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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 사랑의 원류를 찾아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사랑의 성체성사.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01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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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06 04:54
- 사랑의 원류를 찾아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오늘 독서에서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너희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착한 우리는 그러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사랑이 잘 됩니까?
사랑하려고 하는데 왜 사랑이 미움이 됩니까?
없는 사랑으로 억지로 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 역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없는 돈을 주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디서 강도질해서 주던지 거짓말이 들통나고 말겠지요?
그러니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사랑의 원류를 따라 올라가 내리사랑으로 사랑해야겠지요.
우리도 내리사랑을 하긴 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얼마나 내리사랑을 잘합니까?
그러니 문제는 그 내리사랑이 하느님께까지 올라가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께로 원류를 찾아가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하지 않기에
자기로부터 내리사랑은 해도 곧 자식 사랑은 해도
수평적인 사랑 곧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아 사랑해야 사랑이 충만하여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모든 자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 어떻게 생판 남인 자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부모의 다른 자식인 형제를 사랑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다른 자식과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정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사랑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야 하고,
거기서부터 내리사랑을 해야 함을 깨닫고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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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성체성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사랑의 주님께 보고 배워야 할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요, 사랑은 인간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영원한 사랑의 초보자로 사랑을 배우며 공부하다 떠날 평생 학생인 우리들입니다.
매일이 새해 첫날처럼 생각됩니다. 하루하루가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의 선물에 감사하며 사랑의 하루를 사는 일이 참 마땅하다 싶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1월6일 역시 사랑으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날마다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제1독서 말씀이 사랑의 핵심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무려 사랑이란 말마디가 10회 나옵니다. 물론 아가페, 무사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의 시공을 초월한 감미로운 말씀을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이요 만병통치약이 사랑뿐입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의 크고 작은 다양한 사랑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사랑의 실천을 뜻한다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어떤 발상도 작은 한 걸음만 못하다.”<다산>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걷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간단한 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사랑엔 크고 작음이 없이 모두가 위대한 사랑입니다. 2026년 병오년, 연초의 상황이 놀랍게 펼쳐집니다. 1월3일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에 생포되어 압송되었고, 1월4일부터는 이대통령이 8년만에 중국의 국빈으로 방문중이며, 어제 1월5일에는 국민배우 안성기 사도 요한 형제가 74세로 별세했습니다. 문득 작년 73세로 별세한 아침이슬의 김민기 가수도 생각납니다.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그리고 모두를 사랑했던 <영원한 국민 배우> 사랑의 배우 안성기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마침 어느 자매로부터 미사부탁의 연락도 받았습니다.
“신부님, 안성기 사도요한 형제께서 선종하셨습니다. 35년전 개포동성당 건축기금으로 1억을 내주셨습니다. 오늘부터 10일간 연미사를 청합니다.”
안성기 사도 요한의 사랑의 미담도 나누고 싶습니다. 안성기의 빈소가 차려진지 10분도 안되어 1착으로 도착한 경동중학교 시절의 절친이었던 죽마고우 국민가수 조용필의 울먹이며 “성기야 나 왔다! 또 만나자!" 하는 말마디도 감동이었습니다. 지면에 개의치 않고 미담을 소개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계에 입문을 요청받았을 때, 안성기는 “DJ를 존경하고 따르지만, 자기는 영화배우로 국민께 봉사하겠다”고 겸손히 사양했고, 이를 전해 들은 DJ는 “내 생각이 짧았어. 안성기는 배우로 국민께 봉사하는 것이 옳아.”라고 말했다 합니다. 모든 후배 배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넉넉한 사랑의 품을 지닌 형님같은 배우였습니다.
“과장해 말하자면 백년에 한번 나올 만한 배우”,
“그 사람의 인간정 자체가 정말 성실하고 굉장한 노력형이다.”,
“뚜렷한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라기보다는 어떤 색도 입힐 수 있는 무채색의 배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을 지닌 배우.”,
“웬만해서는 누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사람”,
“홀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모두를 보듬는 사람”,
“그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포용력이 넓고 모범적이며 보기 드문 인격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봉사를 많이 할뿐더러, 영화계의 스타이면서, 영화계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일한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이기는 그 푸근함, 타인의 서러움까지 안아주는 그 너그러움, 누가 안성기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우신 분.”
정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온삶으로 보여준 참 자랑스런 안성기 사도요한 형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살고 보여준 분이 안성기 형제의 절친인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과 외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예수님은 이미 앞서 도착하여 당신을 기다리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자 직접 사랑의 실천에 돌입하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 대자대비 무궁한 연민의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사랑의 성체성사의 요약입니다. 그대로 사도요한의 말씀이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해 실현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사랑의 성체성사요, 이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먼저 목자없는 양들과 같은 가엾은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니 그대로 미사중 말씀전례의 앞부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어 오병이어(五餠二漁)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니 성체성사 미사의 제2부, 사랑의 절정인 섬김과 나눔의 성찬전례를 요약 상징합니다.
삶과 유리된 미사전례가 아니라. 미사전례는 일상의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확산(擴散) 실천되어야 하고, 일상의 삶은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될 때, 그리하여 하느님의 궁극의 꿈인 모두가 행복한 <대동사회>의 하늘나라가 실현될 때 성체성사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성체성사 미사전례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체성사 미사전례를 사랑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사랑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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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제물로 보내시어.”(에페 2,4;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 6,41)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곧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을 통해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늘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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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지금 놀라운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율 주행 자동차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운전자가 핸들을 잡지 않아도 자동차가 스스로 차선을 읽고, 장애물을 피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갑니다. 라이다(LiDAR)와 다양한 센서, 카메라, 그리고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인공지능이 함께 움직이며 판단합니다. 멀리서 보면 자동차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경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프로그램이 허용하는 범위, 알고리즘이 계산하는 범위, 미리 학습된 데이터의 범위 안에서만 주행합니다. 그래서 자율 주행 자동차의 ‘자율’은 사실 완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보다 훨씬 더 큰 선물, 곧 자유의지, 그것도 하느님의 뜻마저 거스를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인간은 자유 때문에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때때로 자신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어야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율 주행 자동차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면 우리의 선행,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사랑은 모두 ‘설계된 기능’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위험하게도 했지만, 동시에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연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이 돌을 이렇게 깎으면 더 잘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강을 가로질러 갈 다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과 상상력에서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을 발견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니라, 자유와 상상력이 만든 첫 번째 혁명이었습니다. 수레바퀴의 발명은 인간의 이동과 물류 문명을 열었습니다. 인류는 자유로운 사고로 도시를 만들고, 농업을 고안하고, 항해술을 개발하고, 의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모든 문명의 발전은 ‘명령이나 프로그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인간의 생각, 창의성, 실패와 도전이 합쳐져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문화를 만들었었습니다. 문명 위에 문화가 생겼습니다. 문화란 인간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모여 언어를 만들고,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고, 축제를 만들고,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유다인들의 풍습, 로마의 법 제도, 그리스의 사상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형성한 문화는 인류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간에는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예술과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영역은 예술과 문학입니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는 자유로움 속에서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열어 교향곡 9번 ‘합창’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김소월 시인은 ‘진달래꽃’에서 인간의 슬픔과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와 죄, 구원에 대한 인간 내면의 갈등을 ‘죄와 벌’이라는 문학 작품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어떤 인공지능도 인간의 슬픔, 회한, 사랑, 신앙의 깊이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예술과 문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온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허락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교우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자유는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달라스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한 이민의 역사가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갈등을 대화로 풀어내는 결정이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로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 본당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성가대를 선택하는 자유, 주일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결단, 아무도 보지 않아도 성당 주변을 정리하는 자발적 사랑, 공동체 행사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선택이 모여 주님의 향기를 담은 문화가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은 하느님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자유의지는 예술과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예술은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영혼이 자유롭게 흘러나온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도, 그 안에 기도, 눈물, 사랑, 희망은 담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공현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공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강제로 끌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바라볼 것인지, 그 별을 따라갈 것인지, 긴 여행을 감수할 것인지 모두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하느님은 비추시고, 인간은 선택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처럼 정해진 경로만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지만, 그 자유가 언제나 빛을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외아들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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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경 안에서 기쁜 소식(복음)을 찾아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깨어진 세상 안에서 성경을 어떻게 ‘복음’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산산히 쪼개진 세상을 위한 기쁜 소식(복음)
