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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과 쪽지를 통해 주고받아서 서로 글 정리가 잘 되어 있진 않습니다. 원래 정리했던 한글 파일을 날려먹고,,지식인에서는 어이 없게도 제 글이 삭제되어 있어서,,댓글과 쪽지 글 정리한 걸로 하다보니 2차와 3차 토론이 엃겨 버렸던 모양입니다. 지금 정리했는데,,제정신일 때 보면 또 뭔가 문제가 있을거 같네요. 쳇,,괜히 올린 건가,,? 제가 억지로 정리를 해봤는데,,뭐,,할 수 없지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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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wmunba 님의 3번째 반론
우선 저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북조 수군의 진짜 담당자들은 산동/ 강회의 한족 호족들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저로서는 이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계속 사용되어 온 황해 횡단 루트를 알지 못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해상 교류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동성왕이 산동을 공략할 수도 있었다고 하시며 해류를 들어 설명하셨지만, 이는 결국 북위도 백제를 공략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왕복 과정에서 한쪽이 어려운 때는 다른 쪽이 쉬운 때인 것이지요. 결국 "해상 경험" 을 가지고 근거를 삼을 수밖에 없는데, 저는 chiwoo555 님께서 북위의 해상 경험을 일천하다고 보심은 북위 지배층이 선비족이었다는 사실을 과도하게 인식하신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배를 몰 필요는 전혀 없지요.
낙랑지역과 중국의 교류가 산동 루트를 통해 이루어 졌다면 이 지역의 중국 문화 요소는 산동 계열이 다수를 차지해야 하지만, 사실은 산동 계열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양자강 하류 계열의 문화 요소가 압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청동기시대 요동의 중국 문화요소가 산동 계열이었음을 고려할 때 굉장한 변화입니다. 목곽분의 양식과 수입 유물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산동을 거치지 않고 두 지역 간에 직접 교통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대방지역을 강조하심은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너무 확대 해석하신 결과인 듯 합니다.
해로에 대한 지적은 분명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백제의 연안 항로가 고구려에 의해 막힌 것은 이미 5세기 초반의 일로,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황해 횡단 항로를 사용하였다고밖에는 해석하기 힘듭니다. 이교류는 물론 상호간에 일어난 일로, 백제가 항로를 알고 있었는데 산동쪽에서는 몰랐다고 함은 괴이한 말씀입니다. 근개로왕대의 예를 보다시피 북위에는 백제 사신이 출입하였으며, 이들은 분명 고구려 연안을 통과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덧붙여 대방 지역은 엄밀히 말하면 남쪽의 한(韓)-왜(倭)와 연결되는 곳으로, 이는 한 군현 통제의 최남단이 대방이었던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해로 문제가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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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주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저는 북조의 수군이 남조 수군을 격멸할 정도로 충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적하였다시피 문제때 이미 선비 귀족들의 반발을 살 정도로 수군을 중시하는 정책(남조를 공략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이 수군의 규모가 백제 침공에 사용되기에 초라했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물론 배의 규모를 함부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1900척 곱하기 얼마... 해서 계산 한 것은 초반에 오기로 그랬던 것이니, 이해바랍니다. 당나라의 전선은 누선으로 매우 큰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후일 몽고가 14만 군사를 일본에 수송할 때의 선박은 3500척에 육박하였으니 선박의 톤수나 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비례식만 써 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한편 고구려-당 전쟁때 당나라가 이상하게 해로를 빈번하게 사용한 점은 눈에 띕니다만, 이 해로가 이전에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고대의 해상 침로가 대개 그렇듯이 우발적으로 발생하거나 전략상의 필요때문에 억지로 귀결한 것은 아니며 이미 무역로나 해적들의 활동을 통해 알려진 루트가 있어 이로부터 침로를 취했다고 봄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백제 근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냈을 때, 상표문을 보면 확실히 평소에 쓰던 루트가 아닌 다른 길로 왔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후에 북위가 육로를 사용하려다가 고구려로부터 거부당하여 해로로 책봉사를 보내려다 풍랑을 만나 또 실패한 사례를 보면, 루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기보다는 황해 횡단 항로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제 논지는, 이 때 이미 산동의 해상 세력도 황해 횡단 루트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해상 교류는 상호적인 것으로, 한쪽만 알고 다른 쪽은 몰랐다거나,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백제나 중국 여러 나라가 해상 봉쇄주의를 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역시 수십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백제로 쳐들어왔다고 보기에는 영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군대의 규모 자체가 과장된 것이라는 의견을 지지하는데, 사실 이 점은 공격 주체를 고구려로 본다 해도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구려가 남방으로 내는 군사는 5만 이상이었던 사례가 없지요. 