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과 김환기를 잇는 뮤즈, 그리고 문인과 예술경영가 [김향안 다시 보기-上 ]
THE인천 기사 입력 2024.02.24. 06:32 수정 2024.02.24. 14:37
글 : 윤정국 K문화경영연구소 대표
편집자가 드리는 글 :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마지막 임종을 지킨 그의 아내 변동림은 이상과 사별 후 7년이 지난 뒤 1944년 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재혼했습니다.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을 취해 자신의 이름을 바꾼 그녀는 일생 동안 김환기의 내조에 충실해 그를 세계적 화가로 발돋움하게 했습니다. 이상과 김환기, 20세기 두 거장 예술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뮤즈이자 예술동반자였던 김향안(金鄕岸 1916~2004). 오는 2월 29일 그녀의 작고 20주기를 맞아 두 거장의 예술세계를 잇는 매개자로서, 또 문인과 예술경영가로서 그녀의 삶과 예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과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이 나오는가 하면 지난해 11월에는 창작뮤지컬 라흐헤스트(프랑스어로 ‘예술은 남다’라는 뜻)가 대학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습니다. 'The인천'에서 오는 29일 작고 20주기 맞아 김향안의 삶을 2회에 걸쳐 재조명합니다.
이상과 짧았지만 강렬했던 신혼생활
김향안(본명=변동림)의 첫 남편 이상
1930년대 모던걸이었던 변동림은 이화여전 영문과 대학생 시절 시인 이상을 만났다. 두 사람의 중계자는 변동림의 친오빠 변동욱. 그는 당대 경성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였던 카페 ‘낙랑파라’에서 음악을 선곡하던 멋쟁이였다. 변동림은 오빠가 일하는 이 카페에 자주 들러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곤 했다. 이상은 카페에서 자주 보던 여대생 변동림을 그의 오빠를 졸라 소개받았다.
변동림은 “밤색 두루마기의 한복 차림인 이상은 검은 눈이 이글거리듯 타오르고 유난히 광채를 발산했다”고 나중에 수필집에서 회고했다. 1936년 카페 낙랑파라에서 처음 만난 둘은 격렬하고도 불꽃 튀는 사랑을 했다. 그들은 청량리 밖 갈대숲을 걸으며 문학과 음악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밀회를 즐겼다. 이때 이상의 소설 ‘날개’가 발표되자 많은 사람이 비웃었지만 그녀는 이상의 예술세계를 존중해 그 결말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상은 변동림에게 “우리 같이 죽을까?”“어디 먼데 갈까?”하고 말했는데, 이 말은 변동림에게 사랑의 고백으로 들렸다. 그 후 변동림은 어머니에게 친구한테 갔다 온다고 거짓말하고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왔다. 그들은 동소문 밖 개울가 작은 집에서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겼다. 당시 이들의 동거를 스캔들로 비난하는 소리가 많았으나 변동림은 이상의 유혹이 아니고 자신이 이상을 좋아해서 따라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들은 도쿄로 곧 떠날 것이라고 선언해 잡음을 잠재웠고, 두 집안에서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둘은 결혼식 후 넉 달쯤 함께 살았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 경성에서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들은 도쿄로 가는 길이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거기서는 더 자유롭고 더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이상이 먼저 1936년 10월 도쿄로 떠났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도쿄였지만, 그곳의 현실은 더 가혹했다.
이상은 이듬해 4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하던 중 폐결핵이 악화돼 도쿄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이상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경성의 변동림은 12시간의 기차와 8시간의 연락선, 또 24시간의 기차를 타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이상은 센비키야(千疋屋)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 니혼바시의 센비키야까지 갈 시간이 없어 변동림은 서둘러 병원 근처의 노점에서 멜론을 사왔다. 그러나 이상은 한 조각도 못 넘기고 생을 마감했다. 1937년 4월의 일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의 유해를 수습해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미아리에 안장했다. 비목에 묘주(墓主)로 변동림을 기입했다.
