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단장(處容斷章) 1의2
김춘수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작품해설]
이 시는 고대 설화 속 인물인 ‘처용’을 제목으로 빌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용’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대신, 암울하면서도 몽환(夢幻)에 가득한 시인의 어린시절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어떤 특정한 의미나 주제 의식을 시행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3월의 어느 남쪽 바다에 내리는 눈’을 보고 느낀 인상을 감각적인 언어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연결로써 이미지화한다. 흔히 김춘수의 시를 ‘무의미의 시’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시가 심상(心象)만을 제시하는 서술적 이미지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도 그와 같이 시의 내면에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 시행들 속에서 어떤 특정한 관점을 추출하여 의미화하려고 하면 이 작품은 더욱 난해해질 수밖에 없다.
[작가소개]
김춘수(金春洙)
1922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중퇴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시화전』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대한민국문학상 및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경북대학교 교수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旗)』(1951), 『인인(隣人)』(1953), 『제1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打令調)·기타』(1969), 『처용(處容)』(1974), 『김춘수시선』(1976), 『남천(南天)』(1948),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 『라틴 점묘』(1988), 『처용단장』(1991), 『돌의 볼에 볼을 대고』(1992),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1993), 『서서 잠자는 숲』(1993), 『김춘수시선집』(1993),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가을 속의 천사』(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