역사 얘기를 할 때 정황을 가지고 이런 저런 추리를 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역시 가장 합리적인 결책은 북위가 공격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공격한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용병 가설도 흥미롭지만,많은 종류의 사서에서 삭제되거나 은폐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지네요. 특히 자치통감에서 "빠졌다" 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비인문학적인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역사 문제의 설명에도 어느정도는 오컴의 면도날 원리가 성립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제서 위로전에는 북위의 공격 사실도 나오지 않는데,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위로전과 백제전의 출처가 달랐던게 아닌가 합니다. 남제서가 1차 사료를 직접 인용한 대목이 많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백제 전에는 백제측의 표문에서 얻는 자료를 일방적으로 수록하고 위로전에는 북위의 동향을 수집한 문서로부터 얻은 정보를 쓴 것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저로서도 무슨 확실한 이야기를 하려면 매우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것은 남제서의 해석 같습니다. 우선 남제서에 실린 동성왕의 표문은 가작에 대한 승인 요청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휘하 제장들에 대한 표창이 이미 백제 내부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뒤에 당나라와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의 예로도 볼 수 있지만, 백제가 남조와 연계하여 북위를 선제공격 하였다면 남조측에서 먼저 벼슬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며, 백제 동성왕이 먼저 벼슬을 내리고 남조가 그것을 승인하는 형태는 당시 국제 관계상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무리한 점입니다.
백제가 488년 이전에 산동지역을 공략하여 거점을 마련하였고, 488년에는 "수십만 기병" (북위의 영토에서 일어난 일이니, 기병이 공격해 들어왔다면 정말로 수십만이었을 것입니다!)의 공격을 격퇴해 내었면, 그곳에 주둔한 백제의 병력 또한 대단했을 것이며, 황해를 통한 해상 보급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과연 이 당시의 백제가 그런 일을 할 역량이 되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백제는 북계가 고구려에 의해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백제에게는 양자강 같은 천해의 요새도 없었습니다. 실로 chiwoo555 님의 주장대로 백제가 몇 차례에 걸쳐, 발해의 장문휴가 했던 것과 같이 산동 일대를 공략해서 조선소의 배를 파괴하거나 했을 가능성은 있겠지요. (그러나 이마저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공상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거점까지 마련하고 "수십만 기병" 의 공격을 격퇴하기까지 했다는 주장에 비하면 차라리 북위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이 훨씬 현실성이 있습니다.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백제가 이 지역을 공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황해 횡단 항로에 대해 훨씬 너그러운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몇 항구를 거점으로 가지고 있었고 북위의 대군을 격파하기까지 했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북위의 군대는 "수십만 기병" 이라고 되어 있지만, 목간나는 "이전의 전쟁" 이 아닌 바로 이 싸움에서 "큰 선박" 을 격파하였습니다. chiwoo555 님은 이 "큰 선박" 이 산동에 정주하던 북위의 선박인 것으로 해석하셨지만, 그러한 선박이 있었다면 488년에 앞서 백제가 이 지역에 "거점" 을 마련하는 공격을 가했을때 이미 격파되었을 것입니다. 488년까지 남아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결국, 북위의 군대가 그냥 "수십만 기병" 인 것이 아니라 "수십만 기병+다른 곳에서 모은 수군" 이거나, 그 수십만 기병이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좀 넌센스지요.)
결국 남제서 본문을 그대로 읽기만 해도 "수십만 기병" 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에 자꾸 천착하심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또한 지적드렸다시피 언제든지 북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산동에 거점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병력과 물자를 공급한다는 것은, 바로 위에 강대한 고구려를 적으로 두고 있는 백제로서는 자살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chiwoo555 님은 이를 "남제의 용병, 남제의 요청에 따라 행한것" 이라고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제로부터 실로 엄청난 지원이라도 받아야 이런 일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생기겠지요.
그러나 남제가 주도적으로 책동하여 이러한 엄청난 일을 성립시키고, 북위의 수륙 양공을 격퇴하기까지 했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대성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의 세계사상 유례없는 일일것 같군요.
