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오
9,1-8)
"Courage,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말씀의 초대
이사악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가 당신을 경외하는 것을 아시고 이사악 대신 숫양 한 마리를 제물로 마련해 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것은 결국 당신의 신성을 입증하신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을 확증해 보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겠다.”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 하느님의 약속이 온통 걸려 있는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결단을 창세기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라고 요약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라는 말씀은 신명기와 잠언 등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이지만, 그 의미가 깊고 다양하여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 표현들
가운데서 ‘경외’를 한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지혜 문학에서 경외는, 인간이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의 한계점에
도달하여 하느님 앞에 엎드리는 순간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잘 알아서, 또는 하느님과 친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신심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신비 앞에, 또는 인간을 완전히 압도하여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차원이 다른
지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예상하여 안심하고 모리야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산에 오르는 아브라함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순종하고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경외해야 할 분이십니다.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어 당신의 신성을 입증하신 예수님도 경외를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과 같은 시험과 시련을 우리에게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신뢰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봅니다.
가시를 가진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무의 가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잎이나 가지, 껍질 등이 변형되어 만들어집니다. 그 종류는 장미, 찔레, 해당화,
아까시나무, 탱자나무, 주엽나무 등이 있지요. 그런데 이 가시를 가지고 있는 나무들의 공통점은 거의가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나무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가시에 온 힘을 쏟아 부어서 그럴까요? 그에 반해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무는 큰 나무가 되어 여러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글에서 이
가시를 가진 나무를 가리키면서 사람 역시 마음에 가시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가시를 가지면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가시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을 통해 나오는 가시, 손과 발을 통해 나오는 육신의 가시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통해 나오는 마음의 가시 역시 그 크기와 숫자가 대단합니다. 실제로 이런 가시들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성인 성녀의 모습이었고, 주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들을 줄이는데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얼마 전에 청년들과
함께 하는 독서 모임에서 아들러 심리학이 담겨 있는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분명히 맞는
말인데, 그렇게 살기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삶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큰 나무들이 결국 다양한 용도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가시를 버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참 기쁨의 삶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시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치유를 위해 찾아온 중풍병자에게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라는 가시를 드러냅니다. 물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온 가시였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편견이라는 가시를 통해 그동안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모든 행적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시를 없애 나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나만을 보호하고 잘 되려는 마음에서 만드는 가시를 통해서는 결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가시들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가시들도 하나씩 뽑아버려 내 몸이 재창조될 수 있도록 성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시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곳,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타인의 결점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르나르).
영적인 삶을
사는 방법
나의 지식과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남의 돈을 내 주머니에 넣는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학생이 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배우기 싫어서입니다. 또한 사장에 사원이 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사장을 통해 돈 벌기가 싫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따져보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영적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학생이 선생님께
대드는 순간 더 이상 그 선생님으로부터 지식과 생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장님께 대드는 순간 그 사장님을 통해 돈을 벌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대드는 순간 영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참 기쁨의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대들겠습니까?
신앙인은 배짱이
생기지요.
-이기정신부-
권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재력 권력이 세상에선 돋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등하다지만 재력 권력 앞에선 눈치 보며 아무 힘도 못씁니다. 그러나 인격자고
스승답고 도사 같은 분은 눈치코치 보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 중에서
예수님이 대표적이 아닐까 싶으며 저는 그리 믿습니다. 재력 권력보다 더 높은 힘은 하늘의 힘이라는 것쯤 알고 살아야 되겠지요. 신앙인은 이런
하늘의 힘님 예수님의 권한을 믿고 살기에 배짱이 생기지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마태오 9,6~7)”
-조재형신부-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예비 신학생 담임 부제님,
수녀님들과 제주도에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다들
즐거워하는데,
저는 몸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감기 기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의 흙 돼지를
먹어도,
회를 먹어도 그리
맛이 없었습니다.
