that their turn might be next. And if they weren't killed , but were merely forced to join that army and attack theire nearest neighbours, they were frateful enough. In this way armies grew bigger and a tribe on its own would find it more and more difficult to resist, no matter how bravely it did CHarlemagne, the famous king of Franks, whose story you are about to hear.
당시에는 정복이라는 것이 오늘날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통치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통치를 제대로 하려면 사방의 외딴 지역까지 사신을 보내야 했으며 서로 다투는 부족들을 화해시켜 묵은 원한이나 복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야 했다.훌륭한 통치자가 되려면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사는 농부들을 도와주고 또 학문의 연구 및 그 보존과 전승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당시에 훌륭한 통치자란 한 가정의 아버지처럼 백성을 보살피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도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If couquest was easier than it is today, ruling was much harder. Messengers had to be sent to distant and inaccessible places, made to look beyond their old enmities and blood-feuds. If you wanted to be a good rulere you had to help the peasants in theire misery, and you had to see that people learned something, and that the thoughts and writings of the past weren't lost and fogotten. All in all, a good ruler in those days had to be a sort of father to the vast family of his subjects, and make all their decisions for them.
카를루스 대제가 바로 그런 통치자였다. 우리가 그를 "위대한 황제"란 의미로 "대제"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메로빙거 왕조의 사령관으로 프랑크 왕국을 아랍인들로부터 지켜 냈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바로 그의 조상이었다. 사실 메로빙거 왕조는 그렇게 품위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길러 멋이나 부리고 옥좌에 앉아 재상들이 써 준 연설문을 달달 외워 말하는게 고작인 사람들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나 백성들의 민회에 참석할 때도 이들은 말을 타지 않고 농부들처럼 황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실제로 나라를 통치한 것은 다른 유능한 가문이었고, 카롤루스 마르텔이 바로 이 가문 출신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인 피핀 역시 이 가문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피핀은 다른 사람을 위해 연설이나 써 주는 재상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권에 걸맞은 지위, 즉 왕위를 원해서 메로빙거 출신의 왕을 폐위시키고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를 포괄하는 나라였다.
This was the sort of ruler that Charlemagne was, and it is why he is rightly called "the Great"(THe Latin word magnus means "great" He was a grandson of Charles Martel, the commander who drove the Arabs out of the Merovingian kingdom of the Franks
하지만 당신은 당시의 프랑크 왕국이 관리와 치안 조직을 갖춘 견고한 나라, 예컨대 로마 제국에 비견될 만한 나라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아직 독일 민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다른 방언을 쓰고 다른 풍습과 관습을 지녔으며 그리스의 도리아 인과 이오니아인처럼 서로를 싫어했던 여러 부족이 살았을 뿐이다.
부족들의 우두머리, 즉 족장은"헤어초크"라 불렸다. 독일어로 "헤어"는 무리나 군대를 뜻하고"초크"는 진군이란 뜻과 연관이 있는데, 족장이 전쟁에서 무리의 선두에 나섰기 때문에 이 같은 명칭을 얻었다. 나중에 가서 "헤어초크"는 귀족 지위 중에서 "공작"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그런데 독일에는 이런 부족단위의 공국이 몇개 있었다. 바이에른 공국과 슈바벤 공국, 알레만 공국 등이 그 예로, 이중 가장 막강한 부족은 프랑크 족이었다. 다른 부족들은 프랑크 족을 위해 종군할 의무가 있었다. 다시 말해, 전쟁이 나면 프랑크 족의 편이 되어 싸워야 했다. 카롤루스 대제의 아버지인 피핀이 통치하던 시대에 플아크 족은 이런 총사령권을 지녔기에 우세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는 768년 왕위에 오르자 이러한 군사적 힘을 최대한 활용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먼저 프랑스 전역을 정복하고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이탈리아는 게르만 족 대이동의 시대에 랑고바르드 족이 차지한 지역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랑고바르드 족의 왕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지배권을 로마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 대제는 평생동안 자신을 교황의 수호자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이탈리아를 정복한 카롤루스 대제는 이제 에스파냐까지 진출해서 아랍 인들과 싸웠지만 여기서는 곧 후퇴했다.
왕국이 이렇게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었으니 이제 남은 곳은 동쪽이었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 해당하는 동쪽 지역은 당시 훈 족과 아주 유사한 동방의 기마 부족인 아바르 족의 지배를 다시금 받고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아틸라 같은 강력한 지배자가 없었다. 아바르 족은 언제나 진영을 원형 장벽으로 둘러싸서 쉽게 뚫고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군대는 오스트리아에서 8년 동안 싸운 끝에 아바르 족을 철저하게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훈족이 그랬듯 아바르 족은 침략해 오면서 다른 민족도 함께 끌고 왔다. 이들이 바로 슬라브 족이었다. 슬라브 족도 나름대로 왕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프랑크 왕국보다는 훨씬 불안정하고 야만적인 상태에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들과도 전쟁을 치른 끝에 일부는 종군시키고 일부는 해마다 공물을 바치게 했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그 과제란 모든 독일 공국과 부족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어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하는 일이었다.