이러한 일이 남제서(그 후의 양서, 남사 등에도 마찬가지이지요)의 본기와 다른 부분에 단 한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그런식으로 당했다면 북위 조정에서도 큰 논의가 일었을 것이나 역시 전혀 징후를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남제서에는 북위의 침공을 동성왕이 인지하고 제장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어떤 식으로든 백제 본국으로부터 군사 유출이 있었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동성왕 자신이 "산동 거점" 에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후자일 경우에 이 가설은 더욱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고구려를 배후에 둔 채 동성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전자일 경우에 동성왕이 파견한 군대는 해류의 흐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언제나 산동에 왕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좀 다르게 말하면, 북위의 침공이 있었던 지역은 "백제의 군대가 언제나 파견될 수 있는 지역" 이라는 것입니다.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북위는 이미 앞서 근개로왕대에 이미 백제의 사신을 맞이하였으며, 해로로 다시 사신을 보내려다가 풍랑으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항로에 대한 정보라면 이때 상호 교류와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수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민간에서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보는것도 무리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북위 정책 입안자라면 백제가 해류를 통해 원군을 보내기 힘든 계절에 산동을 공격했을 것입니다. 무엇때문에 동성왕이 순식간에 반격할 수 있는 때를 골라 공격했겠습니까? 정황상 이는 더욱 성립하기 힘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chiwoo555 님의 어떠한 주장에도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황해 항로의 어려움을 잘 알고 계신 분이니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두번째 무리한 점입니다. (생각컨대 chiwoo555 님은 백제가 후에 이 지역을 "스스로 포기했다" 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위서와 북사에 "수복" 기록이 없는 것이겠지요. 이 역시 중국 역사서를 너무 우습게 보시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제가 488년 이전에 산동지역을 공격하여 거점을 마련하였다면(저는 이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북위로서는 남조를 공략할 수군 건설에 막대한 차질을 입게 되는 셈입니다. 큰 일도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이 위서와 북사에는 모조리 빠졌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혹시 chiwoo555 님은 근거없는 "기록 은폐설" 을 생각하고 계신것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chiwoo555 님께서는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는 부분에서, 산동의 백제 거점을 공격했다면 백제를 공격했다고 볼 수 있지 않으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중국 역사서에는 그러한 표현을 찾기가 힘듭니다. 백제가 산동에서 일정한 거점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지역의 이름이 나와야 합니다. 당시 남북조는 서로 명목상으로 전국을 지배한다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현재 상대편의 지역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인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남북조의 역사는 모두 바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하는 사료들로부터 찬술되었으며, 단순히 백제가 거점을 마련했다고 해서 그 땅을 "백제의 경계" 로 부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 점은 확실히 인식해 주십시오.
남조의 용병으로서 공략하여 눌러앉은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남조의 시각에서는 그 땅이 바로 남조의 것이 되는 셈이니까 더욱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는 표현을 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단순히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는 표현은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부터 전해들은 일을 쓸 때의 전형적인 표현 수법입니다. 이는 세번째 무리한 점입니다.
동성왕의 두번째 표문과 그에 앞선 남제서의 설명을 보면, 동성왕이 여러 장수들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제 나라가 조용해졌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남조를 위해서 무슨 큰 일을 했다던가 하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산동을 공취해서 대군을 격퇴하기까지 했다면 자랑할 만도 한데 말입니다. 목간나 등이 받은 벼슬의 이름에도 중국계 지명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표문의 내용은 결국 488년 전쟁의 귀착이 전진기지 방어가 아닌 "국토 방위" 였음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도 산동 공략설은 무리하다고 생각됩니다.
생각컨대 "수십만 기병" 이라는 표현에 너무 신경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 병력이 정말 기병이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으며, 그러한 대규모의 병력이 북위쪽에서 동원된 움직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진짜로 지지하는 "고구려설" 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남제서에는 魏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고구려로 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구려설의 입장은, 고구려가 당시 북위의 책봉을 받고 그 막부체제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북위가 고구려와 연계하여 백제를 "손보기로" 했다면 고구려의 침략을 북위의 침략이라고 끌어다 댈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동성왕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침략을 격퇴한 일로 남제의 표창을 받을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고구려쪽에서 남하한 병력을 "북위의 준동으로 인해 내려온 것" 으로 견강부회하였을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가지고 하는 말로, 아직도 더 많은 증거를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대륙백제 관련 답변을 많이 쓰면서도 아직 확실하게 이를 주장해 본 예는 없습니다.