성경 안에서 기쁜 소식(복음)을 찾아내기 READ ON CAC.ORG
2026년 1월 5일 월요일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성경은 지혜의 원천이 되어 왔지만 동시에 상처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해방과 사랑을 불러일으켰지만, 때로는 지배와 분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2026년, 우리는 열린 마음과 새로운 눈으로 이 고대의 성전을 다시 대하며, 그것이 어떻게 다시금 깨어진 세상에 복음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지 탐구하려 합니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이렇게 나눕니다:
우리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기 가운데 하나가 성경입니다. 많은 이들이 무기로 휘둘려진 성경에 상처를 입었고, 우리 자신도 성경을 무기처럼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이 날카로운 칼, 장전된 총, 시한폭탄, 독이 된 처방처럼 위험하게 느껴져 아예 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우리의 진솔한 체험과 살아 있는 교회의 전통 안에서 함께 읽는 법을 배운다면, 더 나은 길을 배우고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1]
2026년의 매일 묵상에서 우리는 성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 깨어진 세상 안에서 복음으로 읽어 나갈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성경을 마치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신적 지침서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성경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소중한 문학적 유산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계시를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놓여 있는 역사적·사회적·생태적·경제적·정치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고대의 지혜를 깊이 캐내어 나누려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을 마치 사람들이 땅과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서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오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성경을 - 창조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의 영감을 주는 말씀으로 탐구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을 마치 이 땅을 포기하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탈출 계획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성경을 깊은 관상으로 이끌고, 동시에 사랑으로 가득한 실천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으로 탐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관상적으로 대하며, 성급한 반응을 가라앉히고 깊이 자리 잡은 편견을 드러내며, 검증되지 않은 가정을 도전하고, 창조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서로 안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이끌릴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특별한 행동의 부르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비폭력적 행동, 창조적인 행동, 그리스도적 행동—지도력이 곧 봉사로 드러나고, 사랑의 힘이 권력의 사랑을 이기고 넘어서는 행동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임스 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만, 어떤 것도 막아 주시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뵐 때에만, 비로소 사랑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을 때, 하느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버리실 수도 없으며,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안전하신 분은 아니지만, 선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곧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은 안전하지 않지만, 현실은 선합니다.
— Heather C.
References
[1] Adapted from Brian D. McLaren, 2026 Daily Meditations Theme: Good News for a Fractured World,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video, 6:3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ul Macallan,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밝은 꽃처럼, 관상과 실천의 은총은 고통스러운 현실 한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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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6,34–44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신 것은
군중의 배고픔이 아니라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여 주기 전에
먼저 머무르시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돌봄은
능력이 충분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 마음이 움직였을 때 시작됩니다.
성령의 날인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자비 안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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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복음은 주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무리를 먹이신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출발점은 바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즉 자비로운 연민이었습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 가엾은 마음은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연민을 말합니다. 바로 이 연민이 기적의 첫 단추였습니다.
제자들은 현실적인 한계를 먼저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부족함보다 베풂의 시작을 바라보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즉, 기적은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 손에 내어놓을 때, 그 연민의 마음과 만날 때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같은 눈길을 보내십니다. 피곤과 지침, 걱정과 고단함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우리를 보시고, 조용히 다가오셔서 “나는 너를 알고, 너를 불쌍히 여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네 옆의 이에게 무엇을 내어놓겠느냐?”
우리가 가진 것은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미소 하나, 위로의 말 한마디, 작은 시간의 나눔, 기도 한 번. 그러나 주님 손에 들어가면 그것은 기적의 재료가 됩니다.
주님은 풍요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부족함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음이 아니라, 깊은 연민에서 시작되는 나눔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누군가를 바라보며 주님처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도 풍요의 기적, 관계의 기적,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믿음은 받아들임입니다.
어느 한적한 성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짧지만 큰 울림이 있는 문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믿음은 받아들임입니다.’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받아들임에서 시작됩니다.
성모님이 그러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신앙의 길은 우리가 바라는 꽃길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꽃도 있지만 세찬 바람도 있고 맹렬한 추위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 믿음은 단단해지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믿음은 받아들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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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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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동차 창문을 열고 시속 100km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태양 주변을 도는 공전 속도는 어마어마합니다. 1초에 30km에 달합니다. 시속 100km의 소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인데, 훨씬 빠른 지구에 살면서 공전 소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자전, 공전 소음은 인간이 듣는 청력 범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목이 마르면 수돗가에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지요.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사서 마신다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다시 나타났다면서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수를 사 마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것 역시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더 우리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을 갖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일이 우리 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빵의 기적만을 보고 있지만, 빵을 주기 전에 하셨던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라고 전해 줍니다. 영적인 배고픔의 해결이 육적인 배고픔의 해결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배고픔은 육적인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서야 채우는 것이라고 하지요. 어쩌면 영적인 배고픔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은 군중을 남으로 보지 않고, 책임져야 할 가족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앞이 잘 보이지는 않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의 한계 상황만을 이야기하면서, 못한다고, 할 수 없다면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깜짝 놀랄만한 일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배고픔을 먼저 채울 수 있어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이 존재하는 비결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표도르 도스토엡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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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양성기에 있을 때 어떤 일들을 하면서 제가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저에게 영적으로 동반을 해 주셨던 수사님 한 분이 자주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네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용기를 갖고 도전해 보아야지!" 그 말씀은 마치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처럼 즉시 불평을 멈추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저를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전을 던져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자극을 넘어 실제적인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의 언어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입니다. "먼저 해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직접 가서 확인해 봐!" "그 사람에게 직접 말해!" "우리 스스로 해 보자!" 등등.... 이런 말씀들은 참으로 영적 활력을 불러일으켜 주는 도전들이었습니다.
