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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 24절 ~ 32절
O 너는 또한 느헬람인 스마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말할지니라. 24)
Thus shalt thou also speak to Shemaiah the Nehelamite, saying, 24)
위 말씀에서 너(thou)는 예레미야입니다. 이어서 느헬람인 스마야가 스파냐와 제사장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나오므로 차분히 읽지 않으면 내용이 혼동됩니다. 스마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스파냐와 예레미야를 통하여 전달되는 구조입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하노니 이는 네가 네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파냐와 모든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었음이라. 말하기를 25)
Thus speaketh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Israel, saying, Because thou hast sent letters in thy name unto all the people that are at Jerusalem, and to Zephaniah the son fo Maaseiah the priest, and to all the priests, saying, 25)
25절의 말씀중에 네(thou)라고 불리우는 대상은 스마야입니다. 그러므로 스마야가 자기 이름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스파냐와 제사장들에게 편지들(letters)을 보낸 것입니다. 편지가 아니라 편지들로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25절의 끝이 saying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25절 끝에 말하기를 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는 26절부터 편지내용의 인용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너를 제사장으로 삼으시어 너희로 주의 전에 관원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미쳐서 스스로 선지자가 된 모든 자 때문이라. 너는 그를 감옥에 넣어 족쇄를 채워야 하리라. 26)
The LORD hath made thee priest in the stead of Jehoiada the priest, that ye should be officers in the house of the LORD, for every man that is mad, and maketh himself a prophet, that thou shouldest put him in prison, and in the stocks. 26)
위의 26절은 스마야의 편지내용으로 인용된 부분입니다.
saying이 25절에 있어서 혼동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경의 장과 절은 후대의 사람이 만들어 붙인 것입니다. 이점도 많으나 여기서 처럼 문맥이 끊어져 혼동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절(節)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인 스테파노스(Stephanus : 1503년~1559년)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스위스 제네바에서 1551년에 출간했다. 이것이 성경을 절로 구분한 최초의 일이다. 신.구약 전체에 장과 절이 붙여져 출간된 것은 1555년 스테파노스의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 처음이다. 오늘날에 사용하는 성경은 1560년 제네바에서 발간한 불가타 성경의 장 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9장 26절의 내용은 "주께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스마야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기에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스파냐가 제사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예레미야를 감옥에 넣고 족쇄를 채우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스마야의 모습은 분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정죄함입니다. 스마야는 예레미야의 주장을 말씀의 근거나 열매를 가지고 분별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마야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예레미야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은 사람이 판단할 수 없어서 그들의 결과 즉 열매를 보고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스마야는 그러한 과정이 없이 자기의 생각으로 예언하는 자를 미쳤다고 말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화평을 예언하는 선지자는 선지자의 그 말이 이루어진 뒤에야 주께서 참으로 보내신 선지자로 알려지느니라." 하더라.
예레미야 28장 9절
사람의 판단을 내려놓고 예언하는 선지자의 그 말은 이루어진 뒤에야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으로 스마야가 분별되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스스로 선지자가 된 아나돗의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7)
Now therefore why hast thou not reproved Jeremiah of Anathoth, which maketh himself a prophet to you? 27)
이는 그가 바빌론에 있는 우리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이 사로잡힘은 오래 가리니 너희는 집들을 짓고 거기에 거하며 정원을 가꾸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으라.' 하였음이라." 하였도다. 28)
For therefore he sent unto us in Babylon, saying, This capivity is long: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28)
26절 27절 28절 모두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이 인용된 것입니다.
바빌론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인데, 예레미야는 풀려날 생각하지 말고 바빌론에 정착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이 그들에게 불편하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합당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미쳐서 스스로 선지자가 된 자의 헛소리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스마야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거짓이라는 본질임을 알기에 더욱 비본질을 더 거룩하게 위장을 하게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우리곁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으로 본질의 말씀보다 비본질의 형식인 종교생활에 집중하는 성도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저히 말씀을 자기의 삶의 기준으로 삼지 못하여 교회문화와 목사를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생각에 타협할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문화가 더 권위가 있고, 하나님보다 목사가 숭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장하기 위하여 잘못된 본질을 감추기 위하여 비본질로로 그것을 감추려 노력하게 됩니다. 명품 로고가 들어간 명품을 진짜 부자들은 절대로 착용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부자라고 인정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부자로 인정받기 위하여 상표를 드러내는 것과 본질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비본질의 종교생활에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종교생활을 그래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결론은 당신도 알고 있듯이 하나마나입니다.
