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금지곡
1996년 대중음악계로서는
아주 뜻깊은 해입니다.
군부정권에의해 자행된
소위 금지곡 망령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던
해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심의제 폐지
96년 6월의 일입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한국 최초의 금지곡은
일제에 의해 금지된
'아리랑'과 '봉선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초의 금지곡 '아리랑'부터
한국록음악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회자되는 러닝타임 10분의 대곡인
아름다운 강산의 오리지널버전을
거쳐
사전심의 폐지의
직접적 원인이된
95년 서태지의 시대유감까지
중요 금지곡 중에서
몇곡을 올릴까합니다.
이 땅의 금지곡 역사...
그리고 사전심의폐지까지
70년 역사...
사전심의가 폐지 된 후
"나만 절실했지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고
허탈해 했던 정태춘님의 독백이
공명처럼 귓전에 윙윙거립니다.
1부-60년대 이전
1. 아리랑- 37년
일제 강점기 금지곡 3:08
2. 꼬집힌 풋사랑-남인수 38년
해방후 월북 작가 금지곡 3:11
3. 껌씹는 아가씨-김상국 66년
가사저속 2:45
4. 키다리 미스터김-이금희 66년
단신인 박통의 심기 불편 2:03
5. 내일은 해가 뜬다-쟈니리 66년
'사노라면'의 원곡. 현실부정 2:22
2부-70년대 part1
6. 아침 이슬-양희은 70년
사유없음 3:10
7. 거짓말이야-김추자 71년
불신조장
8. 아름다운 강산-신중현과 더 맨 72년
음반자체를 퇴폐로 몰아버림 10:00
9. 물좀주소-한대수 74년
물고문연상 3:09
3부-70년대 part 2
10. 불꽃-정미조 75년
사유없음
11.왜 불러-송창식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 시의부적절
12. 불꺼진 창-조영남 75년
표절
13. 한잔의 추억-이장희 75년
영화 별들의 고향, 가사 퇴폐
14. 나는 열아홉 살이예요-윤시내 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퇴폐
4부-96년 사전심의철폐까지
16. 섬아이-박찬응 74년
창법미숙
17. 미인-신중현 75년
가사저속 퇴폐
18. 고아-오세은 75년
지나친 비정, 불신감 조장
19. 고독한 디제이- 이재성 86년
다운타운 디제이 사기저하 민간단체 담합
20. 92 장마 종로에서-정태춘 93년
무심의 발표곡 사전심의 철폐 요구
21. 시대유감-서태지와 아이들 95년
사회비판적 가사 삭제문제
아름다운 강산 - 신중현
신중현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습니다.
록의 대부, 한국록의 산 증인,
한국적 록의 완성자...
그는 원하는, 갖고 싶은
수식어는 무얼까요?
신중현의 노래를 알게 된 건
한참 음악에 빠지던
중학교 때입니다.
사이키델릭 스타일이니
음악적 미 의식을 혼합해...
어쩌구하는 건 잘 모릅니다.
다만 로큰롤의 리듬이지만
애잔한 듯 신나는 듯한
'신중현풍'의 노래가
좋을뿐입니다.
2006년을 살고 있는 오늘
1960년대의 감성을 말입니다.
1940년 11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난
신중현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벌판을 떠돌았고,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가족을 모두 잃고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힘든 공장생활에
유일한 기쁨은 기타였으며
독학으로 기타연습을 하다가
1958년
미8군 무대에
기타리스트로 데뷔하는 것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해
일본식 트로트 일색이던
한국에 서구 대중음악을
들여놓았고
이후 5년간
미8군의 톱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신중현은 미8군에서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졌어요
(저하고 애칭이 같습니다).
미8군이라하면
60년대 부터 80년대까지
한국 대중가요의 발전을
이루어내고
역사를 바꾼
음악인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세시봉이란 살롱은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
인기 가수를 배출시킨 곳입니다.
1963년
국내 최초의 록밴드
‘에드포’를 결성하고
‘빗속의 여인’이 담긴
앨범을 발표하지만
시장의 냉대를 받고 말죠.
록밴드로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신중현은 1968년
자매 듀오 ‘펄시스터즈’의
데뷔음반을 제작하면서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김추자, 박인수, 장현 등
많은 신인들을 발굴해
스타제조기로서의 성가를
한껏 올리기도 했답니다.
소울 창법의 박인수가 부른
‘봄비’와
장현의 ‘미련’은
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일본 음악계에서
'봄비'를 높이 평가하며
신중현을
여러 가지 좋은 조건으로
유혹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음반회사에서
그를 찾아와서
헬기, 거대한 집,
거액의 돈을 주겠다는 등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겠다며
그를 유혹했고.
그들은 일본인 귀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신중현은 그 유혹을
거절했다고 하네요.
당시 그의 음악성과
인기가 어떠했는지
실감하는 대목입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이랄 수 있는
‘미인’이라는 노래는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발표된 곡으로
밴드로서도
명성을 갖게 해줍니다.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남녀노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미인’을 켜지 않으면
거리가 조용할 정도였다네요.
