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묻는다
1조5천억원 기금 관정재단, 노벨상 뛰어넘는 과학상 준비 중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20호(2021.07.15)
이종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
“어제도 밤 10시 반까지 일했어요.” 백수(白壽)의 그가 말했다.
“아니, 그럼 직원들이 집에 못 가잖아요.” 반백(半百)의 기자는 쓸데없이 꼬투리를 잡았다.
“대부분은 가고 필요한 인원 한둘만 남지. 매일 그렇게는 못하고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일할 땐 밤샘도 해야지, 할 수 있으면.”
(상대적으로) 젊은 기자의 입을 떡 벌리게 만든 이는 아흔아홉에도 골프를 즐기며 보기 플레이 정도는 너끈히 해내는 이종환(AMP 7기)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이다. 관정을 찾은 건 일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넘쳐나는 그의 기부 본능 때문이다.
1958년 삼영화학공업사를 창업한 그는 30여 년의 경영자 생활 끝에 1995년 장학재단을 설립할 준비를 시작했고, 2000년에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세웠다. 관정(冠廷)은 그의 호이다. 그의 사재 97%를 기부 출연해 만들어진 재단 규모는 1조5,000억원이나 된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최대의 장학재단이다. 여기서 나오는 운용소득을 재원으로 매년 국내 200명, 해외유학 300명의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인원도 부족하다 느낀 이 설립자는 내년엔 국내 500명, 해외 500명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구로역, 신도림역 등지에 건물을 짓고 있다. 건물에서 나온 수익은 고스란히 장학재단의 재원이 된다. 21년간 관정재단 장학생은 1만1000여명이나 되고, 이중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700여 명, 국내외 유명대학 교수도 상당수라는 게 재단 측 설명이다.
“내가 지원해준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해 왔어요. 그런데 노벨상이 서구 쪽에 치우치고 있는 것 같아 아시아 쪽도 소홀하지 않도록 그런 상을 직접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세계관정과학상’이다. 2022년부터 매년 5개 분야에 15억원씩 총 75억원의 상금을 주는 과학분야 상을 제정하겠다는 2019년 연말의 구상이 밝혀지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재원과 상금의 규모가 노벨상보다 크다는 점에서, 더구나 이런 상 제정을 대기업 창업주가 아니라 중견기업인 삼영화학그룹의 창업주가 밝혔다는 점에서 세간을 들썩이게 했다. 약속한 과학상 제정 시일이 6개월이 채 남지 않았기에 진척 상황을 물었다.
대담·글: 하임숙 (영문91-95) 논설위원 ·채널A 보도제작 에디터
“노벨상이 만들어질 당시였던 120여년 전 스웨덴의 국력은 세계 중·상위였어요. 현재 우리나라가 더 나은 수준이죠. 세계적 과학상을 창설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더구나 창설 당시 노벨재단의 기금은 현재 가치로 3억~4억달러(약 3400억~4500억원)에 불과했으니 1조5000억원의 기금을 가진 관정재단이 꿀릴 이유도 없죠.”
그러면 내년부터 예정대로 한국의 노벨상이 제정되는 것일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상을 제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검토할 사항이 너무 많더라고요. 아직은 확정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상금의 재원은 올해 하반기부터 확보가 된다는 게 관정의 설명이다. 하지만 관정과학상을 노벨상과 어떻게 차별화할지, 학문적 이론 창출에 손을 많이 들어주는 노벨상과 달리 실용적 과학에 더 역점을 둘지 등을 아직까지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칫 일본의 ‘재팬 프라이즈’처럼 국수주의적 성향으로 국제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전철을 밟을까 봐 이를 피해야 한다는 걱정도 있다고 했다. 또 시상을 관정 생전에 시작하느냐, 사후에 하느냐도 재단 내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강대국들이나 세계적 부호들이 이런 상을 만든다면 지식 독과점이나 상업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겠죠. 한국에서 우리 정도 되는 재단이 만드는 상이 오히려 공정성, 공신력에 더 큰 점수를 얻을 수 있어요.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노벨과 관정은 화학 분야 경영자 출신으로 부를 일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크다. 어느 날 신문사 부고기사에 오보로 노벨의 사망기사가 실렸는데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돈을 벌었다고 해서 ‘죽음의 상인’으로 묘사된 걸 보고 노벨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노벨상이 제정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정은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할 수는 없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는 생활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있다.
동문으로서 더 자랑스러운 건 서울대의 랜드마크가 된 관정도서관이다. 2015년 준공된 이 도서관은 매년 3000명의 세계 대학 도서관 관계자들이 시찰하고 일반인들도 나들이 삼아 들르는 일종의 관광명소가 됐다. 온돌 바닥에, 방대한 콘텐츠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보고 싶은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이 도서관은 관정이 600억원을 기부해 탄생하게 됐다.
도서관 프로젝트는 2013년에 시작됐다. 당시 오연천 서울대 총장이 관정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관정교육재단이 다년간 서울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한 데 대해 감사패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오 총장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도서관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예산이 없어 걱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필요한 자금 규모를 들은 관정은 선뜻 “내가 대겠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이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데 일조한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가끔 시간이 날 때마다 가보고 있습니다.”