동성왕 10년의 북위 침공 기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국사학계에서 논의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대륙 백제와 연관시키지 않는 한 대체적으로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생각하는 의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단재는 이를 "고구려의 준동에 북위가 놀아난 것" 으로 보았고, 이런 의견은 좀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고구려와 북위의 합동 공격으로 보는 의견, 고구려가 북위의 요청에 의해 공격한 것으로 보는 의견 등이 있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북위가 쉬운 침로를 택하였을때 고구려 영내 또는 영해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백제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십만 기병" 이라고까지 (이 병력 규모가 사실이라고 믿는 연구자들은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그런 병력을 백제가 과연 버티어낼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기사가 북사나 위서에 전혀 나오지 않으며, 오직 동성왕의 표문과 연계된 남제서 백제전에만 보인다는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백제, 신라, 진한, 가야의 제군사로 자처한 왜왕 武의 상표문에서 볼 수 있다시피 당시 남조에 도달한 외국의 표문에는 허풍이 워낙 많아서, 절반쯤은 에누리하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님의 용병론은 매우 신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없는 말이라고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동성왕의 표문에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없으며, 그런 큰 일이 남제서는 물론이고 남북조사의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음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성왕의 상표문에 기록된 가수 관작들도 산동 지역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는 없고, 남제서에서 북위가 공격한 곳을 攻百濟 其地界 로 묘사한 것도 역시 공격받은 지역이 산동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남제서에는 자신들이 갖지 못한 북쪽의 땅에 대한 地志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남북조 시대의 일반적인 영토 인식이었던 만큼, 백제가 "거점을 마련" 했다고 해서 이를 백제의 "界" 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성왕 또한 邦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니, 역시 중국 내지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을텐데, 남조로부터 대량의 지원을 받았다 하더라도(병력 지원은 아니겠지요. 사실은 남제가 그런 지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는지도 의문입니다.) 북위의 핵심 지역 가운데 하나인 산동을 공략하여, 그것도 몇 년씩 점거할 수 있었을지 실로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에 대항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바가 아닐런지요.
또한 자치통감에는 이 사실을 488년, 동성왕 10년으로 하고 있고 삼국사기 역시 이를 전재하고 있으니, 삼국사기 편찬 당시 백제측의 사료가 남아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남제서를 부정하고 이를 취하였음에는 분명 무슨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님께서는 두 사실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계시지만, 자치통감은 두 사실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별개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북위가 두차례에 걸쳐 침공했다는 의견입니다. 아마도 남제서 경오년 기사의 "또"又에 의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488년 전쟁 기사는 남제서의 유실된 부분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북위의 2차례 침공이 남제서에 나와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자치통감에 488년만 실린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며, 거의 동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도 488년만 언급되어 있음은 더욱 납득이 어렵습니다. 김부식 등의 성실한 기록 태도로 보았을 때, 단순히 자치통감에서 그렇다니까 이를 전재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으며, 남제서를 엄연히 확인할 수 있는 마당에 경오년 침공 사실은 무시하고 488년 침공만을 기록하고 있음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님께서 북위의 백제 공략설을 부정하시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고구려의 백제 공격설" 에 대해서 검토해 보심이 합리적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게 결정하신다면 저도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단인의 4번째 반론
항로문제