물론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이러한 의식과 인식 넘어 깊은 곳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생명력, 즉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늘 힘을 발휘할, 즉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의식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적극적인 희망을 살아가는 것, 즉 참으로 기도하는 것과 늘 절망적인 마음으로 "기도해 보았자 별 변화도 없잖아!" 하며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이 두 기도는 정반대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 번은 어떤 형제에게 어떤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형제는 얼버무리며 대답했습니다.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네요." 그러자 그분은 곧바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기다릴게."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그 자리에서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마태 14,16) 그리고 제자들이 실제로 나누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 다른 자리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요한 5,8) 그가 일어나려 하자, 실제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상 곳곳에는 이미 은총의 기적이 준비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말만 하고 머뭇거리지 않고, 실제로 행동(實踐, praxis)으로 옮길 때, 그 기적은 성사처럼 눈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요즘 저는 조셉 머피 박사(Dr. Joseph Murphy)의 강의를 유튜브로 거의 매일 듣고 있는데, 그분도 여러 강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고, 우리가 요청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라고요! "아니, 어떻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루어졌다고 믿는다는 거지?" 하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머피 박사는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에 이미 '내' 안에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렇게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부인 자기 남편이 말기 암에 걸려 간절하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한 주간에 세 번이나 교회에 나가고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절실히 기도를 부탁했으며 본인도 기도를 정말로 간절하게 주님께 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머피 박사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물었답니다. "저는 정말로 열심히 남편의 치유를 하느님께 청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어찌하여 제 남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때 머피 박사가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 기도할 때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슬프고, 가슴이 아프고, 그저 절망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랬더니 머피 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매님의 절망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일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의 연약함을 감싸고 있고, 그래서 그 사랑과 자비의 힘이 미치고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아니, 계속해서 병세가 악화되는데 어떻게 그렇세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런 믿음을 하느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매님 안에서, 그리고 자매님의 남편 안에서 강력한 사랑으로 현존하시며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희망을 하느님께 드러내 보여 드리십시오...." 하고 머피 박사는 말했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단순한 말이나 계획이 아니라 실천과 순종이 은총을 체험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신앙은 행위로 드러난다."(야고 2,17)는 진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흔히 기도를 단순히 “청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기도는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머피 박사가 강조한 것처럼, 기도는 절망을 토로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미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자리입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희망의 덕(virtus spei)은 바로 이러한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확신이며, 그분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신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하시며,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누는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적은 양이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우리 존재 내면에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엄청난 사랑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입니다. 신앙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며,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곧 성사적 삶의 태도와도 닮아 있습니다. 성사가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표징으로 드러내듯,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하느님께 보여 드릴 때, 그것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은총을 체험하는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주님, 이미 제 안에 계신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당신께서 제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희망합니다. 제 믿음이 말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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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듣다보니 시간이 늦어졌고
제자들은 군중이 배고플 것을 걱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당신께서 하실 일을 이미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말에서 우리는
그들이 있는 곳이 외딴 곳임을 알 수 있지만
이 단어는 사막으로도 번역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실 때에는
푸른 풀밭이라고 표현됩니다.
복음사가는 이 단어로 생명력을 암시합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배고픔과 목마름 없이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그 일이 다시 일어납니다.
외딴 곳이고 시간도 늦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게 됩니다.
똑같은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똑같은 분이 그것을 하셨음을 드러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사건이며
그렇게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과 함께하고 계심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천년 전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구약의 하느님 모습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옛날에 그러셨던 것처럼
이천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하느님과 함께하는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배고픔, 우리의 목마름을 하느님께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아 먹으며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나날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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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34-4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지니신 다양한 면모 중 하나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고된 세상살이에 지쳐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모습,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도록 배불리 먹이시는 모습에서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그분의 ‘어머니’ 같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은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측은지심이 그저 자기 안에 고여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지요. 내 마음에 있는 사랑과 자비가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당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놀라운 기적을 계획하십니다. 그런데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끝난다면 제자들은 말 그대로 놀라워할지언정, 그 기적을 통해 변화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이 그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마음을 슬쩍 떠보십니다. 시간이 늦었고 밥 때도 되었으니 당신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돌려보내시라고 종용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기들에게는 그들을 먹일만큼 많은 양식도, 그 많은 양식을 살 정도로 큰 돈도 없다고 항변하지요. ‘숫자’를 기준으로 가능과 불가능을 판단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정작 그분의 능력을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고 배불리 먹이기를 원하시는 그분 마음에 공감하지도 못했던 겁니다. 몸만 예수님과 함께 있을 뿐 마음은 그분과 하나되지 못하는 ‘동상이몽’의 상태로는 그분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없지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기적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십니다. 먼저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며 직접 확인해보게 하십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을 주님께서 일으키실 기적의 ‘마중물’로 내놓음으로써, 그들이 그저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일꾼’이 되도록 초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들이 내어놓은 얼마 안되는 음식들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사람들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임을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그분께 봉헌하는 자세임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빵과 물고기들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그 자리에 있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되는 음식이 남게 됩니다. 이 놀라운 표징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군중들에게 당신께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능력의 주님’임을 드러내보이시지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과 함께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감사와 봉헌 그리고 순명으로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주님의 공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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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성당이 12월 마지막 주일을 기점으로 본당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로 부터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91세 아버지께서 당신은 우리 성당 신부님이 미사 집전하시는 것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당이 문을 닫고 홍제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데 우리 성당이 배정 받은 것은 오후 2시입니다. 아버지는 온전히 우리 신부님과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만 미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91세에 어머님 병 간호하시고 하루 종일 고생하시는 아버지께서 희망하시는 것을 저가 어찌 모른체 하겠나요? 