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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만의 여로(旅路), 장평을 지나며
김 선 구
고속도로가 계속 정체되니 우리가 탄 버스가 가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아침에 갈 때는 시원하게 잘도 질주하더니 돌아오는 길은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 도로가 몸살을 앓는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공휴일을 맞아 우리 산악회에서도 단풍놀이에 나섰다. 강원도 오대산 소재 월정사와 상원사를 거쳐 적멸보궁까지 답사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차창너머로 평창IC라는 교통표시판이 눈에 들러온다. 과거에는 장평IC라고 했던 곳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유치되면서 장평이란 명칭이 퇴출되고 평창으로 바뀌었다. 장평은 나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대관령에서 생활하던 시절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면 반드시 장평정류장에서 쉬어 갔다. 장평은 평창군 용평면의 한 시골마을이었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장평서 북쪽으로 가면 메밀꽃의 고향 봉평이 있고, 남쪽으로 가면 오일장이 유명한 대화로 이어졌다.
옛날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봉평과 대화사람들이 서로 왕래가 잦았던 모양이다. 봉평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봉편으로 장 보러 가는 사람들이 장평을 거쳐 갔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구수한 얘기들이 이어졌을 것 같다. 특히 메밀꽃이 필 무렵 나귀에 짐을 싣고 달빛 속에 밤길을 가며 나누던 나그네들의 얘기가 이효석의 작품 속에 펼쳐지고 있다. 두고두고 자랑하고 싶은 얘기를 다시 꺼내는 허생원의 희열 찬 모습,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얘기를 참고 들어야하는 조선달의 떨떠름한 표정, 어른들의 얘기를 흘려 넘기며 무심히 따라가는 동이 소년의 숨겨진 운명이 오늘도 그 길을 수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대관령 소재 K시험장으로 근무명령을 받았던 시기가 근 사십년이 지났다. 그 시절 입덧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울로 가는 길에 장평터미널에 도착하기를 학수고대 했다. 장평에서 버스가 서면 버스에서 내려 잠시 휴식하고 한숨 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휴식하면서 우리도 훗날 허생원과 조선달의 행적을 따라 대화의 오일장으로 가 보자고 했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봉평에도 대화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때 배속에 있던 애가 이제 애들 아빠가 되도록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그런 여유조차 없이 지내 왔다.
이번 산행에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선재길을 둘러 볼 것이라는 얘기에 선 듯 따라 나섰다. 40년 전 아내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가 본다는 기대가 앞섰다. 그 때는 교통이 불편하고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나들이 나온 사람이라곤 없었다. 계곡 따라 난 좁은 길을 따라 둘이서 걸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봄이 오는 계절이라 파릇파릇 나무 끝이 푸르렀고 맑은 계곡물 소리가 정겨웠다. 문수보살이 동자로 변신하여 나타나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는 세조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던 곳이 어디쯤인지? 깊고 넓은 계곡물이 보이면 혹시 저곳인가 하고 막연히 저울질 해보며 걸었다.
다시 가서 보니 월정사에서 상원사 거리가 무려 9km나 되었다. 걸어서 주파하는 데는 서너 시간 걸린다고 하니 다소 먼 길이다. 그런데도 그 때에는 전혀 멀어 보이지 않았던 길이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때였으니 천리 길도 한 걸음처럼 가벼웠던 모양이다. 우리가 걸었던 길이 이제는 넓은 차도로 변하였고 계곡 맞은편에 있는 오솔길을 정비하여 선재길이라 부르고 있었다. 불교화엄경에 선재동자가 지혜를 찾아 구도(求道) 길을 걷고 있다. 선재동자가 갔던 길을 재현해 놓았으니 찾아오는 행락객들도 구도의 길을 걸어 보라는 의미일 것 같았다. 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도 구도행각일 터이니 모두가 선재동자모습들이 아니겠는가.
월정사 입구에는 주차권을 사려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도 선제길에도 행락객들로 북적 거렸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상원사부터 찾았다. 여기에서 일행 중 일부는 선재길을 걷도록 하고, 우리는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보기로 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져 있는 곳으로 불자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과거 상원사까지 왔다가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다음기회로 미루었던 것이 40년 세월이 흘렀다.
상원사 경내에 들어서니 몰라보게 변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과거에는 법당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었는데 이제는 여러 채 건물들이 널려 있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그 때 보았던 법당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눔 할 수 없었다. 문수동자와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는 전각에는 기도하는 불자들과 염송소리로 가득했다. 절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벗어 걸었다는 관대걸이가 눈길을 끌었다. 이제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전설이 주체가 되어 내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상원사를 다시 찾은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다. 상원사를 지켜 낸 한암 선사의 일화 때문이다. 6.25때 상원사가 작전 지역으로 정해져 불태워지게 되었다 한다. 이때 한암 스님이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고 법상에 앉아 함께 타 죽기를 자원하자 작전 명령을 받은 장교가 문짝만 뜯어내 불태워서 연기를 피우고 철수했다. 생사를 초월한 스님의 행보와 지혜로운 장교의 판단으로 상원사가 지켜졌다. 뿐만 아니라 상원사에 소장된 동종(銅鐘)과 문수동자상 그리고 상원사중창선언문 등 국보급 보물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서울 근교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한암 스님은 50세 되던 해에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삼촌(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오대산에 들어가 27년간을 상원사에 칩거 하였다. 무상무념 속에 영원을 구가하던 스님은 어느 날 아침 가사와 장삼을 단정히 차려입고 법상에 앉아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음을 맞이함)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 줄 심산이었을까! 어느 정훈 장교가 스님의 열반(涅槃)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알렸고, 그 모습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대면해 볼 수 있었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거동 길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대패질 한 듯 잘 다듬어진 현무암으로 차곡차곡 계단을 이루었고 길가에는 현무암으로 된 석등이 세워져 있으니 밤길까지 밝게 비춰줄 모양이다. 산길은 산길다워야 하는데 너무 잘 정비해 놓은 모습에 좀 거부감이 느껴졌다. 옛날 한암 스님은 이 길을 따라 매일 적멸보궁을 드나들었다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는 청산의 학이 되어 오대산 숲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올라오는데 너무 힘이 들고 보니 별 감흥이 없었다. 상원사에서 불과 2km정도에 불과한데 등고선이 높아서 힘들게 올라왔다. 신라시대 자장스님은 어떻게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적멸보궁은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이었다. 승천하는 용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천하 명당이라 하지만 풍수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풍광이 수려한 장소로 보일 뿐이다. 전각 뒤편에 5층 마애불탑을 새긴 조그만 표지비석이 서있다. 오랜 세월 풍상을 이기고 서 있는 폼이 마치 충직한 수문장처럼 보였다. 이곳 주변에 진신사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탑을 향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불상이라 했는데 굳이 여기에만 큰 의미를 부여 할 필요가 있을까?