북위의 황해 횡단항로의 이용 가능성에 대한 제 글을 약간 오해하신 듯한데 저는 이때 북위 수군이 선비족으로 이뤄졌을 거라고 하진 않았고 산동 귀족의 협력을 받아 산동지역에서 이전부터 축적된 항해기술이 북위 효문제 때 이용되었을 수 있다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전부터 산동지역의 한족들이 황해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 축적이 있어왔는가 라는 문제는 항해기술 자체를 축적해 온 것과는 별개라는 의미였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대의 항해는 그 안정성 때문에 연안항해가 주를 이룬다고 했고 이전부터 개발된 황해 ‘사단’항로, 즉 양자강 하구에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한반도로 이르는 루트가 개척되긴 했지만 위험성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산동지역의 해상세력들은 전통적으로 연안항로만을 이용해도 한반도 세력과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항로 봉쇄 상황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북조는 북위의 화북 통일 이전에 지방분권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한반도 방면으로의 항로봉쇄 역량이나 이해관계를 갖추지 못했으며 동 시대 고구려 역시 4세기 말 5세기 초의 백제 원정 이전까지는 확실한 항로봉쇄 역량 떨어짐) 계속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이어주는 연안항로를 계속 이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향하는 항로 봉쇄를 단행했고 북위는 남조와 고구려 연계 가능성 때문에 봉쇄했으며 이 때문에 산동 재지 세력은 황해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수집 역량을 갖출 기회가 없었습니다. 항로가 봉쇄되면 산동 귀족들이 황해 횡단항로를 개척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하시면 산동 재지 귀족은 굳이 그런 위험을 감소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 고구려가 항로를 봉쇄하고 군사적으로 압박하자 조공무역이나 책봉문제, 혹은 남북조로부터의 외교적 지원 등 이유로 북조나 남조와 사행길을 반드시 터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산동 재지귀족에게는 단순히 교역지 하나 정도를 상실한 것에 불과하며 더군다나 남북조 시대가 화폐 경제가 아닌 현물 교환 체제, 즉 상업도 그리 현저하게 발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을 감안한다면 굳이 산동 재지 귀족이 황해 횡단항로를 뚫을 이유는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항로 봉쇄를 한다고 해서 봉쇄된 항로를 이용하는 적성국 선박이 가는 족족 잡힌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 레이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야간을 틈타 은밀히 이동하는 배를 어떻게 알고 가는 족족 다 잡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광주해상에서 잡힌 고구려나 남조의 사신은 알면서 잡힌 바보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경계가 강화되고 그런다면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항로를 이용해야하겠죠.
때문에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에 막힌 항로를 뚫고 472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때 사용한 항로가 남조를 거쳐서 가는 황해 사단항로인지, 아니면 산동으로 바로 가는 황해 횡단항로인지 명확히 알 순 없지만 백제가 황해 횡단항로를 거쳐가려면 필연적으로 고구려 남부 해안을 거쳐 산동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이 길은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단항로를 통해 가야겠죠. 따라서 백제 개로왕이 남조 몰래 북위에 사신을 한번 보낼 순 있었습니다.(횡단항로를 이용할 수 없는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백제는 472년 이전에는 북조 국가에 단 한번도 사행선을 띄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후 시기에서도 북주나 수나라 정도일겁니다. 즉, 백제도 사단항로는 몰라도 황해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는 이 당시 보유할 필요도 없었고 정보 축적이 안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북위의 경우는 앞에서 설명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항해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산동 재지 귀족들이 횡단항로에 대한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압박을 위해 백제와 연계할 필요성이 생긴 북위는 백제 개로왕에 대한 답사를 보낸 472년의 두 차례 사행선 파견 외에도 440년에 이미 사신을 파견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472년 첫 사신 파견에는 고구려를 통해 가려다가 저지당했고 그 때문에 해상에서 돌아가려 했으나 풍랑을 만나 사신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440년에도 마찬가지여서 이 경우는 사신이 아예 행방불명되었습니다. 472년의 개로왕이 보낸 표문을 보면 440년에 풍랑을 맞은 것으로 생각되는 사절단의 유류품이 백제 해안에까지 오자 이때의 일을 보고하면서 그것이 고구려에서 침몰시킨 것이라 하며 효문제를 자극했으나 효문제는 그 유류품이 중국의 것이 아니라고 하여 사신 파견 사실은 인정했지만 고구려에서 북위 사행선을 침몰시킨 것을 인정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고구려와 쓸데없는 충돌을 막으려는 효문제의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볼 경우 이 항로는 고구려군의 감시를 받게 된다는 것이며(실제로 항로가 그 권역에 걸치지만) 북위군이 백제를 침공한다고 가정하고 횡단항로를 이용, 이 지역을 지날 때 수도 부근이라 고구려군의 저지를 받을 개연성도 있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북위가 2차례의 횡단항로 개척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그에 따라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수집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이전의 산동 재지 귀족으로 이루어진 해양세력이 황해 횡단항로에 대한 정보 축적이 거의 전무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그 실패는 황해 횡단항로에 대한 북위의 경각심만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후로도 북위가 고구려 견제를 위해 백제를 끌어들여야 하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북위는 백제에 대한 관심을 아예 꺼버립니다.(고구려와 쓸데없이 척을 지기 싫어서가 주요 이유이지만 아마도 백제와 연합하는데 들어가는 공이 고구려를 자극해서 입게되는 득실에 비해면 배보다 배꼽이 커서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결국 백제는 남조 국가들에게만 목숨을 걸게 되죠.