그래서 아버지 하시겠다는 대로 오후 2시에 가시고 저는 홍제동 성당에 미사가 있는 시간에 들어가서 미사를 드립니다. 제 본당 신자들과 같이 익숙한 얼굴에 미사를 드렸는데 그런데 20년이 지난 시점에 홍제동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좀 서먹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우리 본당 신자들과 같이 눈 웃음도 같이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성당 갔다 오셔서 흐뭇해 하시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좀..서먹하지만 지금 상황을 받아 들이려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참 오묘합니다. 저가 재속회에 있지만 그곳에 완덕의 7공방을 보고 있으면 나름 신앙은 능동에서 수동으로 넘어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평신도는 사제 옆을 벗어나면 않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길라잡이 하시는 분들이 신부님과 수녀님입니다. 우리 평신도 들이 많이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엽적인 지식을 전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완덕의 7공방에서도 그 말씀이 있습니다. 3공방까지는 지식입니다. 이성으로 말씀과 영성을 이해 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어 맡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를 그분 손안에 내어 맡김이 없이 이성의 생각대로 움직이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무엇인가 빈틈이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돌아서면 허전한 것이 완덕 3공방입니다. 나의 유한한 존재를 인정하고 온전히 비우고 그분의 손에 내어 맡기는 존재로 넘어감이 없는 단계입니다. 묵상을 해도 묵상을 했다고 볼 수 없는 단계입니다. 그 이유는 온전히 비우고 성령에 나를 내어 맡기는 그런 비움의 자세가 없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많이 배웠다는 분들이 완덕의 3공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군중을 보시고 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서 제자들에게 문의하십니다. 저들이 가엾구나 !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이성의 틀안에서 아직도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것이 빵 몇개와 물고기 몇마리가 전부인데 왜 나에게 식사 이야기를 하시는 것인가? 세상 물정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인가? 그래도 스승의 말씀이니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믿음은? 그런데 주님은 하느님으로 사랑을 배푸시는 분입니다. 다 앉히신 다음 그들을 배불리시는 분입니다. 나 안에 폐쇠성을 벗어 버리는 것이 의탁하는 것입니다. 성령에게 내어 맡기는 그런 믿음이 없기에 이성 안에서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난한 아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표징이 있었고 그분이 하시는 일은 기적과 표징이 따라왔습니다. 기적과 표징이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과 표징은 당신의 사랑을 이루는 단순한 도구였습니다. 내가 그분을 믿으면 구원으로 넘어간다는 하나의 징표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인간의 이성의 폐쇠성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개방하여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 영혼은 구원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이 나를 당신의 따뜻한 사랑의 심장 안으로 이끄시어 구원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도 본당의 외형적인 구조 변경으로 인해 우리 본당 식구들을 못 본다하여도 그것으로 실망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영육간에 건강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속에서 영혼의 합일이 이루어 구원의 합일이 이루어 짐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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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목자 없는 양
오늘 예수님은 많은 군중 앞에 서십니다. 그런데 군중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양은 시력이 극히 나빠, 눈앞에 무엇인가 보이고 그것이 움직이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것이 늑대와 같은 먹이사슬 상위 동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목동들이 양떼를 칠 때 염소 몇 마리와 함께 치거나, 또는 양치기 개를 별도로 훈련시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리가 단단하지 못해 재빠르지 못하고 잘 넘어지며,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서지를 못해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털을 깎을 때나 도살의 순간 온순한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 늘 ‘순하다’ 하는 부가어를 달고 다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을 보신 예수님의 첫 반응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입니다. 생명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왜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다른 더 좋은 세상은 없는지 알지 못한 채, 정말 견디기 힘든 정신적 배고픔에 주린 사람들에게 바로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러저러한 고통 앞에 왜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자비하시다는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지 몰라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영적 굶주림에서 육체적 굶주림으로 넘어갑니다. 그 유명한 빵을 많게 하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전능으로 무에서 기적을 이루어내실 수 있음에도, 예수님은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어서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자리 잡게 하신 후,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라고 이르십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을 모아 담아둔 열두 광주리는 이제 열두 제자에게 하나씩 분배될 것입니다. 한 무리씩 맡아 영적이며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미사성제의 핵심 부분인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그대로 드러남을 봅니다.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빵으로 배부르게 해 주시는 주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는 말씀으로, 이제 우리가 가르치고 배부르게 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올해에는, 주일은 물론 평일 미사에도 자주 참여하여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음을 참 행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자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을 영적, 육적으로 보살펴 나갈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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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님.
생활묵상 : 한 자매님의 부탁으로 여탕 청소를 약 한 달 하면서 영혼과 예수님을 진지하게 묵상해봤습니다.
찬미예수님,,
한 6개월인지 7개월인지 굿뉴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신앙에 크나큰 시련과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엄청난 고통이 있었습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육신의 병으로 이어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실제 큰 고통은 6개월 정도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전조 현상까지 포함하면 약 1년 반이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고통 속에서 그간 묵상하 것과 실제 시한부의 삶을 살지도 모를 그런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을 조금씩 공유하고자 합니다.
무거운 주제인 이 이야기는 차차 올리겠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절벽에까지 간 경험이었고 그 속에서 많은 묵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님의 부탁으로 제가 한 달 정도 여자 목욕탕을 청소하게 됐습니다. 자매님이 건강상 이유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해서 만약 그 일을 그만두게 되면 다른 일을 하기에 어려움도 따르고 생계 때문에 누군가 자매님을 대신해 한 달 정도만 도움을 줄 사람이 있다면 치료 후에 계속 그 일을 할 수가 있기에 고민을 많이 하셔서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겠다고 해서 하게 됐습니다. 여탕을 청소하면서 복음묵상은 아니지만 신앙에 대해 예수님과 맑은 영혼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상적으로나 신앙적인 면에서 좋은 경험을 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역겨운 일도 매일 있긴 합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신앙이라는 것을 색다른 세상 일을 통해 역으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생각해보게 된다면 멋진 공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공유를 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목욕탕을 청소하면서 그 속에서 신앙과 결부된 묵상을 했다는 게 좀처럼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몇 개월 뜸하다가 갑자기 그와 같은 글을 쓰게 되면 좀 황당할 수 있기에 먼저 그 배경을 조금 알려드린 후에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렇게 지금은 예고 아닌 예고를 먼저 올려드립니다. 목욕탕 청소를 도와 드리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조금씩 다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생활묵상 위주로 올릴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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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 작은 나눔이 다시 큰 채움으로
어쩌면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질 동화에나 나옴 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오천 명이 넘는 이가 적은 물고기와 빵으로 허기를 채운다.
이 이야기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으로도 무려 수천 명을 먹이실 예수님의 능력을 알리려는 거다.
‘그분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 드리신 다음,
빵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나누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이에게 나누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히 찼다나.
빵을 먹은 이들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단다.’
요지는 이렇다.
풀밭이 깔린 너른 공터의 한적한 늦은 저녁나절에서 시작된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어쩜 수만 명이 모였으리라.
배도 조촐한 때라 먹을 생각이 앞섰지만,
가진 것이라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니
걱정도 도가 지나쳐 아마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으리라.
예수님은 각자 무리지어 자리 잡게 하셨다.
이리하여 그곳에 모인 이가 배불리 먹고서도 남은 게 열두 광주리나 가득 찼단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 날수가?
그 기적에 다들 고개만 내젓는다.
굳이 알려 할 필요가 어디 있으랴만,
대략 추측은 할 수밖에.
암튼 함께 한 이가 떼 지어 자리했다.
함께했다는 것은 알음알음 아는 이들로
자연 아는 이들끼리의 공동체가 되었으리라.
따라서 자연 책임자가 나섰고 각자 가진 걸 죄다 풀었으리라.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그들이라 나름대로 먹을 것 등은,
최소한도로 각자 준비 했을 게다.
이러니 각자 가진 걸 다 내놓고 나눠가면서 먹었을 수밖에.
예수님 설교를 귀 쫑긋하고 들으면서도 말이다.
자기 것인 양 움켜진 것을 스스로 내놓는 이 비움의 배품,
그것으로 또 다른 무언가가 차는 게 기적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으리라.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에게 맡겨라. 너희를 풍요롭게 하리라.”
물고기 두 마리, 빵 다섯 개는 배고픈 아이에게도 시원찮으리라.
그렇지만 그것으로 많은 이에게 대단한 감동을 줬단다.
비단 먹음직스러운 것이 아닌 하찮은 것들로,
더구나 배고픈 한 아이에게도 시원찮은 분량이긴 하였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큰 기적으로 나타났다.
혼자만의 것이라면, 아마도 그것으로 끝일 게다.
하지만 예수님께 건네지면 기적으로 바뀌리라.
아무리 작은 것도 그분 것으로 받아들이면,
배품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왜 그리도 걱정을?
오병이어 이 기적은 동화 이야기가 아닌,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이루어 주신다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도 그분께서는 보태어 돌려주신다.
그러니 작은 것마저 그분께 봉헌하자.
의당 우리가 잠시 보관 후 되돌려드리니까.