변동림은 이상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변동림에 따르면 이상은 당시 가장 앞선 교육을 받았으며, 건축과 미술과 시를 동시에 습득한 융합예술가였다. 이상의 난해시 ‘오감도’에 대해 그녀는 “시는 그림처럼 보고, 그림은 시처럼 읽는 유럽의 개념예술을 시도한 작품”이라며 동양의 불길한 ‘까마귀’와 서양의 불길한 숫자 ‘13’을 구성해서 무서운 그림을 그린 작품으로 설명했다. 까마귀(일본을 상징)가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아해들은 무서워서 달아날 곳을 찾지만, 땅 위에는 숨을 곳도 달아날 곳도 없었고, 그래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의 전쟁이 벌어진다고 작품을 해설했다. 그녀는 “이상이 살다 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환기 만나 김향안으로 제2의 인생 살며 헌신적 내조
김향안의 두번째 남편인 김환기와의 결혼 사진
신혼 초에 남편 이상을 떠나보낸 변동림은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간간이 수필과 소설을 기고하며 지내던 그녀는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쓰오(則武三雄)의 소개로 수화(樹話)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전남 신안군 기좌 섬에서 온 화가는 키만 큰 시골뜨기라는 게 첫인상이었다. 이내 화가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후 그가 보낸 편지가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다정다감한 글이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꽤 가까워졌다. 김환기는 그러나 솔직하게 그녀에게 직접 다가가지 못했다. 조혼, 이혼, 딸 셋… 김환기의 이런 곡절을 뒤늦게 알게 된 변동림은 친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애들은 데려다 교육시키면 되지” 하며 결국 1944년 28세에 아이 셋 딸린 홀아비 김환기와 재혼했다. 그와 결혼 후 그녀는 김환기의 성을 따르고 이름도 그의 아호 향안을 취해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꾸어 제2의 인생을 살았다.
결혼 생활은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김향안은 김환기가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녀는 살림이 어려울 때도 예술 취향으로 백자 항아리를 사 들고 오는 김환기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으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었던 피난 시절에도 생계를 위해 친구들에게 그림을 팔러 다녔다. 이 같은 희생 덕분에 해방 후 김환기는 서울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 역할을 해나갔다.
김향안이 준비한 김환기의 파리 시대
1956년 김환기는 자신이 추구해 온 예술의 위치를 알아보고자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 미술계에 진출했다. 이 일도 김향안이 주도했다. 그녀는 1년 먼저 파리로 가서 남편의 세계 무대 데뷔를 준비해 놓고 그를 불렀다. 파리에 먼저 도착해 수준급의 프랑스어 실력을 갖췄던 그녀는 김환기의 통역사이자 대변인이었으며,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작업을 뒷받침했다. 훗날 김환기는 한국의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 엄마의 희생적인 노력과 협조가 없었다면 나는 잠시도 편히 붓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고 썼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재능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투자하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1959년까지 이어진 4년간의 프랑스 생활에서 김환기는 김향안의 도움으로 5차례의 개인전을 열며 김환기 예술을 세계 무대에 처음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1959년부터 1963년까지 홍익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다. 이때 부부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학장으로서 행정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김환기는 다시 세계로 나갈 기회를 찾았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를 계기로 자극을 얻은 그는 이번에는 뉴욕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 하(下)편에 계속 -
※ 참고자료: 도서 『월하(月下)의 마음』(김향안 지음, 환기미술관, 2016년), 『이상 평전』(김민수 지음, 그린비, 2020년), 『시인과 화가』(윤범모 지음, 다할미디어, 2021년), 『살롱 드 경성』(김인혜 지음, 해냄, 2023년) / 논문 「김향안 수필 연구」(강정화, 2020년) / 인터넷 자료 「VISLA 인물 열전」(2021년)
윤 정 국 : 역사학도 출신으로 문화언론과 문화기획, 예술경영 현장에서 다양한 일들을 30여년 간 해왔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인천 을왕리와 무의도를 자주 찾습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초빙교수, 김해문화재단 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서울충무아트센터 사장, 동아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K문화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지역문화 예술경영 문화유산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향안 다시 보기 (下) – 이상과 김환기를 잇는 뮤즈, 그리고 문인과 예술경영가
THE인천 기사 입력 2024.02.26. 05:21 수정 2024.02.26. 10:55
글 : 윤정국 K문화경영연구소 대표
편집자가 드리는 글 : 'The인천'에서 2월 29일 작고 20주기 맞아 김향안의 삶을 24일, 26일 2회에 걸쳐 재조명합니다. (下편). 이상과 김환기를 잇는 뮤즈, 김향안. 그녀의 숭고한 사랑과 문인 및 예술경영가로서 삶을 되돌아 봅니다.
김환기 예술의 완성인 ‘뉴욕 시대의 점화(點畵)’, 이상과 통하다
김환기 부부는 재산을 정리하여 1964년 또 한 번 먼 길을 떠났다. 뉴욕에 첫발을 디딘 부부는 약 1년간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지원이 끝나버리자 또다시 생활고에 시달렸다. 두 사람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이번에도 김향안이었다. 그녀는 뉴욕에서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김환기가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뉴욕에서 다양한 미술을 마주하게 된 김환기는 수많은 조형 실험을 거쳐 1960년대 중반 본격적인 점화(點畵) 작품에 이른다. 점을 찍듯 그리는 추상화의 형태로 점차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어 나갔다. 김환기가 수십 년의 세월 끝에 도달한 작품이 ‘점 그림’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낳게 한다.
