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 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환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의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방화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우 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세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木馬와 淑女/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 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약속/박인환(1926-1956)-
먹을 것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우리는 살아 나갈 것을 약속합시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나 푸른 하늘과 내 마음은 영원한 것 오직 약속에서 오는 즐거움을 기다리면서 남보담 더욱 진실히 살아 나갈 것을 약속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