세상사 어려운 건, 옹졸한 이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것이리라.
오병이어를 마치 하늘에서 빵과 물고기가 펑펑 쏟아진 마술처럼 이해한다면야,
그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는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체험한 이들 사이에 벌어진 놀라운 나눔의 기적이다.
세상에 빵이 부족해서 지구 저편 이들과 북쪽의 친척 형제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게다.
제자들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나눔을 주저하는 우리의 굳게 닫힌 마음 때문일 수도.
오늘 우리가 연민의 정으로 나눔을 실천한다면 이 기적은 오늘도 계속되리라.
예수님의 이 사랑 나눔으로 비움이 된 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되레 모든 이의 채움이 되었단다.
■ 쓸모없는 실패는 없다 / 따뜻한 하루[503]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84년의 생애 동안 1,093개 이상의 발명품을 남겼습니다.
전구를 만들고자 9,999번, 축전기를 완성하기까지는 약20,000번의 실패를 맛봤습니다.
심지어 축전기 내구성 확인을 위해, 건물 3층에서 떨어뜨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발명품을 완성하기까지 많이 실패했지만, 에디슨은 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패를 결단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틀린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언젠가 연구소에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실험 도구가 다 타버렸는데도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시행착오와 실수로 이렇게 되었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시행착오를 겪는 이 어려운 '시련'과 '실패'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은 인생을 윤기 있고, 생동감 있게 해줄 것입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마스 제퍼슨도,
1779년 버지니아 주지사에서 1800년에는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경험을
‘쓸모없는 실패는 없다.’ 라고 그의 시련을 회상시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내내 고난을 함께한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루카 22,28-30).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늘 내 곁에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하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래서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나와 함께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리며 심판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늘 순탄치는 않습니다.
때로는 사나운 바람을 만나야 하고,
때로는 거친 폭풍우도 힘들게 겪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지만 절망하지 않는 건,
그 시련으로 인해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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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님
*** 미래를 예지하고 예언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우리들 인간은 서로 모두 다릅니다. 얼굴 생김새, 성격, 생각, 세계관 등등
뭐.. DNA가 조금씩 다르니 당연한 이야기 인가요?
사회라는 시스템은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개인, 가족, 친구, 지역사회, 직장, 국가 등등 수많은 공동체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삶의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우주)도 무수히 많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주 작은 미시입자 (양자) 들은 다양한 변화가 생동하는 놀라운 필드 입니다
아주 거대한 우주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너무나 넓고큰 필드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사람, 사회, 자연환경 등 무수히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여러가지 구성요소가 얽히고 설킨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한 실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지하고 예언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 생각합니다
불과 몇분 후에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하물며 미래는 불가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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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AI 에게 예언에 대해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합니다
예언은 일반적 예측과 달리, 단 1분 뒤의 일도 정확히 알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습니다.
종교적·신화적 맥락에서 예언은
신의 계시나 초자연적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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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하면 20세기 말의 휴거사태가 떠오르게 됩니다.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지구촌은 큰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것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을까요?
휴거를 주장하는 것을 믿음 좋은걸로 착각하고 있는데요
휴거주장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모욕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안드시나요?
또한 2024년 12월 내란사태 때의 일도 떠오릅니다.
ㅇㅅㄹ 이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 이후에
온 나라가 혼돈 속에 휩싸이고 뒤숭숭 했을때..
유투브에 온갖 예언들이 난무했던 것을 보앗습니다.
심지어 외국인이 한국의 미래를 보았다면서 영상을 올리기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상당수가 ㅇㅅㄹ을 지지하는 예언들이더군요
이것참.. 어처구니 없다를 넘어 당황하게 하는..
건전한 이성과 합리적인 상식에 비추어보면
비상계엄 선포가 얼마나 위험하고 헌법을 위반하는 행동인가는
저절로 직관으로 느낄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있는 게다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ㅇㅅㄹ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의 상당수 사람들이 극우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데요
선과 악의 대결 이라는 이분법의 흑백논리와 율법과 계명 이라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의 특성 때문일까요?
아무튼 나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개신교의 극우화 경향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극단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정체성에 대한 혐오가 심해지는 것은 매우 우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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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예지와 예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1) 성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경우
2)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우
3)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경우
(1) 성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경우
성경에 보면 성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신다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즉 성부 하느님께서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미래를 설계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신다는 개념 입니다
이사야 65장 17절 ~ 18절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요한묵시록 22장 6절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2) 예수님 (성자 하느님) 께서 말씀하시는 경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활동 중에 고난 속에 죽으실 것을
여러번 이야기 하셨다고 한 기록들이 잇습니다
또한 친구 나사로에 대해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살리십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구약에서 예언된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신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다시오실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의 경우에는 미리 미래를 아는 수준을 넘어
당신께서 말씀하신것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루시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3) 성령님의 감화
요한복음 15장 13절
"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것이다
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예언 입니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인간이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단지 메신저 일뿐이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예언은 성령의 은사라고 증언합니다
결론 :
인간은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성령님께서 계시하시는 미래를 예언할수는 있다.
이것은 인간이 미래를 안다는것 보다는 성령님의 계시를 대신 말한다는
메신저 로서의 성격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 예언서들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율법준수와 사회정의 입니다
미래를 말하는 것은 그냥 부차적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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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구약의 예언서와 신약의 요한묵시록을 살펴봅니다.
이사야서 6장 1절 ~ 10절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예레미야 1장 4절 ~ 8절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에제키엘 2장 1절 ~ 5절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다니엘서 9장 22절 ~23절
“다니엘아, 내가 너를 깨닫게 해 주려고 이렇게 나왔다.
네가 간청하기 시작할 때에 이미 말씀이 내렸는데, 그것을 일러 주려고 내가 왔다.
네가 총애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서 환상의 뜻을 깨닫도록 하여라.
미가서 1장 1절 ~ 2절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카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
그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환시다.
민족들아, 모두 들어라.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아, 귀를 기울여라.
요한계시록 1장 1절 ~ 2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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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든 예언자들은 본인의 생각을 말한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거나 계시하신 것을 전하는 도구일뿐 입니다.
예언자 prophet 는 메신저 messenger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AFxYAmeK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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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61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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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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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구 박요한 세례자요한(길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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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친히 차리신 밥상!>
예수님의 공생활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인품, 능력에 매료된 수많은 군중이 식음조차 잊은 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의 장소는 예루살렘이나 카파르나움이 아니었습니다. ‘외딴곳’이었습니다. 한적한 장소, 즉 광야를 떠오르게 합니다. 시야가 확 트인 광활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장정만 5천 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설교 장소에는 여인들이 곱절은 많습니다. 거기다 따라온 아이들까지, 줄잡아 2만 명 남짓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입니다.
