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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25일
나훈아, 괴소문 해명 기자회견
괴소문에 시달려 온 나훈아는 2008년
기자회견을 열어 시중에 떠도는 루머가 모두 근거 없 는이야기라고 주장.
일본 폭력조직과 관련해 신체특정 부위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았다는 루머였는데, 나훈아는 기자회견장 테이블 위로 올라가 바지 지퍼를 반쯤 내리는 해프닝을 연출
하기도.
▶2011년' 이데올로기의 종언' 석학 다니엘 벨(Daniel Bell) 타계
▶2010년 바그다드, 연쇄 폭탄테러 발생
▶2009년 군포 실종 20대 여성 살해 용의자 검거
▶2008년 나훈아, 괴소문 해명 기자회견
▶ 2003년 인터넷 대란 `웜바이러스` 침투
▶2003년 대만, 한국에 대해 입국비자 면제
▶1999년 콜롬비아 지진
▶ 1990년 미국 영화배우 에바가드너 사망
가드너[Gardner, Ava (Lavinia), 1922.12.24~1990.1.25] 미국의 영화배우.
19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스미스필드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때 뉴욕으로 가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특출한 미모 덕분에 MGM(Metro-Goldwyn-Mayer Inc: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사)과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주로 단역을 맡다가 《살인자들 The Killers》(1946)에서 버트 랭커스터(Burt Lancaster)의 상대역을 맡아 단숨에 스타덤에 뛰어올랐다.
이어 《헉스터 The Hucksters》(1947), 《원 터치 오브 비너스 One Touch of Venus》(1948), 뮤지컬영화 《쇼보트 Show Boat》(1951),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1952), 《맨발의 백작부인 The Barefoot Contessa》(1954) 등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허스키한 목소리와 매혹적인 자태로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섹스 심벌'로 꼽혔다.
이후 《모감보 Mogambo》(1953), 《보와니 정션 Bhowani Junction》(1956), 《온 더 비치 On the Beach》(1959), 《이과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1964) 등에서는 성격배우로 열연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모감보》에서는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의 상대역을 맡아 1953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1958년 MGM을 떠나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배우 미키 루니(Mickey Rooney), 밴드 리더 아티 쇼(Artie Shaw),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세 번 결혼했으며, 《애바, 나의 이야기 Ava, My Story》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89년 헌법재판소 첫 위헌 결정
헌법재판소가 1989년 1월 25일 첫 위헌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1988년 9월 1일 재판소가 발족한 이래 첫 결정이며, 위헌 판결로서는 지난 1971년 당시 법률위헌심사권을 갖고 있었던 대법원이 국가배상법 2조1항에 대한 판결을 한 이래 18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날 위헌으로 결정한 헌법은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는 재산권의 가집행청구를 할 수 없다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의 제6조1항 단서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 는 내용이었다. 이 결정으로 특례법 9조1항 단서조항은 즉시 효력을 상실케됐고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판결때도 가집행 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날의 판결은 9명의 재판관 전원일치로 결정됐다.
▶1981년 김철호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프로복서 김철호 선수가 1981년 1월25일 슬럼프에 빠진 한국 프로복싱계에 활력소가 될 영광의 새 챔피언 밸트를 안겨주었다. 김철호는 남미 베네수엘라 샹크리스토발시 특설링에서 벌어진 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를 맞아 9회 중반 한방의 왼주먹으로 캔버스에 누임으로써 통쾌한 KO승을 거두었다.
경기장에 모인 2만여 관중들은 오로노의 압승을 확신했으나 오로노가 9회 중반 김철호의 펀치를 맞고 쓰러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 이날 경기에서 오로노측이 김의 펀치가 벨트라인 아래를 때렸다며 항의했으나 주심은 벨트라인 위였다고 판정, 오로노측의 항의를 일축시켰다. 프로 경력이 2년밖에 되지 않은 김철호의 통쾌한 쾌거였다. 이날 경기로 김철호는 15승(7KO)1무1패를 기록하게 됐다.
▶1981년 중국 급진 문혁파 `4인방`에 사형 판결
모택동 사후 섭검영, 화국봉 등과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중국 4인방에 대한 판결이 1981년 1월 25일 내려졌다. 강청과 장춘교는 사형(2년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왕홍문은 무기 징역에 `정치 권리` 종신 박탈, 요문원은 징역 20년, 정치 권리 박탈 5년이 선고됐다.
1981년 1월 25일, 최고인민법원법정은 모택동의 미망인인 강청(가운데)등에 사형을 판결했다
법정에서 왕홍문은 기소 사실을 전면적으로 인정했다. 요문원은 법정에서 응수할 때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신경을 썼지만 죄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장춘교는 끝까지 완전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강청은 사형 판결을 언도받자 `혁명 무죄!`라고 외쳤다. 강청은 병 때문에 보석중이던 1991년 77세로 자살했고, 왕홍문은 57세 때인 1992년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장춘교도 사망했으나 공식 발표는 없었고, 요문원은 1996년 6일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다.