도로는 다시 정체가 풀려 통행이 원할 해졌다. 원주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선 버스가 힘차게 밤길을 달린다. 하루 동안 피로가 슬며시 몰려온다. 40년 만에 다시 찾아 걸어본 여로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러나 아직도 여로가 끝나지 않았다. 장평을 지나 봉평과 대화로 가야할 길이 남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첫댓글 40 여년 전 발령받아 사모님과 함께 걷던 길, 주마등 처럼 스치는 그 길, 세월속에 변해버린 그 길이 마음속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점철됩니다. 6. 25 전쟁때 죽을 각오로 상원사를 지켜내신 한암 선사와 지혜로운 군인의 일화가 인상적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장평'에 담긴 오래 전 추억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곳인가 봅니다. 봉평, 장평, 대화 .. 듣기만 해도 설레입니다. 때 맞추어 메밀꽃 축제에 꼭 가보고 싶습니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탐방에 나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상원사를 지켜 낸 한암선사와 장교의 일화가 감동적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젊은 시절 사모님과 거닐었던 선재길 계곡, 임부를 대동하고 장평정류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 등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잔잔한 감동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0년이란 추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뜻깊은 여정,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찬찬히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40년전 신혼시절을 돌아보며 찾아간 선재길이 감회가 새로우셨겠습니다.
절을 지켜낸 두 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닫습니다.
오래 전에 가본 오대산은 저에겐 무척 버거운 산이었습니다.
다시 한번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방문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봉평이니, 대화장이니... 문학 속에 지명만으로도 설레고 가 보고 싶은데, 젊은 시절 아내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니 그 설레임이 오죽하셨겠어요. 저는 메밀꽃 축제 때는 아니지만 메밀꽃이 한창일 때, 이효석 문학관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주변 전체가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밭에서 사진도 찍고...저에게도 좋은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 흐뭇한 마음으로 추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40 년만에 찾아 간 오대산 상원사는 감회가 깊겠습니다. 예전에 가고 싶었던 적멸보궁도 찾아갔으니 큰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상원사와 한암 스님의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40년전 신혼의 추억이 스며있는 좋은 곳을 다녀오셨군요. 적멸보궁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상원사를 지켜 낸 한암 선사의 일화를 읽으니 오래전에 본 불교영화 '등신불'이 떠오릅니다. 스스로 삶을 회계하며 지난날의 업을 갚기위해 장작덤이 위에 정좌하여 죽음을 택한 스님에 대한 영화였는데 전율을 느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요. 한때 그곳 가까이서 근무하셨고 옛깋을 더듬던 기억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생각이 다르면 그림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현직 때 강원도에서 잠시 근무할 기회가 있었는데, 매주 산길을 오르내리며 불교대학을 다녔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때 월정사 전나무 숲길, 오대산 적멸보궁, 상원사 문수동자상, 월정사 성보박물관, 선재길, 봉평, 대화 5일장…, 틈나면 자주 갔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득한 옛 기억으로 아물거립니다. 그러나 폭설로 천지가 눈 속에 파묻힌 하얀 산사를 넋 놓고 바라보았던 기억은 뚜렷합니다. 글을 읽으며 회상에 잠기어 보았습니다.
적멸보궁을 향해 뒷짐지고 단풍속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시는 붉은 등산자켓를 입은선생님 뒷모습이 인상적이어서 폰으로 한컷을 한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신혼시절을 회상하시며 걷고계셨군요. 상원사를 지키기 위한 한암선사와 군인의 일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음식도 숙성이 되어야 구수한 맛이 나듯이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젊은시절 가보았던곳 훗날 다시가보는 제미를 느꼈을것 같습니다. 그날 너무 힘 들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한암선사가 큰일을 하셨습니다. 기억을 되살리며 잘 읽었습니다.
동문 산악회에서 오대산 등산을 하였는데 그 당시 다른 일정이 있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이번 등반에서 40년 전의 일을 기억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 선합니다. 한암선사가 고찰을 화마로부터 지킨 일은 실로 대단합니다.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오대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젊은시절 행복하셨던 모습이 보입니다. 사모님과 함께 장평IC에서 약속했던 소설속에 인물 허생원과 조선달이 만났던 실제 대화장을 훗날 가보자고 했던 곳을 40 년이 지나도록 약속을 못지킨것에 대한 아쉬움을 글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도 헛 약속 많이도 어겼는데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암스님께서 坐脫立忘하셨다니 카메라로 모습을 담았다고하니 믿을 수 밖에 없지만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