황해 횡단항로를 예전부터 사용해왔다라고 주장하고 계시고 해적이 이 항로를 사용하는 것까지 상정을 해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시는 시대 배경 분석을 조금 더 해주시는게 어떨런지요? 해양사에 대한 님의 분석이 조금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이 당시 횡단항로 개척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것이 가능해 졌던 것은 당의 고구려, 백제 원정 이후라고 생각됩니다만,,일단 그게 가능하려면 조선 기술의 축적과 해양 정보의 전대로부터 이어지는 축적이 있어와야 하는데 남조 국가는 모르겠지만 북조국가는 혼란 상황에서 정보나 기술이 정체되면 정체되었지 진보하긴 어려울테니까요. 남조국가들도 위험성 때문에 연안항로를 이용하다가 북조국가에 걸려서 나포되는 판국에,,제 생각은 횡단항로 개척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됩니다.
당의 횡단항로 개척에 대한 배경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료상에서 이미 나오지만 북위의 경우는 제가 위에서 언급한대로 당 만큼 절실하지도 않았고 시도는 해봤지만 그 조차도 실패하는 바람에 후대에 황해 횡단항로 개척에 대한 어떤 정보 축적이나 계승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이 백제 원정을 할 수 있었던 건 남조 이래로 축적된 항해술(사실 수당의 조선, 항해 역량이 크게 증강된건 북조 수군보다 남조 수군의 기술 우위에 힘입은바가 더 큽니다.)을 본격적으로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서입니다. 하지만 북위는 그렇지 못합니다.
관위 가작 문제
그리고,,,표문에서 나온 가작에 대한 해석 문제는 저와 생각이 좀 다르시군요. 표에서 나오는 표창은 백제의 관위 가작이 아니라 남제의 관위 가작입니다. 남제 황제에게 따로 가행직을 승인받아야 했다는 것은 남제 황제에 대한 신하로서 자신의 신하를 책봉시키는 것을 의미하죠. 즉, 여기에는 책봉문제가 걸려있는데 ‘남북조 시대 당시에’ 책봉을 하는 이유는 천자국 황제와 책봉국 수장이 얼마나 가까운 가를 나타내는 증표이며 그것은 곧 해당 국가나 책봉을 받은 인물이 관위의 비중에 따라 천자국이 그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척도가 됩니다. 그것은 곧 해당 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공인표시와 같다고 할 수 있죠. (때문에 독립된 천하관을 소유한 고구려나 유연, 돌궐, 토곡혼 등이 남북조의 책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책봉을 받는 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것과 관련된 얘기는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총서 15권 중 박한제 교수님의 수당세계제국과 고구려- 조공질서및 기미체제와 관련하여- 란 논문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은 해당 국가의 국왕이나 왕위 계승자에게만 주어지는 이 책봉이 만약 바로 아래의 신료나 부용집단 수장에게 수여된다면 지위가 뭐가 되었든 그 집단 수장은 천자국의 직속 신하, 즉 또다른 직속 신하 격이 되는 종주 집단과 동격으로 인정받는 셈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남제에서 먼저 동성왕의 신하에게 관위를 수여하게 되면 남제가 백제 동성왕의 국가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 라는 말과 진배없습니다. 때문에 동성왕이 특정한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신하나 부용세력에게 남제의 관위를 가작시키고 사후승인을 받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가작에 대한 승인 요청 여부는 남제를 도와 북위를 선제공격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되지 못합니다.
백제의 산동 공격과 유지 문제
제가 산동을 공격했다고 했지 산동을 점거해서 거점을 마련했다라고 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오해하신 듯 합니다. 아마도 제 주장 중 백제가 산동을 공격했다라는 것과 대륙론자들이 산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었다라는 것이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에 오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님 말씀대로 산동에서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면 북위의 기병대에 의해 몰살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하지만 산동지역을 공격한 이유로 앞서 저는 산동지역에서 건조되고 있던 함선과 수군 기지를 박살내서 남제나 백제의 침공 가능성 자체를 뿌리 뽑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수군기지를 초토화 시키고 나서 퇴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 거점이 문제가 됩니다. 그 거점 지역으로 회수 이남 지역이 백제군 주둔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이 지역은 황해 사단항로를 통해서 백제가 접근하기 어렵지 않으며 보급문제는 남제를 통해 지원받는게 가능합니다.