관정은 특히 서울대 학생들이 창조적 지식을 창출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 노벨 물리학상을 탄 미국의 석학이 방한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가 그러더군요. 지식에는 수동적 지식과 능동적 지식이 있는데 남한테 배워 아는 지식보다 스스로 알아내는 새 지식을 창출해야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고. 곧 창조적 지식의 창출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수동적 지식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선 이제 능동적·창조적 지식을 추구해야 하고 서울대생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몇 백억, 몇 천억을 선뜻 기부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관정이 장학재단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유럽 출장 길에 들른 스위스가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는 게 관정의 설명이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1960년대 말 어느 날 사업상 유럽을 가게 된 이 이사장은 바쁜 비즈니스 일정 중 딱 하루 스위스 여행을 가기로 했다. 처음엔 단 하루 머물려던 계획은 일주일로 연장됐다.
당시 관정의 눈에 들어온 건 한국보다 부존자원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나을 것도 없는 스위스가 세계적인 부국으로 우뚝 선 모습이었다.
“스위스는 표준어가 딱히 없이 3개의 언어를 혼용해서 쓰는 나라에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산물 자원이 풍부한 우리나라와 달리 척박한 땅에 바다도 없이 들어앉은, 한 마디로 우리보다 못한 나라가 어떻게 우리의 10배 이상이나 잘살고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비결이 궁금하기도 했어요. 보아하니 바로 사람이더라고요.”
산업혁명을 완성한 유럽 제국들이 국력을 키우고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데는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있다고 본 것이다. 관정은 이때부터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시키는 데 조건 없이 앞장서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재단을 만들기엔 자금이 부족했다. 관정은 일단 돈부터 더 많이 벌기로 했다. 30여 년을 사업에만 매진한 뒤 돈이 상당히 모였고, 2000년에 그 뜻을 이룬 것이다.
“20년이 지나니까 이제 조 단위 자산으로 확충됐어요. 이제 세계적으로 내놔도 크게 빠지지 않지. 세계 모든 종합 자선 재단들과 비교해도 80위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관정은 진짜 일을 열심히 했다. “내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사업을 시작한 지 올해로 76년이 됐는데 수술 한두 번 하느라 일을 못하고 입원한 날이 1년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런데 그냥 부자가 되면 안 돼. 사람이 목적이 있어야죠.”
관정은 집이 따로 없다. 40대 중반에 지은 살림집을 10년 전에 헐고 재단 건물을 지었다. 현재는 이 건물 6층을 임대해서 임대료를 제대로 내고 살고 있다.
“일을 하다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다해 쓰러지는 게 내 소원이오.”
귀만 많이 어두울 뿐, 꼿꼿한 자세, 단단한 목소리, 자신만의 철학을 펼치는 명민함에다 골프를 즐기는 열정까지, 관정은 아직까지 종(終)을 이야기할 단계는 아닌 듯 보였다.
장수는 혹시 가족력일까? “고조부부터 5대가 장수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더라도 70~80대에 돌아가신 선조들과 달리 100세를 앞두고 있는 특별한 비법이 있을 만도 했다.
“90 넘으면 2식(食)이 좋아. 내가 고안한 균형 잡힌 식단도 비결이라면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관정은 일단 야채 한 접시를 천천히 잘 씹어 비운 뒤 고향인 경남 의령군에서 떡방아로 찧어 만들어 부쳐주는 찹쌀떡 두 쪽을 먹는다. 조기, 가자미, 또는 대구포를 얇게 포 떠 지진 것 한두 쪽, 호박죽이나 깨죽 한 공기를 마친 뒤 커피 한 잔이 마무리다. 정말 소박하면서도 영양소가 골고루인 식단이다.
“건강은 하늘과 조상이 주신 선물입니다. 나는 그 선물을 잘 관리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이제껏 장수한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인터뷰 말미에 요즘 뜨고 있는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젊은 대변인을 토론으로 뽑을 뿐만 아니라 연로한 상임고문들로부터도 조언을 구한다는 소식에 이렇게 말했다.
“나이 먹은 사람 이야기도 들어봐야해. 잘 하고 있는 거야. 내 나이가 90 정도만 돼도 자진해서 상임고문 지원할 텐데…. 재작년, 작년, 올해가 계속 다르다는 걸 느껴요. 그저 괜한 소리일 뿐이오.”
이종환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 프로필
1923년 경남 의령 출생, 마산중고 졸업, 1944년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 2년 수료.
그 후 학병으로 소·만 국경과 오키나와를 오가며 사선을 넘나들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일찍이 1958년에는 삼영화학공업㈜ 창업, 현재 삼영그룹(16개 계열사)으로 발전
2002년 사재 1조5000억원 출연, 아시아 최대의 장학재단인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창립,
세계 1등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는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2003년 금탑산업훈장,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2014년 서울대 명예공학박사, 2021년 4·19 문화상, 성균관대 명예경영학박사 등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