당시 독일의 동부 전체는 아직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게르만 부족들처럼 사납고 호전적인 작센 족, 즉 색슨 족이 살고 있었다. 작센 족은 여전히 이교도였고 크리스트교에 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트교도의 수장을 자처했던 카롤루스 대제는 이슬람교도들과 사고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인간에게 신앙을 강제할 수 있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는 작센 족의 족장인 비투킨트와 싸움을 벌였다. 작센 족은 굴복했지만 기회가 나자 다시 반격해 왔다. 카롤루스 대제도 군대를 돌려 작센 족의 땅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떠나자마자 작센 족은 다시금 그의 통치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들은 카롤루스 대제에게 복종하여 전쟁에 동참했으나 갑작스레 방향을 돌려 대제의 군단을 공격했다. 결국 카롤루스 대제는 무시무시한 재판을 열어 작센 족을 4000명 이상 처형했다. 이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이들이 사랑의 종교를 사랑하기까지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제 진실로 막강한 사람이 되었다. 이미 말했듯, 그는 정복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도 잘하고 백성도 돌볼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교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스스로도 일생 동안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어 못지 않게 라틴어도 잘했고 그리스 어도 이해했다. 그는 말하기를 즐겼으며 목소리도 말고 분명했다. 그는 고대의 모든 학문과 예술을 익혔으며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온 학식 있는 수도사들에게서 웅변술과 천문학도 배웠다. 하지만 펜으로 유려한 글자를 쓰기보다는 칼을 휘두르는 데 더 익숙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승마 사냥과 수영을 무척 즐겼으며 대개는 아주 간소한 옷차림이었다. 평소에는 삼베 셔츠에 화려한 비단 줄무늬가 있는 겉옷을 입고 각반으로 묶는 바지를 입었으며 겨울에는 모피 옷을 입고 파란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금이나 은 손잡이가 달린 칼을 늘 차고 다녔다. 의식이 있을 때만은 금실을 짜 넣은 예복에 보석 박힌 구두를 신고 금줄로 장식한 망토를 거쳤으며 금과 보석이 박힌 왕관도 썼다. 건장하고 키가 훤칠한 왕이 이렇게 차려입고 아헨의 궁전에서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 사신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슬라브 족의 여러나라 등 그의 왕국에 속하는 모든 곳에서 왔다.
대제는 영토 각지에 관해 상세한 보고를 올리게 했으며 왕국 전역에서 수행되어야 할 일을 꼼꼼히 결정했다. 그는 재판관을 임명하고 법률을 수집케 했으며 또한 누가 주교로 임명되어야 할지를 결정했고 심지어 식료품 가격도 책정했다. 대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는 독일 민족의 융화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몇개의 분리된 공국을 지배하기 보다는 하나의 통일된 왕국을 만들고 싶어 했다. 바이에른의 타실로 공작처럼 이에 반감을 갖는 사람은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당신이 이 자리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게르만 부족의 언어를 가리키는 단어가 이때 처음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즉 프랑크어, 바이에른 어, 알레만 어,작센 어 등이 이때부터 "티우디스크"라고 총칭되었는데, 오늘날 독일어를 뜻하는 "도이치"라는 단어도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적인 것이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두었던 카롤루스 대제는 게르만 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영웅 서사시도 기록하게 했다. 후일 디트리히 폰 베른이라고도 불린 테오도리크와 훈족의 왕 아틸라 그리고 용과 싸워 이겼지만 교활한 하겐의 칼에 찔려 죽은 지그프리트에 관한 서사시였다. 하지만 당시 기록되었던 서사시는 소실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로부터 400년 후에 다시 기록된 이야기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자신이 독일인의 왕일 뿐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로서 모든 크리스트교도의 보호자라 생각했다. 로마 교황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가 여러 차례나 교황을 랑고바르드 족으로부터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롤루스가 서기 800년 성탄절 전야에 로마 대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에서 기도를 올릴 때 교황이 갑자기 다가가 그에게 관을 씌워 주었다. 그러고 나서 교황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카롤루스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제국의 평화를 위해 신이 임명한 새로운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롤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해 오는 얘기에 의하면 카롤루스 자신도 이 계획을 몰랐기 때문에 몹시 놀랐다고 한다. 이제 그는 훗날 역사에서 언급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옛 로마 제국의 권세와 위대함을 회복시켜야 했다. 다만 이제는 이교적인 로마 인 대신 크리스트교를 믿는 게르만 족이 지배자가 되어야 했다. 게르만 족이 크리스트교의 영도 세력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카롤루스 대제의 계획이자 목표였으며 이 독일 황제의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에 근접한 것은 카롤루스 치하에서뿐이었다.세계 각지에서 사신들이 몰려와 카롤루스 대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강력한 동로마 제국 황제만이 그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아랍인들의 지배자 하룬 알라시드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동화에도 흔히 등장하게 된 하룬 알라시드는 고대 도시 니네베 근방에 있는 바그다드의 아름다운 궁전에 살았다. 