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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만, 또, 저희가 문화패 출신으로써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올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올립니다. 밑에 강의누나 말도 그렇구요....허허.....
지금 광주에도 있지요. 또, 2008년 비엔날레보다 더욱 주목받고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히는
대인시장의 예술시장이나, 옛날 계림극장이 헐리고 그 옆에 들어선 매개공간 미나리.....
들과 같은 움직임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 그러한 대안공간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대한 일단락같이 열린 토론회의 참관기입니다.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럴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모두들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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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동안 안산의 대부도에서 창작스튜디오 네트워크 포럼이 열렸다. 경기창작센터에서 주최한 이 포럼은 최근 미술계의 화두인 레지던시에 대한 일단락 같은 대규모 토론의 장이었다. 발제, 토론자로 선정된 사람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기획자, 작가, 기자, 전공학생, 등 수 백 여명의 참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정말, 난 안산 중앙역에서 123번을 타고 들어갔는데 장장 1시간 30분이 걸리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홍대와 사당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하였지만 그래도 황금휴가철에 그만한 시간을 내서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서 내려보니 짠내를 가득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에 절로 정감이 갔다. 그런 이곳에서 지금 한국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미술정책들을 내놓고 있는 기관의 터라는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토론은 빡세게 진행되었다. 오후 1시 기조발제와 질의응답 시간이 끝난 다음 2 개의 라운드 테이블을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진행하였다. 예정된 시간을 넘겨 주최측에 의해 반강제로 끝난 라운드테이블은 저녁식사와 숙소의 술자리로 이어졌다. 일요일인 다음날도 오전 9시부터 시작되었고 역시 2 개의 라운드테이블을 동시 진행하였다. 각각의 라운드 테이블에 선정된 사람들은 8-9명이었고 청중들의 질문은 날이 섰고 답변에는 성실함이 묻어났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라운드테이블에선 시작부터 주최측이 제시한 주제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고 청중들까지 가세하여 그 열기가 더 대단했다고 한다. 대학원 들어와서 다녀본 어떤 학회보다 진지하고 유머러스하고 자유롭고 참여자 모두에게 성찰의 시간을 주는 자리였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내 이런 이야기를 하니 오늘은 많이 얌전 뺀 자리였다고 도리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나도 우리 학계가 이해 안되는데......뭐.....
주최측이든 토론자든 청중이든 격식따위는 아예 없었다. 꼭 현대미술계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꼭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센터의 총괄자이자 경기도미술관장 그리고 어떤 면에서 한국현대미술계의 대모라 할 수 있는 김홍희 관장은 밤늦게까지 막걸리와 김치쪼가리를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최측의 사회자들도 냄새나고 후줄그레한 옷차림으로 1박 2일을 버텼다. 포럼을 진행하는 스텝들도 쓰리바에 반바지, 프린팅 된 티셔츠를 입은채로 도대체 누가 상관이냐 싶을 정도로 다들 편하고 여유롭게 행사를 진행하였다. 내가 대학원 가서 처음 가 본 학회를 보고 질겁한게 떠오른다. 여자들은 왜 치마와 뾰족구두를 신고 오는지, 도대체 누구 보고 일을 하라는 건지. 꼭 나같은 남자애들이 책 나르고 기자재 나르고 프랑달고 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커피와 다과를 준비한다. 뭐야 이거. 발표자들은 양복을 입고 오고 질문자는 한 명도 없고 있어도 다 학회 임원진들이다. 그리고 임원진과 고생한 간사들끼리 폼나는 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빠이빠이.
내가 생각한 학회가 있다. 1박 2일 또는 2박 3일동안 똑똑하신 교수님들은 서로 박터지게 토론하고 대학원-학생- 들은 술먹고 그러다 눈맞아 연애도 하고. 구경온 청중들은 학회 주취측에서 준비한 술과 공연을 보고 먹다 마시다 토하다 빡세게 토론에 참가한다. 플라톤이 말한 향연, 정말 그 향연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얼마 좋은가? 그리고 한국사회처럼 노는 것에 관대한 사회가 어디있다고 ..... 뭐 나도 길들여진 사람이라 멍 때리고 있지만 말이다.
