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당이 군사력을 양성하고자 한 것은 국민당정부가 동북지역을 장악하면 남한과 이 지역의 친남한 세력이 북한을 협공해 통일을 이룬다는 구상 때문이었다. 훗날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동북지역 조선인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영향 하에서 친북한적 성격을 갖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 소련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뺏겼던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이권을 다시 확보하는데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일제가 항복하기 하루 전인 8월 14일 중국공산당과의 이념적 연대를 외면하고 국민당정부와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미국은 주도적 역할을 도모했으나 그들의 오판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소련과 함께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소련은 9월 중순부터 전승국 외교장관회의 이후 미국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전후 처리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이견이 노출되면서 서로 제 갈 길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3월 공식적으로 소련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트루먼독트린’을 선포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정부가 전후에도 동북아시아의 맹주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국민당정부에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판단은 오판이었다. 당시 국민당정부는 중국공산당에 비해 전력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다. 국공내전 초기에는 이러한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국민당정부가 승기를 잡는 듯 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당정부는 중국 동북지역은 물론 본토마저 중국공산당에 내주었다. 이러한 오판은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중국 동북지역에서 누렸던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국민당정부와 손잡고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한 소련은 국민당정부가 중국공산당에 패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국공내전 초기부터 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 사이에서 이중적 태도를 취하며 기회를 엿본 결과 곧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함에 따라 중국 공민이 되었다. 당연히 이념을 공유하며 같은 진영에 속한 북한주민들과는 민족적 유대를 나누었지만 남한과는 아무런 접촉도 갖지 못한 채 잊고 살아야 했다.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에야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 공식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에 남은 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국민당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었지만 동북지역의 질서개편 과정에서 행위의 당사자로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주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공산당 편에 섰던 조선인들이 수적으로는 물론 세력 내에서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 하에 비교적 완만하게 공산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조선인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공내전에 참전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큰 공을 세운 조선인들은 ‘동북(만주)기지론’을 주장하며 북한 중심의 한반도통일을 모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을 돕는데 앞장선 이유 역시 그런 생각에 따른 것이다. 조선인의 국공내전 참여는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의용군이 해방 이후 중국공산당을 돕고 나섬에 따라 자연스레 국공내전에 개입하게 됐다. 조선의용군은 해방과 함께 동북지역에 진출해 이 지역의 해방을 견인하고 북한으로들어가려 했으나 친중국공산당 세력인 이들이 북한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한 소련군에 의해 저지되면서 일부만이 무장해제한 후 개인 자격으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조선의용군은 북한 입국이 저지된 후 동북의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어 중국공산당을 돕고 나섬으로써 해방 초기부터 중국공산당의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둘째는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됐던 조선인 대원들의 참여이다. 이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이지만 일부 인사들은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특별히 중요한 활동을 하였다. 셋째는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전개한 참군 참전 운동에 일반 조선인이 적극 참여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중국공산당 세력 확대 개편의 주된 자원이 됐다. 한국전쟁일 발발하자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북한을 편들어 전쟁에 참여했다. 조선인의 한국전쟁 참여는 두 갈래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한국전쟁 발발에 앞서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에 편입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전쟁에 참여한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세계적으로 냉전이 구조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해 한국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조선인들이 인민지원군에 참여하게 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