또한 이 당시는 기후가 달라서 회수 이남지역은 해수면이 낮고 강과 하천이 많아 습지와 늪지대 천지였습니다. 이런 지형은 기병에게는 산악 지형과 동시에 최악의 행군 조건이기 때문에 북위가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지역은 남제의 영토로 알려져 있는데 효문제가 481년에 회수를 건너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했고 효문제가 퇴각은 했습니다만 481년 전후로 해서 국지전이 많이 벌어진 이곳을 남제가 완충지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남제의 용병 비슷한 입장인 백제가 남제의 양해를 얻어 일시적으로 거점을 마련하고서 산동 지역을 공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동 해안에 배치된 거점 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해서 공성전을 벌인다고 상정할 경우 상당히 힘들긴 하겠습니다만 경우에 따라 북위의 대군을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장담도 하기 힘듭니다.(물론 이것은 제가 사료를 보고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맞다라는 말은 하진 않겠습니다.) 또한 남제가 백제에 대해서 병력 지원이 가능할까란 의문을 가지셨는데 북위 측 기록에는 488년과 489년에 남제와 전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것은 동성왕 표문과 자치통감에 각기 나오는 488년과 490년의 전쟁과 관련된다고 가정해 보면 그 전쟁에서 남제가 북위에게 열세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백제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동성왕 표문 선박 격파 문제
그리고,,선박 얘기를 하셨는데 덧붙여 말하면 깨뜨린 것은 선박 외에도 성문이 더 포함됩니다. 원문에 木幹那前有軍功, 又拔臺舫 라고 해서 돈대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보시면 이건 분명히 백제가 방어측이 아니라 공격측이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여기에 관해서 카페에 글을 쓰신 천랑성주님의 글 일부를 인용하지요.
[본인이 이것을 상륙에 따른 육상전투였다고 보는 이유는 일단 동성왕의 경오년 표에서 ‘돈대와 배’를 깨뜨렸다고 되어있습니다. 평지를 약간 높인 지대와 배를 함께 공격을 했다... 즉 육지와 바다를 동시에 공격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시단야'라고 했는데, 만약 해전이었다면 전투묘사에 들'野'자를 쓸 리가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들 야(野)자가 들어가는 걸 봐서는 육전이 치러졌다는 것인데 만약 북위가 배를 타고 백제 본토를 공격할 경우 전통적으로 해운국인 백제가 왜 해상에서 이 병력을 막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합니다. 상륙한 후에 이 병력을 격파했다라고 하면 백제 수군을 돌파해서 백제 영토를 공격할 정도로 막대한 물량을 동원한 산동 출신의 북위 수군이 왜 퇴각할 시에 격파당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위노와 험윤에 대한 해석에 대한 설명
이 부분은 지금 2번째 다시 얘기해 드리는 것 같군요. 일단 새로운 설명을 추가하자면,,삼국사기를 근거로 해서 고구려는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인 475년부터 동성왕 16년인 494년까지 약 20년간 백제를 침공한 사실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때 위노와 험윤은 고구려가 될 수 없습니다. 남제서 표문에는 마지막 3번째 표문을 보내는 건무 2년(495년)에 고구려에서 8월 즈음 치양성을 포위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때 표문에 나타난 험윤은 경오년(490년)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 확인 바랍니다.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원정을 한 것은 북방 경략을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백제가 자리잡은 충청 지역과 호남지역은 습지와 호수가 많아 고구려군의 주력인 기병 접근이 용이치 않은 곳입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북위를 견제하고 물길을 방어해 부여 지역을 경영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해 황해 횡단항로나 연안항로로 가기 용이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남방 안정을 위해 백제를 경계했을 뿐 고구려가 굳이 백제에 대해서 정복의 대상으로 삼진 않았습니다. 단지 고구려는 백제를 자신의 천하의 일부라고 보고 있었고 개로왕 참살 이후로는 주적이 북위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에게 주적인 북위가 자신의 천하라고 생각하고 있는 백제 침공을 하는 것에 대해 고구려가 방종한다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따라서 이 때의 위노, 험윤은 북위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북위의 침공을 한번이라고 보고 계신데 그 부분은 경오년 사건에 대한 표문에서 원문에 '험윤이 뉘우치지 않고' 란 표현을 봤을 때 이전에 한번 더 침공을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한 님의 설명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백제와 북위 전쟁의 기록과 백제 경계란 문구
