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밖에서 밤을 지새운 태환은 기숙사에서 나오는 다애를 발견했다.
“여어, 김다애군.”
“군이라닛!”
다애가 버럭 했다.
“이 쉐리, 어디서 밤을 새고 이제야 들어오는 거냐?”
“그냥, 어젯밤 하늘의 별이 아름다워서 도저히 기숙사에 들어갈 수가 없더라.”
“지랄하네.”
다애가 키득거리며 태환의 팔을 툭 쳤다.
“여자랑 있었냐?”
“아니.”
“구라깐다. 여자랑 있었지?”
태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해두지.”
“인마. 너도 이제 한 여자를 만나서 정착을 해야 할 거 아니냐.
언제까지 이 여자, 저 여자 만날 거냐?“
“난 아직 젊고 여자는 많잖아. 한 여자에게만 관심을 줬다가는 다른 여자들이 들고 일어날 거다.”
“미쳤구만.”
태환과 다애가 함께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요새 날씨 많이 풀렸지? 곧 꽃 피겠다.”
“그러게. 개구리 잡으러 가자.”
“꼭 개구리를 잡아야 하는 거냐?”
“응. 잡고 싶어.”
“멍청한 녀석.”
태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다애를 대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 다애야. 넌 여전히 김다애지. 난 그걸 잊지 않을게.’
그들은 혜선을 발견했다.
혜선은 커다란 스케치북을 들고 걸어가는 중이었다.
나풀거리는 하얀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혜선아!”
다애가 반갑게 혜선을 불렀다.
혜선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다애의 옆에 있는 태환을 보고 잠깐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어, 다애야.”
“좋은 아침이다. 잘 잤어?”
“응.”
“별로 잘 잔 것 같지 않은데.”
태환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혜선이 흠칫했지만 별 말은 없었다.
“눈 아래가 빨갛다, 너. 울었냐?”
태환이 물었다.
“아까 눈을 심하게 비벼서 그래.”
혜선이 차갑게 대꾸했다.
태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황사 때문에 눈병 걸릴지도 몰라. 조심해.”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끄냐? 신경이라는 게 켜고 끌 수 있는 거였냐?”
“못 끌 건 또 뭐야?”
“네 머리카락을 봐.”
“뭐?”
“부딪치는 햇살에 출렁이는 갈색 파도.
하얀 백사장에 내려앉은 황금빛 햇살.“
“그, 그게 뭐야?”
혜선이 얼굴을 붉혔다.
태환이 씩 웃었다.
보기 좋은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그냥, 네 머리카락 예쁘다고.”
“가,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와?”
“내가 신경 안 쓰기를 바라면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다 없애버려.
머리카락 색깔이 너무 예뻐서 신경 쓸 수밖에 없으니까.“
태환이 먼저 걸어갔다.
다애와 혜선은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태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혜선은 무심코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스쳐 내려가는 머릿결.
웨이브의 갈색 머리카락이 혜선의 등까지 늘어져 있었다.
한 번도 이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뻐.”
다애가 말했다.
“너, 예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고 게다가 머리카락도 정말 예뻐.”
“아아.”
“태환이가 시를 읊어줄만 해.”
“아…….”
“태환이 녀석이 좀 이상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너무 차갑게 대하지는 마.
저 녀석, 저래 봬도 남이 하는 말에 신경을 많이 쓰는 녀석이거든.“
“으응, 그래.”
혜선은 다애의 얼굴을 살펴봤다.
태환을 지켜보는 다애의 눈에는 태환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지만, 그것은 태환이 원하는 애정과는 달랐다.
‘모르겠니, 다애야? 태환이가 가장 신경을 쓰는 건 바로 너야.’
숙취로 인해 두통이 심했고 속이 메스꺼웠다.
어떻게든 오전 수업을 받으려고 했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교실에서 나왔다.
다애가 향한 곳은 미술실.
오전 수업 시간이었기에 미술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미술실의 가장자리는 학생들의 개인 사물함이 있었고,
벽에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선반에는 소묘를 위한 각종 사물이 있어서 원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었다.
미술실 구석에 누워서 잠을 잘까 하다가 불현듯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사물함 안의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이젤에 스케치북을 세워두고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고 그릴 사물은 필요치 않았다.
다애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수많은 소재가 존재했다.
그것들 중의 하나를 꺼내어 그리면 됐다.