그리고 진실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기준앞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백신의 확인된 기만을 접종한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그들은 괴로워하며 불편해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대신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듣기에 불편한 것인지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는 가가 사람의 선택이며, 그 선택이 곧 믿음의 반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믿음의 기본은 나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나의 삶의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마야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스마야의 삶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은연중에 우리안에 퍼지는 누룩과 같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사람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유추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초와 근간이 흔들리는 일로 우리의 삶의 기준이 사람의 것이 되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죽어버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작은 타협이지만 반죽에 스며든 누룩이 온 반죽에 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처음 옷의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단추를 풀러야 하는 것처럼 기준이 잘못되면 그 후의 성과는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처음부터 모두 풀고 다시 채워야 하는 잘못시작된 단추를 끼우는 일은 하나마나한 일이 됩니다.
사람의 기준의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과 상관이 없는 사람의 경력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기준으로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았다면 반석이 없는 믿음으로 믿음의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불편함과 동족의 공격을 감수하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준에 순종함이란 시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스파냐가 이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귀에 읽어 주었더라. 29)
And Zephaniah the priest read this letter in the ears of Jeremiah the prophet, 29)
스마야가 스파냐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스파냐가 예레미야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들의 내용은 단수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O 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30)
Then came the word of the LORD unto Jeremiah, saying, 30)
스마야의 편지 내용에 대한 인용이 끝나고 주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사로잡힌 모든 자들에게 보내어 말하라. 주가 느헬람인 스마야에게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는데도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였으며 또 그거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으니 31)
Send to all them of the captivity, saying, Thus saith the LORD concerning Shemaiah the Nehelamite; Because that Shemaiah hath prophesied unto you, and I sent him not, and he caused you to trust in a lie: 31)
그러므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인 스마야와 그의 씨를 벌하리라. 그에게는 이 백성 가운데 거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내가 내 백성을 위하여 행하려는 좋은 일도 그가 보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이는 그가 주를 거역하여 반역을 가르쳤음이라. 32)
Therefore thus saith the LORD; Behold, I will punish Shemaiah the Nehelamite, and his seed: he shall not have a man to dwell among this people; neither shall be behold the good that I will do for my people, saith the LORD; because he hath taught rebellion against the LORD. 32)
어떤 사람도 예언하는 자의 열매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예언자의 예언이 예언자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그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알고 있고, 하나냐와 아합과 시드키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지만 나머지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장이 세상의 문화라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융통성이나 합리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반역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스마야와 그의 씨가 벌받음은 마치 연좌제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죄 때문에 자손이 벌을 받는 다면 좀 억울할 것같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땅에 관하여 이 잠언을 들어 말하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더니 그 자식들의 이가 시큰거린다." 고 한 것이 무슨 뜻이냐?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에게는 이스라엘에서 이 잠언을 쓸 경우가 다시는 없으리라.
보라, 모든 혼들은 내 것이라. 아비의 혼이 그렇듯이 자식의 혼도 내 것이라.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에스겔 18장 2절 3절 4절
위의 에스겔 말씀과 스마야와 그의 씨가 벌을 받음은 정반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29장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스마야와 그의 씨는 곧 스마야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중에서 스마야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를 이어 계속 나타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냐가 죽어도 아합과 시드키야와 스마야가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는 대를 이어 계속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은 교묘하여 구분하기 쉽지 않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그 대적에 동참할 수 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적을 구분함은 오직 말씀안에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건강함으로 유지 관리의 방식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말씀을 멀리하면 사람의 생각과 기준이 강해져서 하나님의 기준과 뜻보다는 사람의 기준과 뜻에 맞춰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경계하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그들이 듣지 않으면 멀리해야합니다.
최근에 이단에 대하여 좋은 분석을 하던 유트부의 한 채널이 천주교를 분석하면서, 천주교에 대해서 구교라고 지칭하면서 천주교의 잘못을 비판하기 이전에 신교가 더 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천지를 분석할 능력이면 천주교가 모든 이단의 시초라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타협한 것은 그들의 생각으로 믿음의 기준을 맞춘 결과물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믿음의 반석이 무너진 것으로 그들은 다시 지금까지의 모든 단추들을 풀고 처음부터 다시 단추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비본질로 아무리 감춘들 그 자신과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속이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나냐, 아합, 시드키야, 스마야와 같은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의 씨가 남아서 벌을 받는 것이 바로 이 유트부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냐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은 죽었지만 그의 씨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이 영상은 곧 스마야의 편지와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백신에 접종과 접종거부 단 두가지의 선택만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의 기준도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 단 두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삶이 믿음의 주춧돌 곧 반석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모래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처럼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하나님을 대적함이 되어,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O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쳐도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집이 반석 위에 세워졌음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면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극심하리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7장 24절 25절 26절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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