그 광경이 마치 출애굽 여정의 모세와 백성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2의 모세로 등장하셔서 광야에 모인 군중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빵을 나눠주십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동반하시고, 양육하시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행위들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동작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아버지와 내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유다인들은 매 식사 전에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가장들은 기도를 드릴 때, 시선이 손에 들려 있는 빵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감사 기도를 마치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후,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그 한적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의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십니다. 함께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고, 서빙도 없는 초라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룩한 식사, 하느님 백성과 메시아가 함께 하는 놀라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요즘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잔뜩 들어간 한 끼 식사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 한 상에 쌓인 피로와 상처, 외로움과 슬픔이 말끔히 치유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위해 친히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그 누구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비록 소박한 식사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은총의 식사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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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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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에는 가뭄에도 물이 쏟아진다>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가 우리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농구 좋아하십니까? 미국 대학 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UCLA의 존 우든 감독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분은 전무후무한 88연승과 10회 우승이라는, 말 그대로 '기적' 같은 기록을 세운 명장입니다. 신입 선수들이 잔뜩 긴장해서 첫 훈련장에 모이면, 명장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농구공 대신 양말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자, 양말을 신을 때는 주름이 하나도 잡히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 신어야 한다. 그리고 신발 끈은 구멍마다 꽉 조여 매라."
선수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천하의 명장이 유치원생도 다 아는 양말 신기를 가르치다니요. 하지만 감독의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양말에 주름이 잡히면 발에 물집이 생긴다. 물집이 잡히면 뛸 수가 없다. 네가 못 뛰면 팀이 진다."
기적 같은 승리는 화려한 덩크슛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양말을 제대로 펴 신는 그 사소한 '질서'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기초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경기라는 거대한 흐름도 무너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빵이 불어난 결과에만 감탄하느라, 그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아주 중요한 행동을 놓치곤 합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를 잡게 하셨다.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왜 굳이 배고파 죽겠다는 사람들을 앉히고, 줄을 세우셨을까요? 그냥 빵을 공중에서 뿌리거나,
선착순으로 나눠주면 안 됐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겁니다. 힘센 사람만 먹고 약자는 밟혀 다쳤겠지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폭동입니다.
여기서 '떼를 지어'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본래 '화단의 꽃들이 가지런히 심어진 모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혼란스런 군중을 아름다운 꽃밭처럼 정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곧 기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은총은 담기지 않고 쏟아져 버립니다.
우리 삶의 현장을 봐도 그렇습니다. 기적은 철저한 질서 위에서 피어납니다. 불과 1년 전이었지요. 2024년 1월 2일,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여객기가 착륙 직후 다른 비행기와 충돌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는 불덩어리가 되어 활주로를 달렸고, 기내는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누가 봐도 대참사가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승무원들은 고장 난 인터폰 대신 확성기를 들고 외쳤습니다. "짐을 버리십시오! 짐을 꺼내지 마십시오!" 생사가 오가는 순간, 내 가방을 챙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 본능대로 했다면 통로는 막히고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무질서를 멈추고 승무원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비행기가 전소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분이었지만, 탑승객 379명은 전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짐을 버리는 질서'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는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어디 인간사뿐이겠습니까. 자연을 보십시오. 꿀벌들이 모아온 꿀은 액체입니다. 그냥 쌓아두면 다 흘러내리고 맙니다. 그래서 벌들은 '육각형'이라는 가장 완벽한 질서의 형태로 집을 짓습니다. 빈틈없고 가장 튼튼한 그 구조 덕분에 벌집은 자기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을 저장합니다. 육각형이라는 질서가 없으면, 꿀이라는 풍요는 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질서는 본래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듭니다. 그런 혼돈 속에는 은총이 내리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기드온을 보십시오. 적군 미디안은 13만 5천 명인데, 기드온의 군사는 고작 300명이었습니다. 전면전, 즉 무질서한 싸움을 하면 전멸이 뻔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칼 대신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을 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하여라"는 엄격한 행동 수칙을 주십니다. 그들이 약속된 신호에 맞춰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리며 질서를 지켰을 때, 적군은 공포에 질려 자기들끼리 칼부림하다 자멸했습니다. 300명의 질서가 13만 명의 무질서를 이긴 것입니다.
이처럼 질서만 잡혀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그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크림 전쟁 당시의 나이팅게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야전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의 사망률은 42%였습니다. 총상 때문이 아니라 오물과 무질서 속에서 감염되어 죽어갔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한 일은 거창한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청소를 하고, 환자의 침대를 줄 맞춰 정리하고, 환기 시간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망 원인을 꼼꼼하게 통계표로 만들었습니다. 아수라장이 평화로운 질서의 공간으로 바뀌자, 6개월 만에 사망률이 2%로 급감했습니다. 그녀가 부여한 '질서'가 곧 수천 명을 살리는 '기적'이 된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질서의 힘은 빛을 발합니다. 1914년, 남극 탐험 중 배가 부서져 얼음 위에 고립된 어니스트 섀클턴 대장과 28명의 대원 이야기를 아십니까? 영하 30도의 추위와 고립감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 섀클턴 대장은 엄격한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축구를 하고, 머리를 깎게 했습니다. 심지어 유머 시간까지 정해서 웃게 했습니다. 그는 무질서한 감정이 침투하지 못하게 일상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634일간 표류했지만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생존하여 귀환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그들을 살린 건 따뜻한 난로가 아니라, 영혼을 지켜주는 차가운 질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서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주 드리는 이 미사 전례(Liturgy)야말로 우리 삶의 질서를 잡는 가장 거룩한 틀입니다. 전례는 딱딱한 형식이 아닙니다. 무질서한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 영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섀클턴의 루틴이자, 은총을 담는 벌집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혼돈 그 자체였을 때, 문명을 구한 것은
베네딕토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은 그 혼란 속에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엄격한 생활 규칙을 세웠습니다. 수도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먹고, 기도했습니다. 그 수도원 담장 안의 평화로운 질서는 암흑시대를 밝히는 등대가 되었고, 그 안에서 유럽의 문명은 다시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질서는 벌써 평화이고, 그 평화가 기적을 초대합니다. 올 한 해, 거창한 계획보다 사소한 질서를 세워보십시오. 존 우든 감독이 양말을 펴 신게 했듯,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바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 단순한 규칙(Regula)이 여러분의 영혼을 육각형 벌집처럼 튼튼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주시는 오병이어의 풍성한 은총이, 낭비되지 않고 여러분의 삶이라는 그릇에 가득 담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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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지금 놀라운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율 주행 자동차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운전자가 핸들을 잡지 않아도 자동차가 스스로 차선을 읽고, 장애물을 피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갑니다. 라이다(LiDAR)와 다양한 센서, 카메라, 그리고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인공지능이 함께 움직이며 판단합니다. 멀리서 보면 자동차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경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프로그램이 허용하는 범위, 알고리즘이 계산하는 범위, 미리 학습된 데이터의 범위 안에서만 주행합니다. 그래서 자율 주행 자동차의 ‘자율’은 사실 완전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보다 훨씬 더 큰 선물, 곧 자유의지, 그것도 하느님의 뜻마저 거스를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인간은 자유 때문에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때때로 자신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어야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율 주행 자동차처럼 ‘정해진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면 우리의 선행,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사랑은 모두 ‘설계된 기능’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위험하게도 했지만, 동시에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연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이 돌을 이렇게 깎으면 더 잘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강을 가로질러 갈 다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과 상상력에서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을 발견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니라, 자유와 상상력이 만든 첫 번째 혁명이었습니다. 수레바퀴의 발명은 인간의 이동과 물류 문명을 열었습니다. 인류는 자유로운 사고로 도시를 만들고, 농업을 고안하고, 항해술을 개발하고, 의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 모든 문명의 발전은 ‘명령이나 프로그램’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인간의 생각, 창의성, 실패와 도전이 합쳐져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문화를 만들었었습니다. 문명 위에 문화가 생겼습니다. 