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아들과 딸에게 아빠의 진단 결과를 알려주고, 더 나빠지지 않도록 가족이 어떻게 협조해야 할지 얘기를 나눴다.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잘 알려진 예방법은 금주, 금연, 운동, 그리고 단 음식 줄이기라고 한다. 남편은 오래전부터 금주와 금연은 잘 지키고 있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단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거의 중독 수준이다. 아이들은 맛있는 케이크나 귀한 초콜릿이 생기면 으레 우리 집으로 갖고 온다.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하지만, 번번이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단 음식 절대 금지'를 다짐시켰다. 그러나 이후에도 가끔 아이가 현관 중문을 살짝 열고 '맛만 보시라고' 하면서 내 눈치를 보면, 남편은 '어쩌다 한번은 괜찮지?' 라며 얼굴이 환해진다.
최애 먹거리 금지, 남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가혹한 처사다. 곱씹어 생각해도 야멸차고 비정하다.그러나 어쩌랴 평소 생이 유한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먼 남의 일로 생각했는데 의사의 통보를 받고서아 비로소 남은 시간이 한정돼 있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했다. 한데 그동안 크고 작은 많은 일을 묵묵히 버텨낸 그의 정신력을 믿어왔던 나는 그의 인지 장애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정신만 차리면 제자리를 찾을 것 같은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유머로 혹은 당연한 듯 슬쩍 넘어가려는 것이 못마땅했다. 완충 역할을 하는 다른 가족이 없어서인지 이런 내 부정적인 감정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됐다. 사실 그도 나름 애쓰고 있는데 내 욕심이 과한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과 혀가 앞장을 서는 바람에 종종 그의 처진 어깨를 도닥이느라 한참씩 애를 먹었다.
2023년 성탄절에 한 내 고해성사 중 한 꼭지다
남편이 프리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황당한 마음에 온유하게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대화가 어눌해 늘어지면 불쑥 짜증을 냈고, 단어를 미처 떠울리지 못할 때면 성급히 재촉했습니다. 하물며 내가 챙겨야 할 건강식품도 종종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앞으론 남편의 증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날이 길어지도록 온 정성을 다해 돕겠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목소리는 떨렸다. 그동안 소홀했던 부분만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며 나를 옥죄었다. 고해 전에는 남편의 장애와 부족한 자신을 드러냄이 망설여졌는데, 솔직한 고백과 다짐을 한 연후엔 마음이 가라않으며 새로운 길이 환하계 불을 밝혔다. 불현듯 따뜻한 기운이 고해소를 나서는 나를 포근히 감쌌다.
오늘도 자꾸 도망가는 자신의 인지 능력을 붙잡으려 애쓰는 남편을 위해 두 손을 모은다. 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보살피며 지금 맞닥뜨린 높고 험한 산을 무사히 함계 넘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날까지 평화가 같이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이옥형 성신여대 명예교수 ohlee00001@naver.com
오늘도 또 새로운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