이들 4인방은 모택동 사후 한달도 채 안된 1976년 10월 6일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혐의로 반(反) 4인방파에 체포됐다. 1976년 4월의 제1차 천안문 사건 이후 급진파 4인방과 당 제1부주석 겸 수상 화국봉, 당부주석 섭겸영 등과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모택동 사후 4인방은 고립돼 있었다. 그런 와중 강청 등이 ‘강청 당주석, 장춘교 수상’계획을 준비하던 중 화국봉과 섭검영 등이 이를 사전에 알고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1980년 11월 2일 기소됐다.
▶1981년 정부, 비상계엄 전면 해제
▶1980년 수경사 보통군법회의, 명동 위장결혼식 불법집회사건의 윤보선에 징역2년, 함석헌에 징역 1년등을 선고
▶1980년 이란 첫 대통령선거, 초대 대통령에 바니 사드르 당선
▶1977년 북한, 한국의 불가침협정제의를 거부하고,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
▶1973년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한성호 침몰 (사망, 실종 61명)
▶1971년 우간다 군부쿠데타 발생, 아민 집권
▶1970년 신민당, 한국독립당 흡수
▶1969년 미국-월맹, 파리평화회담 처음 개최
▶1965년 제2한강교 개통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긴 제2한강교가 1965년 1월 25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참석하에 개통됐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영등포구 당산동을 연결한 길이 1천1백28m, 넓이 18m의 이다리는 1962년 6월 20일 에 착공한지 만 2년6개월 만에 개통해 수도 서울의 `제2의 남문`이 됐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제1한강교로부터 김포, 인천, 영등포 방면을 다닐 때 보다 약3km, 20분간 단축되며, 전략상으로도 서부전성에서 도심지를 통하지 않고 약6km 48분간이 단축되며, 자동차 연료가 연간 약5천드럼이 절약되는 동시에 확장되는 서울의 도시계획상 서교동 영등포지구에 위성도시를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총공사비 5억1천4백만원, 연17만명의 인부가 동원된 제2한강교는 현대식 오픈형. 입체교차로 시설로 어떤 방향에서나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고, 양쪽난간에는 4백와트의 수은등 88개를 가설했다.
▶1964년 판문점에서 관광객 2명 납북 사건(1명 자진, 1명 피랍)
▶1957년 캐시미르 신헌법 발표. 인도에 편입
▶1957년 일본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사망
▶1956년 국회 국방부원면사건 조사결과 발표(군월동용FOA 원면 50만불어치 시중유출)
▶1954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 베를린 회의
▶1949년 소련과 동구5개국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창설
▶1947년 전설적 갱스터 알 카포네 사망
20세기 초, 27살의 나이로 시카고 제1의 갱스터 자리에 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카고 제 1의 갱스터 알 카포네. 그가 1947년 1월 25일 왼뺨에 난 칼자국 흉터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삶을 뒤로하고 짧고도 굵었던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전설적인 갱스터’ㆍ‘스카페이스(Scarface)’라고 부르지만, 1899년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 여느 아이들과 별다를 바 없이 조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14세 때 범죄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자신이 살던 가필드의 갱스터 조니 토리오를 만나게 된다. 토리오는 왜소한 신체의 남자였지만,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직연합능력과 관리능력, 교묘함 등을 일찍부터 터득한 갱스터였다. 1909년 시카고로 거점을 옮긴 토리오는 1919년 카포네를 시카고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20년에 금주법이 실시되자 토리오는 밀주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내 라이벌 갱단에 의해 살해당한다.
1925년 토리오의 뒤를 이어 조직을 이끄는 보스가 된 그는 ‘스카페이스’라는 악명에 어울리는 잔인함과 교묘함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밤의 대통령, 암흑가의 황제로 불리며 700명의 조직원을 이끌던 카포네는 법위에 군림했으며 대중들에게 인기도 높았다.
그의 폭력성은 1929년 2월 14일 당시 시카고의 라이벌 조직이었던 아일랜드계 오바니온가의 조직원들을 암살하기 위해 벌인 세기의 유혈극 ‘성 발렌타이데이 습격사건’ 에서 정점에 달했다. 폭력을 자선사업이라는 교묘한 술책으로 덮어보려했던 그였지만, 이 사건으로 무소불위의 그의 시대도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시카고 검찰이 알 카포네를 제1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탈세혐의로 그를 법정에 세우기 위한 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는 1931년 6월 연방소득세 위반으로 기소돼 10월에 11년형과 8만 달러의 벌금과 소송비용을 부과받았다. 이로써 그의 화려했던 갱스터 인생도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알 카포네는 자신의 옛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매독 증세로 1939년 가석방됐으나 모든 것을 잃은 채 매독말기 증세로 병원을 오가다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해변에서 초라한 최후를 맞았다.