문화란 인간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모여 언어를 만들고,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고, 축제를 만들고,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유다인들의 풍습, 로마의 법 제도, 그리스의 사상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형성한 문화는 인류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간에는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가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예술과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영역은 예술과 문학입니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는 자유로움 속에서 다비드상과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열어 교향곡 9번 ‘합창’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김소월 시인은 ‘진달래꽃’에서 인간의 슬픔과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유와 죄, 구원에 대한 인간 내면의 갈등을 ‘죄와 벌’이라는 문학 작품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어떤 인공지능도 인간의 슬픔, 회한, 사랑, 신앙의 깊이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예술과 문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온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허락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교우들의 삶에서도 이러한 자유는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달라스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한 이민의 역사가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갈등을 대화로 풀어내는 결정이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로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 본당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성가대를 선택하는 자유, 주일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결단, 아무도 보지 않아도 성당 주변을 정리하는 자발적 사랑, 공동체 행사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선택이 모여 주님의 향기를 담은 문화가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은 하느님 앞에서 아름답습니다. 자유의지는 예술과 문학을 만들었습니다. 예술은 기계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영혼이 자유롭게 흘러나온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도, 그 안에 기도, 눈물, 사랑, 희망은 담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공현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공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강제로 끌어오지 않으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을 바라볼 것인지, 그 별을 따라갈 것인지, 긴 여행을 감수할 것인지 모두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하느님은 비추시고, 인간은 선택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처럼 정해진 경로만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지만, 그 자유가 언제나 빛을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그 외아들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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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마르 6,34)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재물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방법을 알려 주셨을까요?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 저마다 먹을 것을 구하게 하자고 예수님께 건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6,37) 하시며,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6,3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치신 것은 분명 하느님 나라의 진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핵심은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함께 들었을 제자들은 그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이 몇 개 있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가지고 있는 빵의 개수를 확인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받은 것을 돌아보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곧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나눌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진 것이 많은지 적은지가 아니라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지 먼저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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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34-44: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늘 복음은 잘 알려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전해준다. 굶주림을 아시는 주님,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지신 주님께서 수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은 먼저 말씀으로 영혼을 먹이시고, 이어서 빵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신다.
기적이 일어난 곳은 “외딴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황량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충만의 자리였다. 성 예로니모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빈들에서 군중을 먹이신 것은, 율법의 메마름 대신 복음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In Matth. 14,19)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황량하고 외로운 순간이 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순간은 은총의 시간이 되고, 구원의 공간으로 변한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보잘것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주님께 내어놓자, 풍성한 기적이 일어났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군중을 먹이게 하셨다. 이는 교회에 맡겨진 성찬의 직무와 가르침의 사명을 예표한다.”(Hom. in Matth. 49,1)
즉,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당시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 교회에도 주어지는 명령이다. 본당 공동체는 각자의 작은 봉헌을 모아 주님께 드림으로써, 세상 안에 하느님의 큰 일을 이루는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성찬례와 연결한다. “주님은 빵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셨다. 이것은 성찬의 전형이다. 작은 빵이 무리를 먹였듯이, 작은 성찬이 온 세상을 먹인다.”(Sermo 130,2) 성찬례는 곧 감사(Eucharistia)이다. 우리가 일상의 작은 은총에도 감사할 때, 부족해 보이는 삶은 충만한 자리로 변한다.
열두 광주리에 남은 조각은 단순한 과잉이 아니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가르친다. “열두 광주리에 담긴 것은 사도들의 손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을 드러낸다. 이는 교회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함을 보여준다.”(De Unitate Ecclesiae, 23)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성사를 거행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 속에 나눔과 사랑의 빵을 퍼뜨리는 자리이다.
오천 명의 군중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갈망을 지닌 인류 전체를 상징한다. 주님은 그 갈망을 채우시는 참된 빵,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초대합니다. 가진 것을 작다고 움켜쥐지 말고 주님께 내어놓을 것, 받은 은총을 늘 감사할 것,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 나눔의 기적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럴 때, 황량한 외딴곳은 은총의 장소로, 늦은 시간은 구원의 시간으로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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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마르코 6,34-44 (오천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마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마르코 6,38)
나누려고 하니
나눌 것이 보이네요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
나눌 것이 보이지 않네요
나누려고 하니
나눌 것이 생기네요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
나눌 것이 없어지네요
나누려고 하니
나눌 것이 있네요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
나눌 것이 없네요
나누려고 하니
나눌 수 있네요
나누려고 하지 않으니
나눌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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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이 진짜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 6,34-44)
1)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의 심정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다.”라는 ‘비참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굶주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이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입니다. 그의 몸은 잘 먹어서 ‘좋은 몸’이 되겠지만, 그의 영혼은 병들고 굶주린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만일에 본인이 그것을 끝끝내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혼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34절의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이 불쌍한 처지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영혼도 병들어 있었다는 것.
<어쩌면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남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이 너무 아프면 남의 아픔을 생각할 틈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더욱 이기적으로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양처럼 각자 혼자서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고 걱정한 것은 분명히 ‘사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돈도 없었고 빵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빵의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부각시키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일입니다. 물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의 재료로 사용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빵과 물고기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기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사실 오천 명 이상의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기적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기적을 일으킨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께서 ‘무에서 유를’ 만드실 때, 인간 쪽에서 그 기적에 동참하고 협력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1)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과 안식과 평화’를 체험했습니다.
(2) 사람들이 ‘기적의 빵’을 먹을 때, 그곳에서는 아무도 차별당하지 않았고, 아무도 소외되지 않았습니다.
(3) 그 빵을 먹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이기심이 사라졌고, 그들은 ‘모두 함께’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 기적과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킨 기적, 그렇게 두 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빵의 기적’은 한 끼 식사로 끝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된 일은, 각자의 노력에 따라서 그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모두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먹거나 함께 굶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갈등과 분열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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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가 주어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으니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5-36).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 하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 할 시간으로 보셨다. 가진 것을 내놓기를 바라셨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적은 것이라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된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야 하는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인데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이다. 가진 것을 내놓으면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구하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해야 한다.