하지만 새로운 청년문화에
반감을 품고 있던
정부가 록과 포크음악의
대표주자들을
활동금지로 묶고
대부분의 노래들이
퇴폐적이고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했는데,
(...김추자가 노래하면서
추는 춤을 간첩에게
신호를 보내는거다
라면서 금지했다는군요)
신중현의 ‘미인’외
100여곡이 금지곡으로
분류되고,
연이어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대마초 연예인으로
낙인찍혀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대마초로 붙잡혀 가면
무조건 동료연예인을
50명씩 대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혹독한
표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신중현 이었습니다.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대통령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정치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합니다.
대마초 파동은
그후 3년 뒤의 일입니다.
암튼 그
는 대마초 공급책으로
오해받아
정신병원과
감방 신세를 졌다고 합니다.
기타밖에 모르던
그에겐 아주 가혹한
시련이었을 듯 합니다.
정신병원이라니요...
수감시절
신중현은 아내에게
책을 넣어달라고 해
독서에 몰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감옥을 나온 뒤에도
오랫동안 활동을 정지당했는데
그때도 책과 함께
세월을 견뎠다고 하네요.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연에활동 금지조치가 풀려
활동은 가능해졌지만
대마초 파동은
그에게서 부와 명성, 인기
모두를 빼앗아 갔죠.
결국 신중현은
음악가에게 가장 소중한
악기를 하나씩 팔아가며
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80년대
대중음악은
펑키와 디스코 일색이이었고
‘마치 날개가 꺾인 새처럼
기력이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합니다.
신중현에 대한 재평가가
일기 사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음악비평계가 그
의 음악사적 의미를
재추적하고,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그의 노래들을 리메이크하기
시작했고,
또한 헌정앨범을 바치며
그의 음악 정신을 기렸습니다.
그리고 2006년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록의 대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전국순회은퇴공연을 하는
한 마에스트로의
스토리를 싣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음악인생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거장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겠죠.
세월이 흘러
가요계에 불어온
해금바람에
활동을 할수 있게 되어
들고 나온 곡이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신중현의 많은 노래들이
후배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죠.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
'님은 먼 곳에'
'빗 속의 여인' 등등
주옥같은 노래들입니다.
인생의 다른 시기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다시 음악을 위해
컴퓨터공부를 사작하고
1994년엔
연주에 녹음, 믹싱까지
혼자해 내기도 합니다.
신중현은
'나는 좀처럼 뒤돌아볼 줄 모르는
천성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모든 용기와 집념 뒤에는
무엇보다 불우한 자신의
어린시절을 위로해주던
기타가 있었을 겁니다.
그가 쓴 자서전의 제목처럼
영원히 잠들 것 같지않은
바로 그 기타 말이죠.
시나위의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을 비롯하여
세 명의 아들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록음악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누구나 ‘하고 싶다 ’ ’갖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을,
자기의 일부처럼
스스로를 길들여간
사람들을 보면
나는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어 좋습니다...
그시절 그노래 TV - 방송 금지곡
| 금지곡
방송내용
한국에 있어서 검열을 통한 음악에 대한 통제는 강점기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68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시작한 음반심의는 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이후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금지곡은 대부분 정치적인 요인에 의해 선정되었고, 심의기준 역시 객 관적인 근거와 사실보다는 심의의원의 개인적인 시각으로 선정되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노래들은 금지곡이란 족쇄를 차야 했고, 가요발전이 크게 지체되는 계기가 됐다. 가요발전을 해쳤던 대중음악사의 어두운 일면인 금지곡의 역사와 파장을 알아본다.
1. 금지사유도 가지각색! -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배호, ‘0시의 이별’ : 통금이 있던 시절, 0시에 이별하면 통행금지 위반이다. 금지!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 행복의 나라로 간다고? 그럼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건가? 금지! 이장희, ‘그건 너’ : 늦은 밤까지 잠 못 드는 이유가 너!, 유신체제 때문이라고? 금지!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금지곡이 되던 시절, 금지사유는 다양하고, 그럴 듯(?) 했는데...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수많은 음악이 어느 날 갑자기 금지곡이 된 사연은 무엇일까?
2. 부르지 말라고 하면 더 불렀고, 듣지 말라고 하면 더 들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금지곡 모음을 가진 친구에게 사정사정 하여 어렵사리 구한 판은 그야말로 보물 1호였고, 음악다방의 신청곡 1순위는 단연 금지곡! 그 시절 금지곡을 사랑했던 팬들의 추억담
방송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금지곡을 불렀다는 송창식과 ‘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은 한대수를 만나 30년 전 그 노래를 다시 불러본다.
3. 사전심의제는 헌법 위헌!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는 명백한 헌법위헌이었다? 현 법무부 장관을 만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 된 과정과 그 의미를 되짚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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