최근 한국현대미술계의 화두는 대안공간에서 레지던시로 무게축이 이동하고 있다. 90년대 말 새로운 한국의 문화지형도는 주류, 대중문화와 문학이 독점하던 순수예술의 영역에 카운터 컬쳐라는 반주류 청년문화가 삐집고 들어간다. 당시 오렌지족을 신세대 저항 문화의 일종으로 논하려고 했던 건 참 지금 생각해도 닭살스럽고 냉철한 자기비판이 필요한 지점이다.
음악에서 인디씬, 영화에서 단편과 독립영화들의 본격적인 등장, 그리고 미술에선 화랑과 미술관으로 양분된 자양에 대안공간이란 개념과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인사동 사루비아 다방, 대안공간 풀, 대안공간 루프, 쌈지스페이스 같은 곳이 그들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영리를 추구하였고 이미 평가가 완료된 작가들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작가들을 위주로 전시를 꾸렸다. 전시뿐만 아니라 담론과 비평의 생산, 작가들과 일반인들과의 소통과 교감, 주류문화이념에 대한 반대행동 들을 모의하고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창작공간, 즉 레지던시 였다. 작가들에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이끌어 낸다. 그 곳에는 진행중인 작업에 좌표를 제시할 수 있는 비평가가 참여하였고 대안공간에서 발굴한 작가들은 지금은 스타작가가 되어 있다. 이 교류에는 국내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전 세계 레지던시를 하는 기관이 있다면 포트폴리오를 제공하고 인터뷰에 통과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국내 레지던시 기관들도 국적, 인종,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작가들에게 열려 있다. 포럼에선 레지던시만을 떠도는 작가들을 노마드nomad 작가라 부르며,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그 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미학적, 윤리적 과제가 있는지가 논쟁 중의 하나였다.
레지던시를 꼭 국공립 미술관과 같이 거대한 자본과 인력이 제공되는 곳에서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포럼에 참여한 레지던시 기관들은 안양, 안산, 광주, 목포, 순천, 청주, 포천, 부산 등에서 활동하는 젊고 돈 없는 젊은 디렉터 또는 큐레이터 또는 문화행동가들이었다. 이들은 국내 지원기금과 국제적인 문화펀드들을 활용하여 다각도로 자금을 끌어들이고 부족하면 사비를 털고 옆사람을 꼬시고 협박하여 사업을 진행시킨다. 또 아예 대놓고 국제적으로 친한척해서 아이폰과 페이스 북, 유투브 등 국제적인 싸이트나 쏘시얼 네트워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안공간이 비영리 공간이었듯이 레지던시에 필요한 자금을 지자체와 정부에서 지원받는 것이 과연 대안적인 미술활동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격하게 일어났다. 지금 전국의 지자체들은 레지던시를 못 만들어 환장이다.
글로컬glocal 이라고 한단다. 이제 이러한 국제적인 교류와 네트워크로 인해 지역과 세계가 동시다발로 이해되고 담론과 실천이 발생한다. 과거 글로버리제이션처럼 선진 1세계가 후진 3세계를 교화시키고 개조시키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의 다층적인 특색과 개성 문제점들을 함께 공유하고 소통하여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의 아주 작은 지역문제에 레지던시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3개월, 6개월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지역의 문제에 작가들이 얼마나 개입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떠오른다. 가능하다는 측과 국제 네트워크는 환상이라는 측의 대립은 각자가 처한 지역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이 반드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런 문제제기의 바탕에는 기획자들이 어떤 문제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상상의 해결책, 짜여진 해법과정에 맞추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병폐를 낳는다는 비판이 깔려있었다. 예로 이주노동자가 가득한 안산 원곡동에서 미술 프로젝트는 그들을 남한의 한 문화로 인전하고 받아들여야 된다는 논리가 선험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그들은 남한에서 소외자임에 분명하지만 원곡동내에선 한국인들이 비주류라는 것이다. 이미 민족국가, 근대의 시각에서 그들을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선험적으로 규정짓는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럼, 대안공간, 레지던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에는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미학적 , 정치적 목표가 달랐으리라.....할말은 분명 많았으리라...