하얀 종이 위에 사각거리며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반쯤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빠져들었다.
그리지 않았을 때는 몰랐다.
그림을 그린다는 게 이토록 매력적이고 행복한 일인 줄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의 매력에 빠졌다.
그림을 그리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몽환적인 상태에 빠졌다.
몸이, 마음이, 생각이 모조리 그림 안으로 흡수되어갔다.
다애의 손목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다애가 자각하지도 못하는 새에 그림 한 장이 완성되었다.
스케치북을 넘겼다.
펄럭거리며 넘어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경쾌한 소리.
다애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신난다.”
싸움을 하는 것보다, 검도를 하는 것보다, 농구를 하는 것보다 더 즐거웠다.
가만히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생동감이 있었다.
단지 손목만 움직일 뿐인데도 온몸을 움직이는 듯 흥분이 되었다.
연필이 검은 선을 그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때로는 굵게, 때로는 가늘게 그려지는 검은 선들이 섬세한 무늬를 이루다가 결국은
스케치북 안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켰다.
그 과정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다애의 스케치북은 쉴 새 없이 넘어갔다.
다애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여섯 장이나 되는 그림을 그린 후였다.
짝짝짝-
박수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 세호가 서 있었다.
청바지에 흰색 남방을 입고 팔을 걷어붙인 세호는 다애 뒤의 사물함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세호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엄청난 힘이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내가 오는 소리까지 못 들을 정도로 열중했던 거냐?”
“하하하. 그렇죠, 뭐.”
“오전 수업은?”
“쨌어요. 피곤해서.”
“피곤하다는 녀석이 잘도 그리더라.”
“그림을 그리는 건 피곤하지 않거든요. 굉장히 즐겁잖아요.”
세호가 웃으며 다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정말 가르칠 맛이 나.”
“그런 말, 자주 들었죠. 훗.”
“녀석, 잘난 척은……. 아니, 잘난 척이 아니라 진짜로 잘난 거지.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앗!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네.”
“컵라면 사왔는데 같이 먹을래?”
“네, 좋아요! 안 그래도 얼큰한 게 땡겼거든요.”
“어제 술 마셨냐?”
세호가 미술실 앞에 있는 정수기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물었다.
“아, 그게…….”
“뭐, 나야 그런 건 뭐라고 하지 않지만, 적당히 마셔라. 몸 상한다.
천재들은 이상하게 빨리 죽거든. 너는 빨리 죽지 말고 수많은 작품을 남겨라.“
“푸하하하.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그런 칭찬 듣는 거 조낸 어색해요.”
“그러냐.”
두 사람은 컵라면을 사이에 두고 미술실 바닥에 앉았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버지도 화가셨지.”
“돌아가셨어요?”
다애가 라면을 후후 불며 물었다.
“응. 교통사고였어. 상대방이 음주운전이었지.”
“음주운전 하는 쉐끼들은 다 죽어야 돼. 죽을 거면 지나 죽을 것이지, 꼭 남까지 끌어들이잖아.”
“그러게 말이다.”
과거를 회상하듯, 세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도 이 학교를 다녔어. 어느 날, 아버지가 날 찾아오셨다. 처음으로 말이야.”
“왜 찾아오셨대요?”
“천재를 발견했다고.”
“천재요?”
“응. 어느 유치원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를 발견했다고,
그 아이라면 역사에 길이 남는 화가가 될 거라고 하시더라.“
“아아.”
“나에게 공부하는데 힘들지 않느냐,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느냐 같은 한 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지.
그저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가 가셨어.“
“헤에…….”
세호는 자기가 어린 다애를, 그것도 학생인 다애를 앞에 두고 넋두리를 늘어놓는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애는 얼큰한 라면 국물을 들이켜고 물었다.
“섭섭했어요?”
“응?”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선생님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이 여겨져서 섭섭했어요?”
건성으로 듣는 듯 보였던 다애는 요점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었다.
세호는 놀라서 다애를 쳐다봤다.
세호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어린 시절 느꼈을 세호의 서운함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자신의 어린 마음을 들켰다는 게 부끄러웠다.
“아니다, 그런 거.”
“에이, 뻥. 솔직히 섭섭했잖아요.”
“섭섭이라…….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 아버지는 그 날 집에 돌아가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내가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어.“
“그러세요.”
다애가 피식 웃으며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았다.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후였다.
