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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요한 14,6-14
연줄
최민식, 하정우 주연의 ‘범죄와의 전쟁’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폭력적인 깡패들 이야기라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주연들의 연기는 매우 좋았습니다.
여기서 최민식의 역할이 매우 인상 깊게 나옵니다.
1982년 최익현(최민식)은 비리 세관원이었는데 퇴출되기 직전에 부산 최대 조직의 젊은 보스
최형배(하정우)와 손을 잡게 됩니다.
최형배는 전형적인 깡패두목입니다.
그러나 최익현은 정치, 경제, 법조계의 많은 인맥을 바탕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최형배를 빼내주기도 하고 조직이 클 수 있게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합니다.
젊은 보스는 자신의 머리가 되어주는 최익현을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인간들끼리의 연줄은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서로 살기 위해 배신하게 되는 결과를 맺게 됩니다.
나라가 그렇다보니 서로 몸을 사리느라고 최익현을 도와주던 사람들도 모두 나 몰라라 합니다.
세상엔 연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취직하기 위해서도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도 일거리를 얻기 위해서도 학연, 지연 등이 아직도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성경에서도 쫓겨나게 생긴 집사가 그들로부터 덕을 보기 위해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빚진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함으로써 쫓겨난 뒤를 대비하는 예화도 나옵니다.
꼭 재물이 재산이 아니라 세상 말로 연줄이 있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어제 외국에서 한 신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고민이 있는데 기도를 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말로는 기도드려드리겠다고 하고 아무 걱정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혹은 안수를 달라고 많은 신자분들이 청하십니다.
물론 신자들이 사제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신들보다 하느님과의 연줄이 더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기도를 해 드려서 상황이 좋아지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드릴 때도 들어주시면 좋은 것이고 안 들어주시면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냥 기도를 드려 드리면 저의 책임은 다 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신자들은 기도를 드려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왜 내가 그리스도와의 연줄을 더 확실하게 맺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줄은 일상 삶 안에서 형성됩니다. 하루에 이런저런 많은 판단을 하고 살지만
정작 예수님의 의견을 묻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 성당 밖에서는 여러 공사가 한창입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고 결국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은 본당신부입니다.
‘이런 결정이 잘하는 것일까?’를 매번 물어보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물어보지 않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는 이유는 평소에도 내 자신의 뜻대로만 살려고 했지 내 안에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잊고 살다보니 어느 순간에 그 분께 도움을 구하기가 왠지 쑥스러운 것입니다.
그 분께 도움을 구하기가 당당하지 못하다면 그만큼 연줄이 두텁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매우 당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돌아가시니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분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예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당신이 다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버지께서 거부하지 않으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도 예수님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청하시면서 얼마나 당당하십니까?
거부하는 의도가 뚜렷한데도 성모님은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시며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당신의 청을 예수님께서 절대 거부하실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십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께 청하는 모든 것을 그 분이 하나도 거부하시지 않고 다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사랑을 그만큼 완벽하게 받을만하게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저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그 분의 뜻에 잘 순종하여 그 분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람이었다면 신자들이 저에게
기도를 청할 때 주저 없이, “예, 걱정 마세요. 제가 기도해 드리면 다 잘 될 거예요.”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평상시에 예수님과 성모님과 더 끈끈한 연줄을 맺어서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을 위해 당당하게 청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3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사도행전 11,19-26 요한 10,22-30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의식주의 충족이겠지요.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의식주가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자연스레 추구하게 되는 것이 놀이 문화요 축제 문화입니다.
바닷가에 살다보니 실감합니다.
뷰가 좋은 캠핑장은 사시사철 호황입니다.
강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캠핑을 하길래, 살짝 봤더니, 텐트며 캠핑 도구들이 최첨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춥고 불편할까 걱정했었는데, 세상 따뜻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놀이 문화나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축제가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장 25~27절)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3. 5. 3. 수)(요한 14,6-14)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8-11)”
여기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모세도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다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 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출 33,18-23)”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1-13)”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만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아버지’를 뵙고 싶어 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지금 상황은 최후의 만찬이 끝난 뒤에 배반자 유다가 떠나고, 예수님께서 고별의 말씀을 하시는 상황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입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몹시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 사도를 꾸짖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은 모든 사도들을 꾸짖으신 것이고,
그것은 사도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한 격려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꾸짖은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은,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예수님은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신 분”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 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외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11절).
예수님의 ‘일’과 ‘삶’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표징’과 같은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4-16).”
사도들은 예수님의 ‘일’과 ‘삶’이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출발점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삶이 ‘사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존재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12절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항상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고,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협력자들입니다.
13절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과 신자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계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