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로 되살아난 캐나다 국가 기간산업 논의
美 의존도 탈피 위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움직임 활발
1971년 트랜스캐나다 하이웨이 이후 최대 규모 논의 중
"미국과 중국 사이 새 활로 개척"... 정계·학계 공감대 형성
미국의 관세 폭탄과 무역 갈등으로 캐나다가 국가 경쟁력 강화와 자립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동서를 연결하는 '인프라 벨트'부터 항만 확장, 철도 현대화에 이르기까지 1971년 트랜스 캐나다 하이웨이(1번 고속도로) 완공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국가 기간시설 확충 논의가 진행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부과와 '51번째 주' 발언은 캐나다가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대체 무역 경로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연방 정치 지도자들과 주 수상들, 산업계 관계자들은 정치적 논란으로 지체되던 프로젝트들을 신속히 진행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캘거리 대학교 경제학과 연구에 따르면, 토론토-퀘벡시티 간 39억 달러 규모의 고속철도 계획과 같은 지역 프로젝트를 넘어 캐나다 전체를 아우르는 메가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캐나다 태평양철도나 1번 고속도로 규모의 국가적 프로젝트가 GDP를 견인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수십 년간 캐나다가 민간 부문에 인프라 건설을 맡겨왔지만, 최근 몇 년간 리스크와 비용이 크게 증가하여 대기업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파이프라인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이 현상은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트럼프의 관세 조치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한 대규모 건설 계획은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노던 게이트웨이와 에너지 이스트 파이프라인부터 BC주와 노바스코샤주의 LNG 터미널, 몬트리올, 써리, 해밀턴의 경전철과 지하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형 프로젝트들이 취소되거나 중단된 상태다.
산업계는 관료주의적 절차와 지역 이기주의, 자주 바뀌는 규제 체계가 투자를 가로막는 주요 장벽이라고 지적한다. '왜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가(Why Nothing Works)'의 저자 마크 던켈만은 이런 상황에서 너무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사실상 '무제한적인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아이디어 중 하나는 동서를 연결하는 '에너지 수송로'다. 이 개념은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캘거리 대학교 공공정책 스쿨의 연구자들이 2016년과 2018년에 캐나다의 해안을 잇는 '북부 인프라 벨트'를 제안하면서 새롭게 부각됐다.
이 사업의 핵심은 고속도로, 철도, 전력 송전선, 파이프라인 등 캐나다 전역을 연결하는 인프라를 한 공간에 집중 배치하는 데 있다.
KPMG 캐나다의 대형 프로젝트 자문 책임자 잭 파스톤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100~500미터 폭의 복합 인프라 구역을 조성해 석유와 전력뿐 아니라 통신망, 탄소 포집 시설 등 미래 필요시설까지 수용할 수 있는 범용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파스톤은 이와 함께 "사전 허가된" 산업단지 조성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에드먼턴 북동쪽에 위치한 앨버타 산업 중심지를 성공 사례로 들며, "환경 영향 평가와 지역사회 협의를 사전에 완료해두면 기업들이 투자할 때 승인 과정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대규모 건설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캐나다의 항만 현대화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밴쿠버 최대 항구의 교통 체증 해소가 시급한 과제이며, 서해안의 프린스 루퍼트와 동부의 핼리팩스, 몬트리올 같은 기존 항만 업그레이드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장기적으로 북쪽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매니토바 북부의 처칠은 캐나다 유일의 북극 심해항으로, 하퍼 정부가 캐나다 밀 위원회를 해체한 이후 활동이 크게 줄었다.
파스톤은 북부(유콘, 노스웨스트 준주, 누나부트)가 캐나다의 미래에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 지역은 희토류, 코발트, 니켈, 구리, 텅스텐 같은 중요 광물이 풍부하며, 이는 전기차 배터리, 재생 에너지 시스템, 첨단 전자제품과 같은 신흥 기술에 필수적이다.
이 대규모 국가 인프라 구상은 현대의 복잡한 사업 승인 절차와 불가피하게 부딪힌다. 과거에는 소수 결정권자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면서 합의에 이르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캐나다에서는 특히 원주민과의 역사적 갈등으로 인한 불신이 깊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토지 권리 문제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제이슨 케니 전 앨버타 주수상은 "원주민들에게 자원 개발 프로젝트의 지분을 제공해 장애물을 기회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초대형 사업의 예산은 천문학적이다. 토론토-퀘벡시티 고속철도 사업만 해도 8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일각에서는 이 정도 규모로는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처럼 막대한 자금을 민간기업이 단독으로 부담하기 어려워 결국 연방정부가 주도하거나 파트너십을 맺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에 건설된 캐나다 태평양철도가 100년이 넘게 제조업과 농업 등 전 산업 분야에 혜택을 주고 있는 것처럼,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관건은 캐나다 국민과 정치권이 미래 이익을 위해 지금 당장 수백억 달러를 투입할 의지가 있느냐다. 예산 초과 위험 외에도 정치적 부담도 크다. 과거 캐나다 태평양철도 건설 과정의 각종 스캔들로 19세기에 연이어 두 정부가 무너진 전례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 오히려 캐나다의 인프라 현대화 추진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치권에서 "좋은 아이디어"라는 말로 넘기던 제안들이 이제는 구체적인 공론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