세호는 자신의 라면이 퉁퉁 불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입에 넣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체력 소모가 많은 일이기에 수업 시작 전에 얼른 먹어둬야 했다.
“질투 유발일 게 뻔하잖아요, 그런 건.”
다애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말했다.
“응?”
“선생님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선생님 아버지의 마음을.”
“건방진 건 너나 최가원이나 똑같네.”
“건방지기로 따지면 내가 세계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 어떤 종목이든 세계 최고가 아니면 성에 안 차거든요.“
“그래, 그래. 그런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 질투 유발이라니?”
“아버지께서 천재를 발견하셨어요. 그리고 일부러 선생님을 찾아와서 말했어요.
천재를 발견했다. 이 애는 세계 최고가 될 거야. 왜 그런 체력 낭비를 했을까요?“
“글쎄……. 왜일까?”
“선생님을 인정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선생님이 가망 없다고 생각됐으면 아버지가 일부러 찾아와서
천재의 등장을 언급할 이유가 없잖아요. 천재가 발견됐으니 선생님한테 더 분발하라고 그런 거예요.
왜냐고요? 선생님의 실력을 인정하니까요. 선생님이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천재를 능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선생님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거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구요.“
“아…….”
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해석이었다.
세호는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투덜대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듯 웃을 뿐,
다애와 같은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누구도 세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
“어휴……. 선생님씩이나 된 사람이 아버지의 마음도 몰라주고 징징대다니……. 통탄할 일이로구만.”
세호는 다애가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뒀다.
오랜 시간, 세호의 가슴을 억누르던 짐 하나가 막 세호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설령 인정 못 받았으면 어때요? 노력해서 보란듯이 세계 최고가 되면 만사 오케이 아니에요?”
퉁명스러운 다애의 목소리에 세호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성스럽지 못하게 짧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벌러덩 뒤로 눕는 다애.
세호의 가슴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발견한 천재가 바로 이 아이지요? 아버지는 이 아이를 키우지 못하셨지만,
제가 키우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 아이를 남겨주셨군요.
제가 이런 천재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하신 거군요.‘
세호는 손을 뻗어 다애의 손을 꽉 잡았다.
요새 여고생들, 남자 선생님이 손끝만 스쳐도 성희롱이라며 꺅꺅댄다던데 다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애에 대한 애정이 가슴에 충만했다.
다애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천재였다.
어떻게든 이 아이를 최고로 만들고 싶었다.
“넌 반드시 최고가 될 거다.”
그 말에 다애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라면 시작도 안 했을 걸요.”
미술 수업을 하기 위해 미술실로 온 학생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창문으로 안의 광경을 지켜봤다.
미술실 바닥에 누워 있는 다애와 그런 다애의 손을 꽉 잡은 세호.
오해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핸드폰을 들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지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애, 저 기집애. 역시 몸으로 선생님을 꼬신 거였어.”
여학생 하나가 말했다.
“씨발. 저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진짜 너무하네, 선생님도. 학생 하나한테만 잘해주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우리, 이대로 넘어가지 말자.”
“그래. 우리의 권리는 찾아야지!”
여학생들이 수군댔다.
뒤늦게 미술실에 도착한 혜선이 안을 흘끔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유독 혜선을 괴롭히는 여학생이 혜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확 잡아당겼다.
혜선의 목이 뒤로 꺾였다.
여학생은 그 자세 그대로 혜선을 내려다보며 빈정거렸다.
“봤어, 신혜선? 저게 김다애야. 널 지켜주는 김다애의 더러운 뒷모습이라고.”
하나님을 빽으로 세상과 맞짱 뜬다...by백묘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장편 ]
아수라장 스케치북 12
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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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27 16:26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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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애들이 더럽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저빈정거림만할줄알지 개념이라곤도통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들 정신을 안드로매다에 수학여행 보냈나 -_-!!! ㅠㅠ 다해 다시 부활하는거죠 !?
ㅋㅋㅋㅋㅋ저아이들정말한대주떄리뿌고싶네요^^저팬카페에서읽고또읽엇어요~~~ㅋㅋㅋ넘재밌어요^^
어므 다애야힘내.ㅋㅋㅋㅋㅋㅋ
아악~ 백묘님도 여기서 연재를 하시는군아
웃겨웃겨 혜선이는 다해를 믿을거임!!
쟤네는 할일도 없나//
아니거등???
손잡는걸로 더럽다네...ㅋ 뭐눈에 뭐만보인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