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사절단을 보내 값비싼 보물과 호사스러운 예복, 진귀한 향로, 코끼리 한 마리를 선사했다. 그 밖에 물시계도 선사했는데 그렇게 화려한 기계장치는 프랑크 왕국에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또한 하룬 알라시드는 강력한 황제 카롤루스를 위해 크리스트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무덤까지 아무런 장애 없이 순례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전해 왔다. 당신도 물론 기억하겠지만 당시 예루살렘은 아랍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Charlemagne's mission was to restore the might and grandeur of the old Roman empire. Only this time, instead of heathen Romans, the rulers would be Christian Germans, who would become the leaders of all Christendom. This was Charlemagne's aim and ambition, and it would long be that of German emperors who came after him. But none came as close to acheiving it as he did. Envoys from all over the world came to his court to pay him homage. The mighty emperor of the Roman Empire of the East in Constantinople was not the only one anxious to be on good terms with him. So was the great Arab prince, Caliph Harun al - Rashid, in far - off Mesopotamia. From his fabulous palace in Baghdad, near ancient Nineveh, he sent precious gifts to Charlemagne: sumptuous robes, rare spices and an elephant, and a water clock with the most amazing mechanism , unlike anything seen before in the kingdom of the Franks. For Charlemagne's sake, Harun al- Rashid even let Christian pilgraims visit christ's tomb in Jeruealem, unhindered and unmolested. For Jerusalem was at that time under Arab rule.
이 모든 것은 새로운 황제의 지혜와 의지력 그리고 탁월한 자질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사실은 서기 814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실히 드러났다. 애처롭게도 모든 것이 단숨에 스러져 버렸다. 제국은 한동안 카롤루스의 손자 세 명에 의해 통치되다가 곧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로 분열되었다.
All this was due to the intelligence, energy and undoubted superiority of the new emperor, as rapidly became clear after his death in 814 when, sadly, it all fell apart. Soon the empire was shared out separate kingdoms: Germany, France and Italy.
일찍이 로마 제국에 속했던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로맨스 어인 프랑스 어와 이탈리아 어를 사용했다. 분열된 세 나라는 두 번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분열된 세 나라는 두 번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의 공국들도 동요를 보이더니 다시금 자주권을 확보했다. 슬라브 족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마자 제국과 절연하고는 최초의 위대한 왕 스바토플루크의 영도아래 막강한 제국을 건설했다. 카롤루스가 독일에 세웠던 학교는 모두 허물어졋고 읽기와 쓰기는 여기저기 흩어진 수도원에서나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바이킹이라고 불린 북방의 게르만 부족들, 즉 덴마크 인과 노르만 족은 해적이 되어 해안 도시들을 마구 약탈했다. 이들은 거의 무적이었다. 이들도 오늘날의 러시아와 프랑스 해안 사이에 왕국을 건설했다. 이들 노르만 족의 이름을 따서 프랑스의 한 지역은 오늘날 노르망디라 불린다.
In the lands that had once belonged to the Roman empire, Romance languages continued to be spoken - that is, French and Italian. The three kindoms would never again be united. Even the German tribal duchies rebelled and won back their independence. On Charlemagne's death , the Slavs poclaimed themselves free, and gounded a powerful kingdom under their first great king, Svatopluk. The schools Charlemagne had founded disappeared, and the art of reading and writing was soon lost to all but a handful of far - flung monasteries. Intrepid Germanic tribes from the north,the Danes and the Normans, mercilessly pillaged and plundered coastal cities in their coastal cities in their Viking ships. They were almost invincible. They founded kingdoms in the deast, among the Slavs, and in the west on the coast of what is now France, where Normandy still bears thier name.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신성 로마 제국은 그 다음 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Before the century was out, the Holy Roman Empire of the German Nation, CHarlemagne's great acjievement, was no more. Not even the name remain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