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긍정적이었던 점
중세(中世)가 아무리 암흑(暗黑)의 시기(時期)라고 하나 결국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文藝復興), 학예 부흥(學藝復興)]의 도래(到來)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무기를 비롯한 싸움의 기술 또한 모르는 사이에 점진적(漸進的)으로 변화(變化)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이라는 행위가 결코 패(敗)하려고 벌이는 것이 아니라는 불변(不變)의 사실(事實)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대(古代)에 비해 규모(規模)가 작아졌고 전투에 참여(參與)하는 이들이 전문가 집단(專門家集團)으로 한정(限定)되었어도 전쟁의 목적(目的)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중세라도 시간이 흐르며 전쟁의 방법이 변화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남보다 좋고 뛰어난 무기를 보유(保有)하기 위해 전쟁 당사자(當事者)들은 노력(勞力)했고 이러한 과정(過政)을 통해 변화(變化)는 있었습니다.
[ 1 ]편에서 중세의 특징(特徵)이 서(西)유럽에서만 한정(限定)된 역사(歷史)라고 설명(說明)했지만,
무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리 변화가 적었더라도 결국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계속 제자리에만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중세 기사들의 토너먼트 재현 행사
당연히 변화가 있었고 그중에는 전쟁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린 새로운 개념(槪念)의 무기도 등장(登場)했습니다.
바로 총포(銃砲, Gun)입니다.
활(弓, bow)로 불가능(不可能)한 먼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총포의 등장은 전쟁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하는 변곡점(變曲點)이었습니다.
총포에는 한 가지 전제가 반드시 따라다니는데 바로 화약(火藥)입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후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화약은 그 전과 후를 뚜렷이 나누어 버린 발명품(發明品)입니다.
↑화약의 등장은 역사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핀란드 헤멘린나(Hämeenlinna) 포병 박물관에 전시 중인 M1897 75mm 포. 현대 야포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기념비적 무기다.
<출처: (cc) User:Balcer at Wikimedia.org>
↑1870년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 포병.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야포는 보병과 함께 움직이며 화력을 지원하는 든든한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누가 만들어 군사용(軍士用)으로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한 기록(記錄)은 없지만 문헌(文獻)에 최초로 등장한 지 불과 50여 년도 안되어 서유럽에서도 화약은 군사용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살상 기술(殺傷記述)을 습득(習得)하는데 발 빨랐던 점은 중세라고 별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1324년 프랑스의 메츠(Metz)에서 벌어진 전투에 포드페르(Pot-de-fer)로 불리는 최초(最初)의 포(砲)가 등장한 것이 기록된 이후 점차 포의 등장 빈도(頻度)가 높아 졌습니다.
↑최초의 총포인 포드페르
처음에는 소리만 요란했지 사용하기 까다로운 무기로 여겨졌지만 갈수록 위력(爲力)을 발했습니다.
화약(火藥)의 폭발력(爆發力)을 이용해서 투석기(投石機)보다 멀리서 공격할 수 있게 되자 기사(騎士)나 특정 계급(特定階級)에 의한 싸움이었던 전쟁의 방법이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포의 등장은 당연히 병사가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포, 즉 총(銃)의 탄생(誕生)을 유도(誘導)했습니다.
당시 제련술(製鍊術)을 고려(考慮)할 때 크기가 작은 총이 포보다 제작(製作)하는데 많은 기술력(技術力)이 요구(要求)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와 총으로 싸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총인 탄넨베르크건(Tannenberg Gun↑)이 등장한 1400년 전후는 포가 등장(登場) 때와 비슷한 시기(時期)입니다.
그만큼 총에 대한 집념(執念)이 대단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음은 중세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의미(意味)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시간(時間)과 장소(長所)를 미리 정한 후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대표(代表)로 나서서 결투(決鬪)를 벌이는 방식(方式)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습니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은 유럽 최고(最古)의 화약무기이다. 중국의 화총(火銃)과 거의 같은 구조적(構造的)인 형태(形態)를 취하고 있으며 1399년이전 유럽에서 제작된 초창기 개인화기(草創期個人火器)이자 화기(火器)이며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모든 소형 화약무기(小形火藥武器)의 원형(原型)으로 보면 될 것이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은 유럽 최고(最古)의 화약무기이다. 중국의 화총(火銃)과 거의 같은 구조적(構造的)인 형태(形態)를 취하고 있으며 1399년이전 유럽에서 제작된 초창기 개인화기(草創期個人火器)이자 화기(火器)이며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모든 소형 화약무기(小形火藥武器)의 원형(原型)으로 보면 될 것이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은 자루를 포함한 전체 길이는 120∼150㎝이며, 전체 중량(全體重量)은 2.5㎏이지만, 실제 총신(銃身)의 길이가 33㎝에 달하고, 총신만의 중량도 1.24㎏으로 총신이 차지하는 비율(比率)이 큰 화기이다. 총신의 끝부분으로 화약과 탄환(彈丸)을 장전(裝塡)하고 화구(火口)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전장식(前裝式, muzzleloading) 총기(銃器)이다.
탄넨베르크 건과 함께 하켄부크세(hakenbuchse), 아케버사리스(arcubusariis), 핸드 컬버린(hand culverin) 같은 다양한 형태의 초기형 화약무기, 다시 말해 핸드 캐넌(hand cannon)이 14∼15세기 사이에 등장하였으나 최초의 화기라는 타이틀은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에게 양보(讓步)하여야만 했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의 위력(爲力)은 10m 이내의 거리에서는 2mm의 스테인레스 스틸을 관통(貫通) 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00m를 넘지 않으므로 원거리 저격무기(遠距離狙擊武器)로는 부적합(不適合)하다. 근거리(近距離) 저격용으로만 사용이 가능한 무기체계인 것이다.