사실 이 문제는 제가 가장 난감하게 생각하던 문제입니다. 일단 기록이 너무 한정되어 있어 아예 사건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매몰되기까지 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왜 기록이 없는지에 대한 다른 측면의 분석이 이뤄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 기록을 북위가 백제 본토를 침공했다라고 놓고 보더라도 왜 북위에 대한 사료에서 백제를 원정갔다는 내용의 문구조차도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는 북조 기록에서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백제가 북위를 공격한 대 사건이라고 분석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 보다 왜 사료에서 나타나지 않는가를 분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백제 경계,,와 邦이라는 표현은,,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界와 邦이 어떠한 개념이고 용법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제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례지만 이 개념들의 용례와 구체적인 개념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함부로 답변을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한문학에 밝아 원문을 거침없이 해석할 수 있는 사람...하지만 거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이 부족한 듯하며 국가의 성립과 영토의 확장, 전쟁의 개념 등에 대해서 약점이 존재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게다가 백제사에 대한 폭넓은 학설과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극히 학문적인 근거를 요구하면 당황할 것으로도 생각되고...일부 '북위=고구려'설을 지지하는 듯 하며 그 근거로 북위의 책봉을 받은 고구려이니...라는 근거를 제시한 것을 보면 아주 간단한 당시 국제상황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당시 역사를 지금의 시각으로, 한문만 잘 안다고 해석하면 이리 되는 듯 하다...
훗,,그러면 나보다 낫겠는데 뭘,,ㅋㅋ 난 기초적인 사료 해석능력조차도 떨어지는 구만,, 그리고 이런 답글 쓰는데도 단행본 몇권 찾아가며 몇시간씩 간신히 썼는데,,아,, 이럴 때마다 능력 떨어지는 나 자신에게 열등감 느낌..
麗輝// thwmunba 입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게 실로 모욕적인 말씀이라 생각됩니다만, 제가 여기 올 줄은 모르셨을테니 앞으로는 괘념치 않겠습니다.
뭐 가입해서 이 글을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토론할 정도라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하니 저도 그리 하는 편이지요. 그래서 전 다른 싸이트에서는 활동을 잘 안 합니다. 귀찮아서요. 한단인님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전 님에 대해 제 개인적인 생각(장단점)을 밝힌 것이니 뭐 너무 모욕으로만 생각치는 마십쇼. 저도 그리 잘난 것 없는 사람이지만 온라인상에서 이 정도의 비평 정도는 가능하니 님 말씀대로 괘념치 않겠습니다. 차후 저와 이런 일이 생긴다해도 저 역시 그럴 것이니 역시 저 또한 괘념치 않겠습니다. 저와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원하신다면 응할 생각은 있으나 제가 요새 바쁘니 다음 기회로~^^
아~그리고 제가 사족을 달자면 님의 백제사에 대한 인식이 이 부분을 논할때 상당한 중점사항으로 요구될 듯 싶습니다. 전 기본적으로 비류계, 온조계 백제로 백제사를 이원시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먼저 해결점을 찾지 않으면 왠만한 경우, 다른 사람과 본 주제로 토론하기 보다는 백제사에 대한 토론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서요. 전 기본적으로 광개토호태왕 평생의 주적은 비류백제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이후 등장하는 해상활동을 담당한 '백제'라 총칭되는 집단 역시 비류백제에서 찾고 있습니다. 님의 글을 보니 안 그런 것 같더군요. 그래서 님과의 토론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겠네요. 암튼 이만~^^
麗輝// 바쁜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백제의 인구" 라는 글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비류백제설에는 저도 예전에 낚였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안 믿습니다.
그동안 쓴 글을 새로 읽어보다가 빼먹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 전래의 책봉-조공 관계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서, 꼭 책봉받은 나라의 신하에게 관위를 수여한다고 하여 그 나라의 독립성이 훼손된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후에 백제 토멸시에 당나라가 김유신 등에게 관위를 수여 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요? 물론 비슷한 예를 찾기가 힘드니만큼, 남북조 시대에도 과연 그랬는지는 더 조사해 볼 문제일 것입니다.
당 시기 조공책봉과 남북조 당시의 조공책봉은 성격의 차이가 있다고 아는데요. 저도 당 시대 이후 책봉국 신하들 중 견당사로 온 사람이 따로 책봉을 받는 경우를 몇 보긴 했습니다. 남북조 시대는 제가 확인을 못했는데 그에 관해서는 좀 더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