기억해 보자!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들어줄 상대를 찾는 사람,..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너희가 주어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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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장 7절-8절) 여러분은 하느님을 잘 아십니까? 잘은 모르겠는데 좀 알긴 안다구요? 하느님을 잘 알고싶은데 어렵지요?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묵상을 열심히 하는데도 잘 모르겠다구요? 사실 공부를 통해 하느님을 지식적으로는 조금 알 듯해도 하느님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분이셔서 다 담을 수는 없겠지요.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껍데기만 아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만큼 비례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내가 하느님을 잘 모른다면 그게 성경공부 부족이나 신앙 부족이 아니라 사랑 부족 때문이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무조건 사랑합시다. 그래야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조건부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하는 유행가 노랫말을 흥얼거려 보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무신론자들 중에는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봤냐고..." 신자들 중에서도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같다"고 하면서 냉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결국 사랑을 제대로 못했다는 겁니다. 왜냐구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만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통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싶고 만나뵙고 싶다면 지금부터 더 열심히 사랑합시다.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래서 '거짓말쟁이'(1요한 4,20) 입니다. 오늘도 열심히 사랑합시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오늘 만나뵙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마르 6,34-44)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참 아들이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들으려 몰려든 많은 사람들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하루종일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벌써 어둑어둑 해가 저뭅니다. "이제 그만 저들을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의 말에 "아니다. 그냥 돌려 보낼 수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먹을 것도 없고 살 돈도 없는데 그냥 돌려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해결하자는 제자들의 경제 논리 앞에, 예수님은 사랑 논리를 펼치시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적당한 사랑으로 만족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이고, 끝없는 사랑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빼닮은 것이겠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바친 희생제사와 성체성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의 간극은 실로 엄청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무라거나 실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사랑 안에 더 성장하도록 양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볼멘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제자들을 참여시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누어 주셨고" 또 "나누어 주도록"(마르코 6,41) 하십니다. 그러는 사이 또 어느새 한 뼘 제자들 안에 사랑이 자랐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광야에서 예상치 못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 안에도 믿음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되었을 겁니다.
예수님과 사람과의 거리는 그분과 하느님과의 거리입니다. 아직 사랑이 영글지 못한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느끼는 거리 역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거리일 겁니다. 그래도 그 거리는 미세하나마 차츰 좁혀지는 과정 중에 있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밀착될 날을 인내로이 믿고 기다리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마음과 같아질 때 비로소 진정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고 필요를 헤아리고 고통을 품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지닌 목자가 되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건 확실합니다. 모든 사랑은 각자가 취향껏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1요한 4,7)이고, 그 사랑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음식 "열두 광주리"(마르코 6,43)는 미래 세대인 우리를 위해 남겨주신 완전한 수량의 양식을 상징합니다. 이 열두 광주리가 전해졌음에도 세상에 아직 굶주림과 궁핍이 남아 있다는 건,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태어나 제자와 군중의 후예로 불리운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하느님 사이의 거리, 나와 이웃 사이의 거리가 아직 충분히 사랑으로 밀착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요한 1서 4장 7절)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을 잘 아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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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경훈모 알렉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저 유명한 5천만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입니다. 군중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해봅시다.
예수님은 여러 날 동안 당신을 뒤따르며 말씀을 듣느라고 허기졌을 군중들을 헤아리십니다. 그래서 측은한 마음으로 배를 채워주려 하십니다. 물론 이 기적에는 속뜻이 있습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영적인 양식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6장)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속마음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묵상은 빵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볼까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도움 없이도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을 동원했고, 그들이 가진 음식을 이용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함이 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체험시키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지혜와 혜안이 놀랍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독불장군이 아니라, 진정한 리더 이셨습니다. 참된 리더의 모습을 묵상케 하는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너 없으니까 일이 안된다.”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소속된 공동체에서 내가 정말 필요하고 인정받는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던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칭찬은 내가 꿈꾸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서 나를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공동체가 무너질 정도로 공동체를 나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은 나의 이기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너만 있으면 된다.”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칭찬은 내가 꿈꾸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서 나를 두 발짝 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따라주는 이 아무도 없는 것은 독재이기 때문입니다.
“야! 너 천재구나.”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풍부한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코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칭찬은 내가 꿈꾸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서 나를 세 발짝 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리더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성공시킬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대로 잘하네!”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내가 말 잘 듣고 착한 천사와 같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ㅠ그런데 이 칭찬은 내가 꿈꾸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서 나를 네 발짝 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전통과 관료주의에 익숙해져 새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어야 할 진정한 리더는 독재가 아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 뿐 아니라 따라주는 사람들에게 성공을 안겨 주는 사람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 시대에 필요와 변화를 잘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칭찬을 다시 한번 새겨듣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큰일을 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처음의 순수함을 사라지고 명예와 지위를 누리는 삶에 익숙해져 갑니다. 약자의 배고픔을 보는 눈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과 추종하는 집단의 이해득실을 챙기기에 급급해집니다. 이것은 오늘날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을 참여시키십니다.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있는 것을 내어놓는 작은 일은 우리가 하고, 그것을 가지고 큰일을 하시는 것은 주님이시라 생각합시다.
내 것을 먼저 한 숟갈 덜어 주는 일은 내가 하고 그것으로 풍성한 사랑의 기적을 이루시는 일은 주님께 맡깁시다. 참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주님! 멋지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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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동차 창문을 열고 시속 100km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태양 주변을 도는 공전 속도는 어마어마합니다. 1초에 30km에 달합니다. 시속 100km의 소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우리인데, 훨씬 빠른 지구에 살면서 공전 소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자전, 공전 소음은 인간이 듣는 청력 범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목이 마르면 수돗가에 가서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지요.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사서 마신다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다시 나타났다면서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수를 사 마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것 역시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다고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히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더 우리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을 갖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일이 우리 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빵의 기적만을 보고 있지만, 빵을 주기 전에 하셨던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라고 전해 줍니다. 영적인 배고픔의 해결이 육적인 배고픔의 해결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배고픔은 육적인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서야 채우는 것이라고 하지요. 어쩌면 영적인 배고픔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군중을 돌려보내자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은 군중을 남으로 보지 않고, 책임져야 할 가족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배불리 먹이십니다. 앞이 잘 보이지는 않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인간의 한계 상황만을 이야기하면서, 못한다고, 할 수 없다면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너무 쉽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깜짝 놀랄만한 일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배고픔을 먼저 채울 수 있어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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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요한 1서 4장 10절)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 (에페소서 2장 4절 / 로마서 8장 3절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코 6장 36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장 37절)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마르코 6장 41절)
이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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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34ㄱ)
<하느님의 가엾은 마음인 사랑!>
오늘 복음(마르6,34-44)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들의 허기진 배도 채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니,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로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낮은 곳, 그늘진 곳에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실행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오늘 독서(1요한4,7-10)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4,7-10)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졌고, 지금도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이 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안성기 사도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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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 6,38)
부족해 보여도
사랑으로
내어놓을 때,
평화와 은총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욕심의 길이
아니라
헤아림의 길을
다시 만납니다.
빵을 가지려 하면
빵을 잃습니다.
감사는
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먼저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이어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말씀과 빵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빵은 움켜쥘수록
줄어들고,
흘려보낼수록
살아납니다.
나눔의 성찬은
높아짐의
식탁이 아니라
낮아짐의 자리이며,
그 낮아짐 속에서
우리 모두는
배불리 먹습니다.
성찬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사건이기보다,
함께 깨어나
서로를 살리는
일상의 사랑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은총을
이웃의 밥으로
돌려주는
하루의 실천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눔과 감사가
맞물릴 때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은혜를 아는
마음에서
봉헌은
시작됩니다.
풍요는 더 많이
소유할 때 오지 않고,
이미 주어진 것을
봉헌으로 바꿀 때
시작됩니다.
그래서 축복은
소유의 크기보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내어놓은 작은 빵 위에,
우리 모두를 살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적이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서로를 살리는
가장 좋은 은총의
날입니다.
내어놓음이
가장 좋은
사랑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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