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을 만들고 악법에 걸리다
(출처 : 청성잡기 제3권 성언(醒言))
심기원(沈器遠)이 김자점(金自點)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려 주벌될 때에 김자점이 수상(首相)으로 있었다. 이에 김자점은 심기원에게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이 역적은 상률(常律)로 단죄해서는 안 되니, 먼저 팔과 다리를 자른 뒤에 죽여 반역자들을 징계하소서.”
심기원이 형(刑)을 받을 때에 집행하는 자가 먼저 그 다리를 자르려 하자, 심기원이 형틀에 엎드려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그러자 집행하는 자가 “김 상공(金相公)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심기원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김자점이 주벌될 때에 과연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후 이 법은 폐지되었다. 흑산도는 옛날에 강도(强盜)로서 사형을 감면받은 자들이 유배 가던 곳으로, 조정의 신하들은 일찍이 이곳에 유배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신임옥사(辛壬獄事)때 이진유(李眞儒)가 홍계적(洪啓迪)을 미워하여 처음으로 홍계적을 이곳으로 유배 보냈는데, 이진유 역시 끝내 이곳으로 유배되어 홍계적과 똑같이 죽었다.역적을 처벌하는 법을 소급해 적용한 경우는 예전엔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조태구(趙泰耈)가 과천(果川)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상로(金尙魯)가 그것을 탐내었으나 조태구의 집에서는 주지 않았고 김상로가 여러 번 사려고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을해옥사(乙亥獄事)가 일어나자, 김상로는 조태구 등에게 역적을 처벌하는 법을 소급 적용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를 청한 다음, 마침내 그 별장을 호조로부터 헐값에 사들였다. 여기에다 경기에서 가장 호화스런 저택을 지었는데 역시 결국 나라에 몰수되었고, 소급 적용하는 법도 폐지되었다.
O, 심기원(沈器遠) : ? ~ 1644.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수지(遂之)이다.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44년 좌의정으로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을 꾀하다가 부하의 밀고로 거사 전에 죽임을 당하였다.
O,김자점(金自點) : 1588 ~ 1651.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이다. 음보로 출사하였으며 1644년에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51년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元斗杓),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한 역모가 드러나 아들과 함께 주벌되었다.
O, 신임옥사(辛壬獄事) : 경종(景宗) 1년인 신축년(1721)과 2년인 임인년에 일어난 옥사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신축옥사는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한 노론(老論)을 소론(少論)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여 이이명(李頤命),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사대신 등을 처벌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며, 임인옥사는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명문의 자제들이 이른바 삼급수(三急手)를 써서 경종을 암살하려 하였다고 고변하여 노론을 일망타진한 사건이다. 신임사화라고도 한다.
O, 이진유(李眞儒) : 1669 ~ 173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진(士珍), 호는 북곡(北谷)이다. 1722년(경종 2) 사간으로서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건의한 노론 사대신을 탄핵하고, 이어 김일경 등과 함께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였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등용되자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다.
O, 홍계적(洪啓迪) : 1680 ~ 1722.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혜백(惠伯), 호는 수허재(守虛齋)이다. 대사헌으로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신임사화로 흑산도에 귀양 갔으며, 목호룡의 고변으로 고문을 받고 옥사하였다.[주D-006]조태구(趙泰耈) : 1660 ~ 1723.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수(德叟), 호는 소헌(素軒)ㆍ하곡(霞谷)이다. 소론의 영수로 신임사화를 일으켜 사촌 조태채 등 노론 사대신을 역모죄로 죽이고 영의정에 올랐다. 영조가 즉위한 뒤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탄핵을 받고 관작이 추탈되었다.
O, 김상로(金尙魯) : 1702 ~ ?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ㆍ만하(晩霞)이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왕이 이를 후회하게 되면서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죽은 뒤에 정조가 즉위하자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고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O, 을해옥사(乙亥獄事) : 1755년(영조 31)에 일어난 소론 일파의 모역(謀逆) 사건으로 나주괘서(羅州掛書) 사건 혹은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김일경(金一鏡)의 옥사 때 연좌되어 죽은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윤지가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 객사에 붙인 일로 인하여 소론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첫댓글 결국 제발이 저린 것이지요.
세상만사 모든게 메아리인 것만 같아요.
좋은 일만하며살아가야지요.ㅎㅎㅎ
그럽시다. 얼마나 남앗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