이러한 글로컬이나 지역내에 위치한 레지던시는 기존의 화단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불협화음은 고상한 표현이다. 지역이, 그 곳의 화단이, 예술계가 작으면 작을수록 이권을 둘러싼 갈등은 치열하고 추잡스럽다. 한 지역에서 올라온 기획자는 아예 대놓고 토호 세력들을 하이에나라 부르며(토론과정에서의 격한 발언이 아니라 발제문 모든 페이지에 글로써 차분하게...) 그들이 지역문화를 어떻게 말아먹고 있는지 생생하게 까발렸다. 또, 지역의 형님, 동생 문화와 학연과 지연으로 연결된 곳에서 그 지역 출신의 기획자들은 상습적으로 향응과 청탁 폭언과 협박에 시달려야 하는 고충을 토로해냈다. 역으로 타 지역 출신 기획자들은 아예 문화판 근처에 가기도 힘들고 수시로 간보기와 여기서 경력 쌓고 떠날 뜨네기 취급에 너더리를 냈다.
하지만 그럼 지역의 미술계, 문화판을 꼭 서울처럼 혹은 글로컬하게 바꾸는 것이 대안이냐의 문제제기가 들어왔다. 과거 지역에는 자신들만의 지역미술문화와 언어가 있었고 생산과 소비가 나름의 자율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KTX와 인터넷 등의 보급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은 모두 서울이나 홍콩의 아트페어로 가버렸고 소비처를 잃은 지역의 미술가들은 당연히 이익단체로 변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로써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다. 이 슬프고 비루한 현실 혹은 우리가 알면서도 조금은 개념의 추상성에 글로컬이라는 빠른 속도에 살짝 외면한 사실을 꼬집는 발언이었다. 역시 이 문제도 앞으로 지역미술계와의 갈등은 여전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으로 끝을 냈다.
서구에서 모더니즘의 종말 이후 그리고 60년대 정치적 좌파들의 문화적 액티비즘의 창출로써 시작된 대안공간 그리고 레지던시는 포스트-뮤지엄의 아이콘 같은 것이 되었다. 그들은 모더니즘 미학을 옹호하는 미술관들을 역사화 되고 신화화된 작가들의 작품의 감옥, 정신병원으로 보았다. 또,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거세되고 하얗게 탈색된 화이트큐브에 보관된 작품들을 이미 생기가 다한 시체들의 안치소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대지미술의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인 개념이 확대 발전하면서 미술관 밖에서 진행되는 전시와 액티비즘 활동이 강조되었다. 남한에서도 6-70년대 헤프닝, 퍼포먼스, 거리 전시회 등의 개념들과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걸개그림의 공간귀속성Space-attribution과 그림마당 민(90년대 대안공간 풀로 개편 운영 됨)을 통한 새로운 유통시장의 모색 등에서 지금 화두의 친연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진행된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는 예술의 시장 규모와 자본에 의해 규정된 가치에 따라 예술계를 좌지우지해왔다. 카운터컬쳐 역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파급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이미 상품가치가 하락한 과거의 위대한 명작들을 대신해 새로운 미술시장과 미술품들을 흡수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대안공간과 레지던시를 통해 촉발된 새로운 작가군들도 예외는 아니다. nomad란 개념은 이미 상품화된 지 오래이고(국내에선 해외여행과 디카의 보급으로), 그것은 역설적으로 국가와 민족, 이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외형과 유사한 면이 있다. 초국적 자본의 등장, 초국적 미술가의 등장!! 초국적 자본의 등장에 따라 아직도 근대의 (저항적)민족주의 개념이 유효하다고 보는 시각과 초국적 자본을 극복하기 위해선 전 세계(인민이란 계급개념이 아닌 경계에 선 소수자들)가 다시 연대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포럼을 주최한 경기창작센터는 경기도 미술관의 브레인들이 설립하였고 주류와 비주류, 공공미술관과 대안공간,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경계선을 지우고 새로운 공생의 파트너쉽을 내세운다고 밝혔다. 그러나 토론과정에선 그것이 이미 저항적인 대안공간, 레지던시 등 카운터컬쳐를 주류로 흡수해내려는 자본과 관료들의 시각이 아니냐고 맹공이 이어졌다. 관광예술행정의 일환으로 지금 설립되는 지자체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이번 포럼의 부재는 ‘레토릭(수사학)에서 프락시스(비판적 실천)’ 으로 이기 하지만 저 슬로건 역시 비주류문화를 포섭해내려는 전략은 아닌지 의심을 갖은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이 포럼과 이 포럼에 모여 수많은 층위를 보여준 이들의 토론에 지지를 보낸다. 