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 6-20
셋은 일백 오 세에
가인의 아벨에 대한 살인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의 발로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시는 인간에게선 그 어떠한 구원의 요소라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구원은 결코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구원은 특별한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 있을 뿐입니다. 그 특별한 방법이 곧 하나님께서 셋이라는 또 다른 아들을 준비하고 계심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탄생은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확신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의 증거입니다. 기필코 그 약속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표가 됩니다.
1. 가인과 아벨 대신 주어진 거룩한 씨가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을 잉태할 계대 입니다.
그래서 창5장은 셋의 족보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의 자손은 이러하니라” 또는 “○○의 대략은 이러하니라” 또는 “○○의 세계는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족보를 자세하게 나열하는데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고 있을 때마다 족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주며 앞으로 새로운 역사가 진행될 것을 예표 하여 주는 것이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족보란 지금까지의 역사를 가장 함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족보는 이제부터 새로운 인물을 통해 새롭게 전개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접어든다는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이것을 보아 창5장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총정리하고 셋의 후예들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인 거룩한 씨를 어떻게 준비해 나가시며 어떤 경로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바로 그 대답이 노아입니다. 5장 족보가 노아와 그 세 아들로 끝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실 지에 대한 예표 입니다.
즉 노아와 그 아들들의 출생을 기록함으로써 이제 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룩한 씨를 나타내실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창4장은 단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결국 죄악으로 멸망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요, 도저히 구원을 이루는 일에는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씨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세상의 역사는 두 갈래로 흘러갈 것입니다. 곧 가인의 세계와 셋의 세계입니다.
4. 본문 6-20절을 대략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지정하심과 의도하심에 따른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옛 선진들의 이름이 마치 역사 선상에 놓아두신 표지판처럼 계시의 도구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꿈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이 부분에 기록된 대로 “셋”이란 이름은 “지정된 자”라는 뜻이요 “에노스”란 이름은 “약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지정하신 자들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시는 생명의 계대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소멸되거나 끊기지 않습니다. “게난”이란 이름은 “대장쟁이”란 뜻이요 “마할랄렐”이란 이름은 “하나님께 찬송”이란 뜻입니다.
“야렛”이란 이름은 “내려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가시고 조정하며 고치시는 일이 그분의 사역 방식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교회의 명맥이 유지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찬송거리입니다. 그리고 “에녹”이란 이름은 “시작하는 자” 란 뜻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우리의 생명과 관련하여서 본래 보이시고자 하신 이정표입니다. 그런데 위의 모든 사람들 중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었다고 합니다.
본 장에 “죽었더라” 란 말이 모두 여덟 번 나옵니다. 이렇게 이 말이 거듭거듭 나오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담 하와에게 말씀하신 대로(2:17) 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죽음의 가장 깊은 뜻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여기서는 “죽었더라” 란 말이 사람들에게 네 가지 교훈을 주어 하나님을 믿게 하여줍니다.
첫째, 그 죽음은 죄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죽음이 죄악의 결과인 줄 아는 자는 그 결과를 가져오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을 바라볼 수 밖에 없고 주께서 내신 구원의 방도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있게 되며 그분께서 내신 구원의 방식을 인하여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권위를 높이 아는 그만큼 그의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사고방식을 따라서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역사 선상에서 밝히 드러내신 교리를 따라 믿습니다.
셋째, 사람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동안 살다가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에(3:19) 영적 생명만이 그의 소망인 줄 알고 그것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런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이런 자를 만나 주시고 영생의 소망과 함께 확신을 주십니다.
넷째, “죽었더라” 란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2:17)은 참된 반면에, 마귀의 말(3:4)은 거짓되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합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한 인간은 확실히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거짓말쟁이로 판명되었습니다(요8:44). 그러므로 인생들은 죽음을 볼 때마다 마귀의 거짓됨을 실감해야 됩니다.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들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게 나에게 복이다” 라는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