▶1930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9년 독립운동가 이의준 선생 순국
▶1925년 총독부, 1면1학교 계획 시달
▶1924년 제1회 동계올림픽 개막(프랑스 샤모니)
ㆍ7개 종목 16경기로 단출하게 치러
프랑스 남동부 몽블랑 기슭에 위치한 휴양도시 샤모니는 동계올림픽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1924년 1월25일 이 도시에서 제1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공식 대회 명칭은 ‘국제 겨울스포츠 주간’으로 그 해 파리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그 이전까지 국제적인 규모의 겨울 스포츠 대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스하키와 피겨스케이팅 두 종목이 하계올림픽에 포함돼 있는 실정이었다. 12일간 열린 샤모니 대회는 독자적인 겨울스포츠 대회의 가능성을 타진한 실험무대였던 셈이다.
7개 종목 16경기로 단출했던 대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예상을 깨고 큰 인기를 끌었다. 유료 관람객이 1만명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흥행대박이었다. IOC는 이에 자극받아 이듬해 하계올림픽과 별도로 동계올림픽 대회를 창설한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IOC는 샤모니 대회를 제1회 동계올림픽 대회로 인정했다.
유럽 14개국과 북미 2개국의 258명이 참가한 이 대회는 개막식부터 진풍경을 연출했다. 선수들은 개막식에 각자 종목에 해당하는 의상을 입고 스키, 스케이트 등의 장비를 어깨에 맨 채 입장했다. 정식 올림픽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 선서나 성화도 없었다.
진기록은 아이스하키에서 나왔다. 지금도 세계최강으로 군림하는 캐나다 팀이 주인공이다. 캐나다 팀은 아이스하키 4경기에서 전승을 거둬 금메달을 땄는데, 4경기 성적이 122득점·3실점이었다. 이 대회는 메달 수여식이 따로 없었다. 모든 메달이 폐막식 때 주어졌다. 그 까닭에 대회 도중 귀국한 메달리스트는 나중에 동료 선수를 통해 메달을 전달받았다.
이 대회가 낳은 스타는 소냐 헤니라는 11세 금발 소녀였다. 피겨 스케이팅에 출전한 노르웨이 출신 헤니는 최연소 선수인 데다 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빙판에 등장해 시선을 끌었다. 피겨 스케이팅의 전통 복장은 길이가 긴 스커트였는데 헤니가 이런 통념을 깬 것이다. 헤니의 성적은 최하위였다. 하지만 그는 1928년 이후 동계올림픽에서 3번 연달아 우승하고, 10차례나 유럽 챔피언에 오르는 등 전설적 피겨 스타가 됐다. 미국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드’는 ‘20세기 여성 운동선수 100인’에 그의 이름을 올리면서 “피겨 스케이팅을 여자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운동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15년 미국, 대륙횡단 전화회선 개통
▶1907년 러시아, 만주철병 선언
▶1888년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출생
▶1886년 한성주보 발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갑신정변`으로 폐간된지 14개월 만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신문의 효시라고 볼 수 있으나 전 지면이 한문으로 인쇄되었고 정부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여 주사 사사 등 중급관리가 기자가 되고 인건비 제작비 등도 국비로 추렴했다는 점에서 `관보`의 테두리를 멀리 벗어날 수 없었다.
한지책자형의 양절(兩折)로 인쇄된 이 신문은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의 주간지였으며, 최초로 1886년 2월 22일자부터 상업광고를 실었다. 독일의 상사인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적된 적자 운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1888년 7월 박문국의 폐쇄와 함께 폐간됐다.
▶ 1882년버지니아 울프 출생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잘못 지어진 제목이었다
울프는 사실 작품보다 그 생애 때문에, 특히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그로 인해 생겨난 일종의 전설, 또는 편견은 아직까지도 그녀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나오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의 옷자락을 생각한다”는 서두라든지,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저자가 유학 시절에 만난 아사코라는 일본인 소녀와 재회해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고 회고한 대목이 아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또 하나의 계기는 바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라는 제목의 희곡, 그리고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한 영화다. 그런데 이 희곡은 사실상 ‘버지니아 울프’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다. 저자인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가 원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크고 못된 늑대가 와도 안 무섭거든?”(Who's Afraid of Big Bad Wolf?)이라는 노래를 작품 속에 사용하면서 아예 제목도 그렇게 지으려 했다. 그러나 디즈니측의 반대에 부딪치자 ‘빅 배드 울프(크고 못된 늑대)’를 발음이 비슷한 ‘버지니아 울프’로 바꿔 버린 것이다. 올비는 버지니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레너드에게 허락을 얻었다고 하지만, 버지니아가 살아 있었다면 과연 이런 제목을 마음에 들어 했을까? 물론 올비의 희곡 역시 나름의 걸작이지만, 그 작품이 버지니아의 ‘전설’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어딘가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버지니아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명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과연 무슨 말들을 할까.”(1932년 2월 4일자 일기 중에서)
▶1874년 영국 작가 서머셋 모옴 출생
▶1793년 실학자 이덕무 사망
▶1759년 `올드랭사인`의 작곡가이자 시인이었던 로버트 번스 출생
▶1627년영국 물리학자 로버트 보일 출생
https://youtu.be/f6N4BQE5uj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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