독일어로 ‘갈고리가 있는 총’이라는 뜻의 하켄부크세(hakenbuchse 유럽의 사출무기(射出武器)는 14세기께 등장하여 주로 공성전(空城戰)에 사용된 초기형 화기로 총신과 나무손잡이 결합 부위(結合部位)에 갈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15세기 초 처음 등장했고 이후 아케부스(arquebus)로 명칭(名稱)이 통일된 아케버사리스는 현대 견착식 무기와 비슷한 총대가 특징이며 위력과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 개인화기이다.
이 같은 개인화기는 장창을 든 적을 장창기병의 타격범위보다 먼 거리에서 제압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특히 말 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핸드 컬버린은 흔히 카빈으로 불리는 기병용 총으로 분류되며,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화약무기이며 이후 등장한 다양한 화약무기의 원형이 된 무기체계로 볼 수 있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은 자루를 포함한 전체 길이는 120∼150㎝이며, 전체 중량(全體重量)은 2.5㎏이지만, 실제 총신(銃身)의 길이가 33㎝에 달하고, 총신만의 중량도 1.24㎏으로 총신이 차지하는 비율(比率)이 큰 화기이다. 총신의 끝부분으로 화약과 탄환(彈丸)을 장전(裝塡)하고 화구(火口)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전장식(前裝式, muzzleloading) 총기(銃器)이다.
탄넨베르크 건과 함께 하켄부크세(hakenbuchse), 아케버사리스(arcubusariis), 핸드 컬버린(hand culverin) 같은 다양한 형태의 초기형 화약무기, 다시 말해 핸드 캐넌(hand cannon)이 14∼15세기 사이에 등장하였으나 최초의 화기라는 타이틀은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에게 양보(讓步)하여야만 했다.
탄넨베르크 건(Tannenberg gun)의 위력(爲力)은 10m 이내의 거리에서는 2mm의 스테인레스 스틸을 관통(貫通) 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00m를 넘지 않으므로 원거리 저격무기(遠距離狙擊武器)로는 부적합(不適合)하다. 근거리(近距離) 저격용으로만 사용이 가능한 무기체계인 것이다.
↑화약 주머니와 장전을 발에 차고 손대포를 발사하는 스위스 군인
15세기 후반(1874년 제작)
독일어로 ‘갈고리가 있는 총’이라는 뜻의 하켄부크세(hakenbuchse 유럽의 사출무기(射出武器)는 14세기께 등장하여 주로 공성전(空城戰)에 사용된 초기형 화기로 총신과 나무손잡이 결합 부위(結合部位)에 갈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며, 15세기 초 처음 등장했고 이후 아케부스(arquebus)로 명칭(名稱)이 통일된 아케버사리스는 현대 견착식 무기와 비슷한 총대가 특징이며 위력과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된 개인화기이다.
이 같은 개인화기는 장창을 든 적을 장창기병의 타격범위보다 먼 거리에서 제압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특히 말 위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핸드 컬버린은 흔히 카빈으로 불리는 기병용 총으로 분류되며, 군사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화약무기이며 이후 등장한 다양한 화약무기의 원형이 된 무기체계로 볼 수 있다.
↑재현된 탄넨베르크건
사실 기사도(騎士道)라고 자찬(自讚)하는 이런 방식도 자기들끼리의 싸움에서나 유효(有效)하던 체면(體面)치레였을 뿐입니다.
십자군(十字軍)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교도(異敎徒)와의 전쟁에서는 야비(野卑)하다고 손가락질받던 기습(奇襲) 같은 전술(戰術)은 물론이거니와 교황(敎皇)이 사용을 금지(禁止)한 석궁(石弓)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그러한 잔혹(殘酷)한 과정(過程)을 통해 무기와 전쟁의 기술은 변화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되는 점은 고대(古代)에 비해 규모(規模)가 작았다는 점입니다.
↑기사도는, 중세 유럽에서 성립(成立)한 행동 규범(行動規範)이다. 기사가 따라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지만, 실제 기사들이 기사도(騎士道)를 따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검 등의 무기, 갑옷을 독점(獨占)하는 장원 영주 등의 지배층(支配層)은 기사도에 정면(正面)으로 배치(排置)되는 행동(行動), 즉 배신(背信), 탐욕(貪慾), 약탈(掠奪), 강간(强姦), 잔학행위(殘虐行爲) 등을 예사롭게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폭력(暴力)을 억제(抑制)하기 위해 기사도라고 하는 윤리(倫理) 규범이 성립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기사도를 따르는 기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기사도에 따라 행동하는 기사는 주위(主位)로부터 칭찬(稱讚)을 받게 되었고, 기사도 그것을 명예(名譽)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전쟁의 규모가 작았던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일 중세에도 고대 전쟁의 스케일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인류사(人類史)에 남겨진 살육(殺戮)의 기록(記錄)은 지금보다 훨씬 컸을 것입니다.
몽골의 정복 전쟁(征服戰爭)처럼 대규모 살상(大規模殺傷)이 흔했던 당시 동양(東洋)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기에 그나마 규모라도 줄일 수 있었던 환경(環經)이 조성(助成)되었던 서(西)유럽의 중세는 어쩌면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肯定的)인 시대였는지도 모릅니다●
[출처] 그때도 치열하게 싸웠다 [ 끝 ]z|작성자 aug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