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 21-28
에녹은 육십 오세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의 특징을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예배하는 자라고 규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자녀들과 숫한 후손들과 그런 일들을 추구했을지라도 그 일이 용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악의 창궐이 늘 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벨의 죽음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의의 계열의 예배는 위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을 주시고 에노스를 허락하시기까지 그러하였습니다(4:26).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의 형태의 더 발전된 형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1. 본문 21-23절은
“(21)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입니다.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에녹은 특별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고 언급된 것을 보면서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독차지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녹, 그리고 게난과 마할랄렐과 야렛들도 그 당시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경건성에 대하여도 이 전장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가 거칠어지지 않고 또한 야만적인 상태로 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가장 월등한 선생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에 우리는 성령이 일반 공통 계열에서 면제시켜 주신 이 거룩한 사람의 결백은 그 당시에는 희귀한 것이며 거의 특이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들의 그릇된 자세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용되고 있는 한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관습은 난폭한 시험자로서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대중에 의하여 우리 자신들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는 고통을 겪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한가지는 모든 사람들이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옳은 것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공연한 관례는 난폭한 폭풍우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더욱 더 열심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간단한 말에 포함되어 있는 거룩한 생활에 대하여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 양식대로 따라가기를 즐겨하고 있는 자들은 그대로 지내게 하십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생활의 법칙을 올바르게 잘 확립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활법칙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생활과 태도를 형성하지 않고 있는 자들의 생활 양식에서 떠나서 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멸을 퍼붓고 있는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모방하여 사는 일에 자신들을 복종시키며 그들이야말로 마귀들에게 속한 생활을 하는 자들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족장들의 남은 자들은 의를 찬양하는 것을 박탈당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는 우리에게 가장 방탕한 시대에서 살고 있었으면서도 굳게 견디어 냈던 사람의 괄목할 만한 생활 본보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올바르게 그리고 질서 있게 살기를 원한다면 육적 생활보다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쏟는 것을 배우게 하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마치 그가 인간의 부패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오직 하나님만을 존경하였다고 말한 것과 똑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 아래에 있는 것처럼 순수한 양심으로 정직을 개발할 수가 있었다고 말한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2. 본문 24-28절은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8)라멕은 일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입니다.
정말로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은 에녹은 비상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여호와께서 받아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라카흐)라는 말은 히브리인 가운데서는 ‘자신에게로 취해 가다’ 또는 단순히 ‘가져가다’ 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생(半生)의 기간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데려가심으로 에녹이 갑자기 그리고 전혀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방법으로 인간들의 눈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실은 우리가 엘리아에 관해서 되어진 것을 읽어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에녹의 승천에서 불멸성의 실예가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들이 죽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그런 확실한 믿음으로 승화시켜 주시기로 계획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이런 위로로 그들 성도들이 맞게 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저 하늘 나라에서 더 좋은 생활이 예비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줄을 알고 그렇게 위로를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자신은 이 신앙과 위로를 받지 못하고 박탈당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하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끊임없이 그의 귀에서 울렸기 때문에 그가 그런 죽음 가운데서는 저주와 멸망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을 만한 특별한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이 하늘나라로 승천해 올라간 일은 아담이 죽은 후 150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에녹 승천의 실예는 복된 부활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만약 아담이 그 사건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아마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하여 침착하게 자신을 가다듬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형벌을 내리시는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그 형벌의 엄격을 조금 완화시키셨습니다.
또한 아담 자신이 그분의 입으로부터 직접 조금도 경감이 없는 그에게 적합한 형벌이라는 말씀과 그리고 이 치유책으로 만족하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계속적인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그의 생명이 마지막에는 비참과 슬픔으로 종결되는 것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그의 의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분명한 말씀으로 그와 똑같은 양상에서 뱀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교훈을 받지 못하던 것에 반하여, 에녹의 승천에서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을 반드시 이 멸망될 생명에만 국한시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제시하고 있듯이 이 승천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경건함과 정직한 생활과 관련시키심으로 에녹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박탈당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는데, 그는 더 좋은 처소로 데려감을 입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가 이 세상에 우거하고 있을 때에 하늘나라로 영접함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 사실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 사도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히11:5).
그런 점에서 에녹의 승전은 특이한 특전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다른 조상들이 그들의 원래의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들도 역시 그런 특이한 변화를 입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그가 부패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이 필요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갑작스런 분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자연은 그런 갑작스런 분리에서 위축되는 것입니다. 그의 승천은 평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에 넘치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비참한 생활에서 해방되는 데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할 자들의 첫 열매로 오실 때까지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교회의 한 일원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를 만나러 가서 그분을 머리로 전체 몸이 연합해야 되는 것이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혹 누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히9:27)라고 사도가 말한 것을 들면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죽음이 언제나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썩어질 성품을 벗어버린 자는 죽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날에 그때까지 생존해 있을 자들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