오랜 연구 끝에 시인 이상을 식민지 근대의 모순과 끊임없이 분투한 근대 최초의 융합예술가로 해석한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는 저서 ‘이상 평전’에서 김환기의 점화는 이상이 1931년에 쓴 작품 ‘삼차각설계도’ 중 연작시 ‘선에 관한 각서’에서 표명한 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다. 이상이 시에서 표현한 점들이 40년 후 김환기의 점화로 부활한 것이라고 본다. 김환기는 인생의 말년에 이상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고 김 교수는 추정한다. 두 거장 사이에 김향안(변동림)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김환기는 말년에 자신의 아내 김향안과 이상이라는 두 점을 이어주는 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상이 추구했던 작품세계가 뮤즈 김향안을 통해 먼 훗날 김환기에게까지 공명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김환기의 말년
김환기는 뉴욕에서 하루 16시간씩 작업하는 등 작품활동에 온전히 몰두했다. 그 결과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를 비롯한 여러 점의 대표작들을 완성했다. 하지만, 고행에 가까운 작업량으로 몸을 혹사한 그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다. 김향안은 나중에 수필집에서 “하필이면 힘 드는 일을 노경에 얻었을까. 몸이 말을 안 듣는데 자연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더 늙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이런 초조한 마음으로 육체를 혹사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74년 김환기는 결국 병원에서 목 디스크 수술 직후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30년간 동고동락했던 김향안은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고 슬퍼했다.
예술경영가로서 빛을 발한 김향안
남편이자 예술동반자였던 김환기의 죽음은 김향안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김향안은 세상을 떠난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정리하는 한편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여생을 보냈다. 예술경영가로서 김향안의 진가가 빛을 발한 것은 오히려 이때부터였다.
1975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성공적으로 김환기의 첫 회고전을 개최했으며, 글솜씨를 발휘해 1976~1978년 예술전문잡지 ‘공간’에 김환기를 회고하는 글을 10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또 김환기에 대한 해외 미술평론가들의 글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76년 7월 ‘공간’에 실린 카터 래트클리프(Carter Ratcliff)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의 리뷰는 국내 미술계에 김환기의 국제적 위상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외 언론매체에 김환기 작품 정보가 잘못 게재될 경우 수정을 요청하고 각종 오해를 바로잡는 등 김환기 미술을 적극 수호했다.
2019년 홍콩 경매에서 우리나라 미술품 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된 1971년 김환기의 작품 '우주' (코튼에 유채, 254cm×254cm, 개인소장).
김환기 작품을 체계적으로 소장 관리하고 전시할 수 있는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건립한 일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평소 “김환기의 영혼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라고 말하던 김향안은 이 미술관을 통해 김환기와 자신의 영혼이 영원히 머물 집이자, 후대를 위한 예술적 안식처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김향안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김환기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2019년 점화 ‘우주’가 우리나라 미술품 중 역대 최고가(132억 원)에 거래되는 등 오늘날 김환기의 작품들이 예술성과 시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김향안의 이런 노력 덕분이란 게 미술계의 중론이다.
어떤 이는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남편이 작고한 지 30년 후인 2004년 뉴욕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 그녀는 미국 뉴욕 근교 발할라 마을 켄시코 공동묘지의 남편 김환기 묘소 옆에 안장됐다.
독립된 문인으로서의 삶도 재조명되어야
김향안은 1930년대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이후 여러 권의 수필집을 남겼다. 그러나, 김환기와 이상의 그늘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 발표된 논문 ‘김향안 수필 연구’(강정화)는 그녀의 글쓰기는 김환기를 정전(正典)으로 만드는 과정의 기록이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김환기는 김향안의 삶이었다. 이 사실조차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로 남긴 김향안은 독립된 문인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글들을 통해 이상과 김환기, 두 예술 거장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또 예술경영가로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알 수 있다. 대중은 그녀를 ‘두 거장 예술가의 뮤즈’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작고 20주기를 맞아 두 거장의 예술세계를 잇는 뮤즈로서, 또 예술경영가와 문인으로서 살다 간 김향안의 삶에 대한 재조명이 다각도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끝-
※ 참고자료: 도서 『월하(月下)의 마음』(김향안 지음, 환기미술관, 2016년), 『이상 평전』(김민수 지음, 그린비, 2020년), 『시인과 화가』(윤범모 지음, 다할미디어, 2021년), 『살롱 드 경성』(김인혜 지음, 해냄, 2023년) / 논문 「김향안 수필 연구」(강정화, 2020년) / 인터넷 자료 「VISLA 인물 열전」(2021년)
윤 정 국: 역사학도 출신으로 문화언론과 문화기획,예술경영 현장에서 다양한 일들을 30여년 간 해왔습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인천 을왕리와 무의도를 자주 찾습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초빙교수, 김해문화재단 대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처장, 서울충무아트센터 사장, 동아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K문화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지역문화 예술경영 문화유산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