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바람이 걸어오다
이경은
바람이 그림을 뚫고 뛰쳐나온다.
변시지*의 바람이 불어온다. 거센 바람으로 휘 구부러진 나무에 기댄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이 뭍을 향하지만, 끝내 닿지 못할 듯 애절하다. 참다못한 제주의 바람이 드디어 땅에 닿고, 태평양을 넘어 저 먼 우주로까지 바라보라고 부추긴다. 세상은 제주가 다가 아니라고, 제주 그 너머의 세상도 기다리고 있다고, 잠시 잊어도 괜찮고, 두 손에서 내려놓아도 변하는 건 없다고.
그리 말해 봐도 가슴에 박힌 고통은 놓아지지 않는다. 사람의 등이 굽고, 나무가 굽고, 초가집과 말마저 등줄기가 줄어들지언정 떠나지 않는다. 제주를 버리지 못한다. 그토록 그리운 것들이 저 바다 건너 땅에 있을지언정 그저 그리움만 가슴에 품고 살자고 작정한다. 세상의 어떤 사랑도 제주를 넘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며, 그 땅을 그리는 일이 목숨을 넘어선다.
드디어 제주의 바다가, 들이닥친다.
바다 밑바닥까지 뒤집어엎을 태세이더니 이내 물길을 잡아 가라앉힌다. 녹청색의 그 바다 물빛이 마음을 달래준다. 살살 달랜다. 제주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숭숭 난 구멍을 메워준다. 얼마 전 다녀온 오키나와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온다. 그곳에서 발아된 내 안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나를 건드린다. 같은 섬이고, 깊은 상처를 입은 땅이다. 고립된 섬에서 사람들의 삶이, 마음이 위리안치라도 당한 듯 굳게 닫혀 있다.
4·3 공원의 조각상을 어루만지며 진혼곡을 속으로 부르며 달래었다. 나는 모차르트의 <라크리모사> 슬픔의 날을 떠올리며, “저들을 가엽게 여기소서.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조각상만 어루만졌다.
“정말 황량하고 고독한 그런 곳을요. 그러다가 황량한 내 마음을 찾아내어
둥지를 틀었지요. 그 빈 가슴 속에….”
-괴테의 서동 시집 중 「사랑의 서」에서
저 한 구절에 의지해 떠난 여행이다. 3개월 동안 책을 쓰면서 많은 이야기와 사람들을 책 속에서 만났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때쯤에는 이야기들이 목까지 차올라 구토에 시달렸고, 세상에서는 자꾸 헛발만 내디뎠다. 글이 내 목을 쥐고 밥이 넘어가는 걸 막았고, 몸은 책 속의 세계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같았다. 도망가야 했다. 어디로든….
황량해지고 싶다. 황량한 땅으로 가자. 황량한 내 마음을 데리고 잠시라도 피하자. 생각한 대로 황량하고, 건조하고, 느리고, 탄성을 지를 경치가 없어서 그저 멍하니 있으면 되는, 마음마저 황량해져서 편하고 좋은 그런 땅. 나는 오키나와섬을 골랐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오키나와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한 오에 겐자부로. 그가 쓴 『오키나와 노트』를 읽고 와서인지, 도시가 무겁고 깊게 다가온다. 아무도 본토의 오키나와에 대한 시선과. 외침, 울분을 표현하지 않을 때 용감하게 쓴 작가이다. 존경스럽다. 작가란 꼭 봐야 할 것을 지나쳐도 안 되지만, 써야 할 것도 꼭 써야 한다. 그게 바로 작가의 눈이고, 용기이며, 힘이다.
이 도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매우 조용하고, 자존심이 큰 것 같다. 의욕이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다. 수줍음과 미숙한 느낌마저 든다. 미군과 본토에서의 차별과 억압, 소외감은 그들을 큰 소리로 말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눈치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는 법을 먼저 배운 듯하다. 어딘가 움츠러들었다. 따스한 곳이라는 것과 달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세서 그랬을까.
눈만 돌리면 바다가, 또 돌아보면 자위대와 미군기지, 부속품인 빌리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알고 갔어도 등줄기와 머리끝이 서늘하다. 우에마 요코의 『바다를 주다』를 읽으며 나는 떨리는 가슴을 내려놓지 못했다. 절실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절실한 나머지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출렁댔다.
두 개의 섬에 내 섬을 얹혔다.
섬은 고립된 것 같지만, 그 반대로 사방이 틔어 있는 형체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붙드니 어디로든 가지 않고 떠나지 못한다. 제주의 바다가 오키나와에 닿고, 절실한 마음에 대한 절실함이 서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두 섬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착잡해진다. 나의 섬은 어쩌랴. 그 안에 부는 광풍을, 거세고 거친 바람을, 소리 내지 못하는 무음의 바람을 어느 주머니에 담아야 할까. 아니 어디로 날려 보내야 할는지….
그때 바람이 불지 않고, 걸어왔다.
*
변시지 화백(1926~2013). 제주 출생의 서양화가. 제주의 바다와 바람과 말을 그린 ‘폭풍의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