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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스크랩 천불동의 가을 / 이시은
풀꽃 추천 0 조회 46 08.10.09 17:5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천불동의 가을

                                                                                               글 / 이시은


 

 천불동의 가을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비선대에서 양폭산장까지 이어지는 천불동 계곡은 천 개의 불상모습이 있다하여 천불동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깎아지른 듯한 화강암으로 이어진 산새마다 절묘한 형상으로 앉아 있는 모습은, 인간의 힘이 닿을 수 없는 경외의 경지를  담고 있었다. 오색으로 타오르는 단풍과 억겁의 세월 동안 깎이어 다듬어진  소에는 맑은 계곡 물, 때 묻은 가슴을 하얗게 씻어 포개어 놓은 듯한  화강암 덩어리의 바위산, 이것들이 어우러져 있 기에 나도 몰래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더 높은 곳을 정복하고 나면 낮은  곳은 더 낮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까. 하루 전 주정골을 오르면서 아름다움에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러나 천불동 계곡의 비경이 단풍으로 절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며, 어제의 감탄사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갔다.


 산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녹음 무성한  여름 산이 진정 산의 모습이 아닐까. 그럼에도 굳이 가을 산이 절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비단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만은 아니었다. 벌써 불혹의 나이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청장년기의 활기참보다, 인생의 마지막을 곱게 장식할 줄 아는 가을 산의 모습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비선대에서 양폭까지의 산행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절벽을 이루고  있어 바라만 보아도 아득한 철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이렇듯 아름다운 비경도 편히 뒷짐지고 서 있는 자에게는 한낱 그리움의 대상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힘겹게  산을 올랐다.


 겨우 한 사람이 내려오고서야 다른 사람이 오를 수  있는 험난한 길이 연속되는 곳에서, 스님과 함께 내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설악산  산정에서 기도를 드리고 내려가는 불도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간곡히 기도하기 위해 이토록 깊은 산을 찾았을까. 맑은 하늘이 바라다 보이는 그 곳에는 선거 열기로 달아올라 맞고소를 하겠다는 정객들의 목소리도, 연일 일어나는 부도 여파로  목을 조이는 답답한 기사들이 담긴 신문 조각도 나 뒹굴지 않았다.


 그 절경 속에서, 아름답게 타오르는 단풍의 열정에 온  몸을 내 맡긴 채, 산사의 조용한 목탁 소리에 정성을 다하는 불도들의  마음을 닮고 싶었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느끼던 쓸쓸함이 아닌, 숙연함 마저 배어 났다.


 네 시간 가까이 산을 오르고서야 돌 벽으로 지어진 양폭산장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 산장은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긴요한 휴식처이며, 조난자들의 피난처이다. 지난 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산장에 머물면서 산의 의미를 안고 갔을까.


 방마다 굳게 닫힌 문고리가 눈길을 붙잡았다.두툼한 양말과 등산화로 채비를 했건만 다리가 아파왔다. 하산 길에 다리를 풀 겸 계곡 물에 잠시 발을 담궜다. 살을 에이는 냉기가 이미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장에서 따끈한 국수를 먹고 내려오는 길에 급경사로  이어지는 철 계단은 현기증이 일게 했다.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내딛는  계단을 낯선 할머니가 힘겹게 내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스러워 조심스럽게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왔다. 자그만  등짐을 메고 모자를 눌러 쓴 할머니의 모습은 산을 오르기에는 연로해 보였다. 연세를 묻는 말에 일흔 여섯이라고 했다. 백담사에서 출발해 봉정암과  희운각에서 이틀을 쉬어 하산하는 길이
 란다.


 지난 해 어쩌다 낙상하여 목발 없이는 걸음조차 걸을 수 없는 동갑내기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뜨겁게 가슴 벽을 타고 흘렀다.  단풍보다 붉게 타오르는 불심을 간직한 천불상 속의 또 하나의 부처를 보는 듯 했다. 젊은이도 넘기 어려운 그 난산을 불심 하나로 노구를 끌며 한 발짝씩 내딛는 모습은, 그저 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던 나에게 부끄러움과 함께 경건한 느낌마저 갖게 했다. 그 누구도 확연히 알 수 없는 내세에 대한 염원을 간절히 기도했다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베어 났다.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줄이다. 우리는 마냥 젊음이 계속될 듯한 착각 속에 살아간다. 젊은이들조차 넘기 힘든  길을, 세상과 하직할 날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그토록 큰 힘을 할머니에게 있게 한 것일까.


 천불동 계곡에서 미소짓고 서 있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을 훗날 바라보며, 천  개의 불상들이 내게 준 의미와 할머니의 모습을 더듬게 될까. 화려하게  손짓하는 산의 모습이, 묵시의 침묵으로 다가오던 냉엄함과,  낙엽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가  맑게 투영되어 오는 사실을 하늘빛에 새겨 본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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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0.10 10:08

    첫댓글 남쪽으로 내려오고 나니 뵙기가 어렵네요...잘 계시지요?

  • 작성자 08.10.11 13:43

    그렇습니다. 아불님 여기 계셨으면 몇번 더 만났을 텐데.... 잘 있습니다. 아불님도 이 가을 즐겁게 보내십시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08.10.11 13:44

    설악산이 단풍으로 절정을 이루는 시점에 갔었지요. 천불동의 풍광이 절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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