이들의 이런 움직임이, 토론이, 대안이, 비전이, 행동이, 감성이, 치열함이, 나이를 따지지 않는 젊음이, 내가 저 만치 흘러가는 세계를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그들은 한 발짝 한 발짝씩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날 밤 대부도에는 강한 바람과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는 센터에서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 어촌체험마을의 몽골텐트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숙소 배정표도 없었다. 그냥 알아서 남자가 들어가 있으면 여자는 다른 텐트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음, 숙소 주변 지하식당-아마 수련관같은 곳이간 보다 -에서 막걸리, 김치, 깍둑이, 칼국수, 파전에 식사와 술을 곁들였다. 그리고 숙소에서 우리 때문에 아직 안 닫은 점방에서 맥주와 소주를 담배(8갑)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진행은 스텝들 몇 명이서 수고를 해주었지만 모든 건 참여자가 알아서 자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어쩡정한 위치인 나는 혼자서 이 팀 저 팀 기웃거리며 술을 얻어먹었다. 뭐, 다들 정답게 자리를 같이 해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장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사람들간의 동질감과 강한 결속감, 대화의 유사성 등에서 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로 지역과 상황은 틀려도 모두가 힘든 일을 하고 있다는 동지적 유대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나같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판이 벌려졌다. 파워블로거, 대안공간이지만 미술보다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씬에 치중하는 디렉터, 공연 비평가, 학생, 작가 등이 어울렸고 4시 30분까지 노가리를 까댔다. 그들과의 대화속에서 우리에게 과연 해방 이후 전통과 컨템포레리가 있었던 시대가 있는지가 의문이라 하였고, 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천 수만의 문화씬들에 대해 도대체 비평은 어디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쏟아냈다. 기억나는게 이정도일뿐이다. 허허....
이런 분위기를 대학원 이전, 군대 이전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아, 나도 옛날엔 저기 어디쯤에서 술쳐먹고 노가리 까고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폭우가 쏟아지는데 밖에선 판소리, 민중가요, 포크송, 트로트 가 흘러 들어온다. 이 포럼과 참여자들의 기원이 어디였는지 어슴프레 추측해볼 수 있게 해준다. 2002년 미선이와 2006년 평택 대추리의 액티비즘에서 지금의 문화활동가들이 한 갈래를 틀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 논문을 포기하면서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남쪽 도시의 친구들은 가서 배운게 뭐 있냐고 말하기도 한다. 배운건 없다. 좀 나이를 더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1박 2일을 지내면서 보니 원점의 위치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나이를 더 먹은 게 다가 아니라 점점 잃을게 많아지고 있기도 했다. 상위클라스들이 보기엔 너같은 놈이 잃을게 뭐가 있겠냐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오 마이 갓!!!.... 난 점점 잃을게 많아지는 소심한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폭우가 쏟아지는 600km의 고속도로를 맨몸으로 포복하며 기어가고 있을 때 난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돼지가 되어 비좁은 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어두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아직 어떤 방식으로 내 삶에 개입될진 모른다. 그래도 무언가 흔적을 남기진 않을까 기대한다. 또, 당분간은 시름이 깊어질 것 같다. 허허.....
첫댓글 곧 연락드릴 일이라... 혹시? ^^
재섭아. 글 잘 읽었다. 그리고 축하한다.~~조만간 공식 발표가 있겠지? ㅋ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게 맞구나^^:; 무지 추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