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에 OCN에서 새벽의 7인 했고, 11월 18일 다시 방영한답니다.
요즘 나온 2차대전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긴장감 넘치면서 매우
매우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전쟁영화매니아라면 꼭 봐야할 영화
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대한 소개글은 여기 전쟁영화 소개메뉴에
보시면 잘 나와있습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히틀러 도당의 광신적인 눈에는 나치스의 이상형으로 비쳤다. 실제로 히틀러는 얼음과 같은 차가운 눈의 야심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청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을 정도이다. 14세 때 하이드리히는 자유소년단에 입단하여 시가전이나
테러의 기초를 익혔다. 1922년에 해군에 들어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소위에 임관한 그는 그러나 1931년, 섹스에 얽힌 불미스러운 일로 사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하이드리히는 모든 시간을 나치스의 세력신장에 바쳤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뮤니히 경찰의 정치부문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관할구역 내에는 악명을 떨친 다하우의 강제수용소가 있었다.
1934년에는 SS(히틀러 총통의 친위대)의 베를린 지부장으로, 후에는 하인리히 히믈러 지도하의 SS부장관으로 약진했다. 1934년의 '긴 나이프의 밤'의 돌격대 숙청에서는 요제프 게벨스와 짜고 숙청의 대의명분을 날조하여 그 실행을 총괄했다.
1938년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오스트리아에 있어서의 치안경찰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독일인에 대한 폴란드의 '잔학행위'를 날조하여 독일의 폴란드 침입을 정당화하는 음모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1941년에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총독을 겸임했다. 프라하에 부임하자 1개월 동안에 300명의 체코인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그후 이 지위를 겸한 채 노르웨이,네덜란드,점령지 프랑스의 치안경찰 책임자에 임명되어 태업이나 테러행위를 엄격히 탄압했다. 그가 시찰하는 곳에서는 대량처형이 행해졌다. 때문에 '사형집행인 하이드리히'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강제수용소의 건설과 운영권도 장악하여 수백만의 유태인과 '탐탁지 않은 인물'을 청산했다.
하이드리히는 개인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잘했으며 펜싱도 명수였다. 용감하기까지 했다. 기분이 내키면 공군 전투기로 실전에 참전하여 러시아 전선에서 피격당한 적도 있었다. 이때는 간신히 독일군 점령지로 불시착하여 목숨만은 건졌다. 이런 종류의 과장된 행위를 일부 동시대인은 이렇게 바라보았다. "저것은 상관 히믈러를 앞지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다. 히를러를 대신하여 총통 제 1의 심복 지위를 노린 것이다." 나치스 첩보기관의 에이스였던 월터 셀른베르크는 하이드리히에 관하여 후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사나이는 남의 눈에는 숨겨진 하나의 선회축이었다. 나치스 체제는 이 축 주변에서 선회했다. 한 나라의 모든 변화가 그의 강압적인 성격에 의해 간접적으로 끌려다녔다."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그후의 나치스에서 그는 어떤 임무를 맡았을까? 이것은 역사가에게 있어 흥미진진한 공상거리였다.
1942년 5월 27일 아침, 하이드리히는 오픈카로 점령지를 시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두 명의 체코인이 수류탄을 던졌다. 자동차는 순간적으로 날아가고 하이드리히는 등뼈가 부서졌다. 습격자는 영국에 근거를 둔 자유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얀 쿠비스와 요셉 가베이크였다. 습격하기 조금 전에 영국 공군기에서 이 지역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습격은 면밀한 계획하에 실행되어 2명은 연막탄을 터뜨리면서 현장에서 도망쳐 칼 보로마에우스 교회에 숨었다. 그러나 카렐 쿠르다라는 현지의 남자가 배신하여 이들을 독일군에게 밀고했다. 두 사람은 친위대의 공격으로 다른 레지스탕스대원 120명과 함께 전멸했다(밀고한 쿠르다는 우헤 레지스탕스에게 살해되었다)
독일군은 서서히 하이드리히 살해에 대해 보복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마을 리디체는 모조리 말살되었다.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 172명이 처형되었다. 여기에는 여자 몇 사람도 포함되었다. 나머지 여자 195명은 수용소에 보내어 거기서 적어도 52명이 사망했다. 출산 직전의 임산부 4명은 프라하의 산부인과로 보냈다. 출산 후 아기는 모두 살해하고 어머니는 수용소로 보냈다. 리디체 마을의 아이 70명 대부분도 살해되었으나 친위대의 '인종전문가'의 조사를 통과한 약간 명은 독일인으로서 교육받았다. 마을을 말살하던 날, 선전장관 게벨스는 베를린에서 얼마 남지 않은 유태인 5백명을 체포하여 사건 8일 후에 하이드리히가 사망하자 이 가운데 152명을 처형했다. 텔레젠슈타트의 유태인 3천명도 처형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왜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는가? 그후의 가혹한 보복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체코측의 하수인 2명이 영국측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은 분명했다. 이를 전제로 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 통용돼온 유력한 설은 이렇다. "하이드리히는 윈저 공의 반역활동에 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살해되었다." 윈저 공이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문제로 퇴위한 영국 왕 에드워드 8세를 말한다. 한편 <친위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의 저자 칼럼 맥도널드는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 행위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권의 지도자 에두아르트 베네스의 도박이었다. 그 목적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체코의 지하조직이 유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걸 영국과 소비에트에 인식시키는 것. (2)체코슬로바키아 내의 공산주의자보다도 유리한 입장을 구축하는 것. (3)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스와 안이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외에 분명히 보이는 것." 이러한 견해가 정확하다면 베네스도 연합국측도 결과적으로 대량유혈을 각오한 작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참고 : 칼 시퍼키스의 <암살>
p.s
영화 1975년작 '새벽의 7인'이 리메이크작이라고 하던데 그 이전에
제작된 영화에 대해 혹시 아시는 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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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새벽의7인인것 같습니다. 이 카페의 메뉴중
'전쟁영화 소개 및 해설 모음'을 보시면 예전에 제가 간단히
이영화에 적은 글이 있습니다.규모가 크지 않은 비디오점에서는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비디오로 출시된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먼지는 뽀얗게 쌓여도 그렇게 드문 비디오는 아닌것
같았는데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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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녀석이 소개해준 영화인데...
'7인의 새벽'이라고...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한 첩보전 영화라고 하더군요...
녀석은 마지막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던데...
혹...자세한 내용을 아시는 분은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런지...
그리고 친구는 그 영화를 예전에 TV에서 보았다던데...
비됴로 혹시 나왔는지도 알고 싶군요...
물론 동네 비됴가게에서 찾을려면...
고생 좀 해야겠지만...