입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무렵에는
감기도 좋아지고,
입맛도 돌아와서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번에 하나 느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내 몸 상태가 좋지를 않으면 그림의 떡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노동을 하고,
배가 고픈 상태라면
찬밥에 김치만 먹어도 꿀맛과 같을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면형의
집에서 머물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피정의 집입니다.
우리들 이외에도
많은 분들이 피정의 집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제주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기도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면형의 집에서의 기도가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주도의 어느 식당
화장실에 적혀있는 글입니다.
‘그럴 수
있나!’라고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들이 원망스럽고,
짜증나고,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
세상에 용서 안 될 일도 없고,
사랑 못할 일도
없고,
굳이 다투고 싸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게는 큰 가르침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제 몸이 감기
때문에 ‘아플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제주도에서의 시간들이 제게는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주도까지 와서 ‘몸이
아플까’라고 생각하면 속만
상하고,
짜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수
있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들이니,
하느님께서 데려가실
수도 있지!
그러니
원망과,
슬픔은 뒤로 한 채
아들을 하느님 제단에 바칠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한
아브라함에게 더 큰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면
신앙의 역사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럴 수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들을 고쳐 줄 수 있나,
5000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나,
풍랑을 잠재울 수
있나,’라고 생각을 하니
이해 할 수도 없고,
배가
아프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보지 못하고,
꼬투리만 잡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다는
말이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가!’입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닫히니
지극히 당연한 것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으로
지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걸작품
-반영억신부-
오래 전의
일입니다. 성지 순례를 통해 로마, 베니스, 피렌체, 피사, 나폴리, 바티칸의 여러 성당과 광장, 종탑, 문, 세례당 등등을 보면서 신앙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 졌기에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걸작품입니다. 걸작품을 통하여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이 더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당은 그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와 그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는 이들에 의해 거룩함이 더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예술작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름다움은 목적하는 바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옛 것을 보수하는데 급급해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혼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작품들이 오늘도 많이 만들어지길
희망합니다. 옛것이 고귀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작품도 역사의 변화를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숨어있습니다.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손길이 더 바쁘게 움직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사실 중풍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게 하기위해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음의
승리
-이수철신부-
기도棋道,
다도茶道 검도劍道, 수도修道 등 어느 도道의 경지에 이르면 체험 내용도 유사성을 지니게 됩니다.
'도道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어제
읽은 바둑계의 전설이 된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이자 불세출의 천재기사 조훈현이 최근에 쓴 책의 서문이 감동이었습니다.
'바둑'을
하느님으로, '생각'을 '믿음'으로 '기원'을 '성당'으로 바꿔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참으로
간결담백한 진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나는
하느님 하나밖에 모른다.
만
다섯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목포에 있는 유달성당의 문턱을 넘었던 그날부터 환갑이 훌쩍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건 오로지
하느님뿐이다.
나는
하느님밖에 몰랐지만 그 안에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경험했고, 희망과 절망, 성공과 실패, 음모와 배신까지도 경험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느님만 끌어 안고 사는, 따분하고 고요한 인생이었을지 몰라도 내 머릿속만은 누구 못지 않게 요동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나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다시 올라서고, 또 떨어지고 올라서기를 반복했다.
이기고
지는데에 이골이 날 만도 한데 아직도 패배의 아픔은 무뎌지지 않았다.
늙어가는
지금은 실수가 잦아져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하느님을 믿고 있다.
예전에는
이기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었는데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 없이 그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게 좋아서 믿는다.
타고난
승부사로 불렸던 나이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인생에서 승패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중요한 것은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면서 내 갈 길을 가는 것이다.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뻬앗겼을 때는 너무나 괴로웠지만,
어차피
빼앗길 타이틀이라면 내가 직접 키운 제자에게 빼앗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모든
타이틀을 다 빼앗기고 예선에서조차 탈락했을 때에는 이제 하느님 믿는 것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흔들렸지만, 여기가 바닥이니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 없었다.
결국은
믿음이다.
인생은
좋은 날만 이어지는 법이 없다. 좋은 날과
나쁜
날이 번갈아 가며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렇다면
이 길고 끝없는 고통의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것은
믿음밖에 없다.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믿음, 주변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확고한 믿음, 우리 인생을 좀 더 가볍고 즐겁게 꾸려나갈 수 있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
비록
하느님을 믿으면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나는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인생을 한 발 한 발 걷고 있다.
믿음의
위대한 힘으로 최선을 다해 자기만의 인생을 살자.
자신의
내적 영토를 최대로 넓히자.
영적전쟁에서
신중하게 포석하고 거침없이 공격하되 치열하게 방어하자.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이긴 것이다(조훈현;고수의 생각법, 4-7쪽 참조).-
어느
분야든 깨달음의 정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영원한 하느님의 전사,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모든 성인들의 삶에서 깨닫는 바 영원한 진리는 값싼 은총은, 값싼 축복은,
값싼 승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가득 받은 아브라함의 삶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갈수록
첩첩산중疊疊山中 하루하루의 삶이요, 계속되는 믿음의 시련, 순종의 배움입니다.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즉시
응답한 아브라함은 '들음의 사람'이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군말 없이 실행에 옮기는 정말 순수한 믿음입니다.
어제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하가르와 그의 아들 모자를 떠나 보냈는데,
오늘
역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
마음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래서
값싼 은총은, 값싼 믿음은, 값싼 축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
인생은 졸업이 없는 순종의 학교, 믿음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시련을 통과할 때 하느님의 감동이요 넘치는 축복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유일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 감격하신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 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모리아
산에서의 영적전쟁에 믿음의 승리후 담담히 떠나는 아브라함의 모습및 평범한 일상에로의 복귀가 또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을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이런
믿음의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느님의 축복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믿음도, 삶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저
역시 요셉수도원에 오랫동안 정주하면서 이런 혹심한 시련의 어둔 터널을 믿음으로 통과한, 주님을
감동시킨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인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향기
맡고 찾아내는 꽃처럼, 믿음의 향기맡고 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는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치유를 받습니다.
역시
주님을 감동시킨 동료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용서와 더불어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늘
해피엔드로 끝나는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어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온전함
회복하기 - 민경일
신부-
어제에 이어 오늘의
복음에서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신 그분의 권위, 곧 권능과 권한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중풍 병자를
고쳐 주며 하시는 말씀은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과 함께,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외적인 병의
치유와 내적인 죄의 치유는 그 본질이 같습니다. 창조 질서의 회복,
그 온전함에 대한 되찾음이지요.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하셨던 창조 사건을 계속 이어 나가십니다.
당신 스스로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여 주고 계신 것이죠.
그분을 따르는
오늘의 사도들인 우리도 그분의 일을 또 그렇게 이어 나가야 합니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을 이 사회가 끌어안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잃어버린 창조 질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단지 그분의 업적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넘어, 온전함을 회복하려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하고 중요한 사랑의
의무입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창세 22,8)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 많으시죠? 가장
힘들고 어려운 봉헌은 무엇이었나요?
하느님께서는 간혹
정말 '예' 하기 힘든 요청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바치라고도
하십니다. 정말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그렇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지 보고자
하시는 거죠.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우리가 봉헌하려는 것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조건 '예' 하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갚아주신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나에게
뭔가 봉헌하시기를 요청하면 무조건
'알겠습니다' 하고 응답합시다. 무조건
그분이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실 테니까요.
"야훼
이레!"(주님이 마련하신다!)
-한상우신부-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치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믿음이
있습니다.
최선의
치유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살아가야 할
우리는 막연한 믿음과
용서가
아닌 구체적인
믿음과 용서로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합니다
가장 귀한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해줍니다.
가장 큰
치유는 우리 죄를 용서받는
것이며 우리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믿는
만큼 우리의
역사를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였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평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유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아픔을
치유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치유는 우리의
믿음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도리어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우리의
평상이 예수님의 사랑을
비추는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주님
사랑안에서 모든 우리의
시간과 함께
합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의
평상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들입니다.
돌아갈 우리의
집이란 바로 주님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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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